〈 167화 〉167회.
'후우... 정신 집중하자... 내야 땅볼만 나오면 병살로 처리할 수 있어...'
벨리나는 땅볼을 유도하겠다고 생각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1루 주자와 타자 모두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병살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벨리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타자인 한태연은 최대한 공을 멀리 보낼 생각을 하였다.
'최소한 희생 플라이라도 만든다..!'
벨리나가 선택한 초구는 존 아래로 향하는 낮은 직구였다. 한태연이 직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서 낮게 유인구를 던진 것이다.
"스윙~!"
그리고 한태연은 벨리나의 유인구에 여지없이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공을 억지로 맞추지 않았다는게 타자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파울!"
이번엔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직구를 건드려 파울이 되었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로 몰리게 된 한태연은 잠시 베팅 박스에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아래로 떨어지는 유인구를 던질까..? 아니면 결정구인 스크류볼..? 직구?'
셋 중 하나로, 1/3의 확률이었지만 한태연은 귀신 같이 자신이 노리고 있는 공을 알고 있는 벨리나의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존을 통과할 것 같은 공은 무조건 맞추기로 마음먹은 한태연. 그리고 그녀에게 벨리나의 결정구인 스크류볼이 날아왔다.
바깥쪽으로 향하다 몸쪽으로 휙 하고 떨어지는 궤적의 스크류볼. 존 안쪽으로 넉넉하게 들어가는 공이었지만, 완벽하게 구사된 스크류볼에 한태연은 정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틱~!
얇게 빗 맞은 타구음과 함께 공이 떼굴떼굴 굴렀다. 벨리나가 빠르게 공을 주워 2루로 가볍게 토스했다.
"좋았어..!"
투수-2루-1루로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에 벨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내 전광판에 나와 있는 점수를 보고선 다시 시무룩해졌다.
"뭘 그렇게 걱정해! 우리 못 믿어?"
벨리나의 표정을 본 아연이 그녀와 어깨동무를 하며 위로했다. 리사 역시 바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지 않고 벨리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래. 아연이 못 미더우면 날 믿어."
"뭐야?! 보나 마나 고의 사구로 출루할게 뻔한데, 니가 뭘 한다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벨리나가 걱정을 떨쳐버리고 웃었다.
난타전 양상으로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3회 말이 되었다. 선두 타자는 5번 타자 현아였다.
그녀의 빠른 발을 경계하는 듯 내야수는 거의 투수와 동일 선상에 섰고, 외야수들이 내야수의 자리까지 내려왔다.
이러한 수비수들의 배치를 의식한 현아가 최대한 강하게 타구를 때렸지만, 내야수들을 통과했지만, 외야수들에게 막혀 좌익수 땅볼 아웃이라는 이상한 기록으로 아웃되었다.
현아가 수비수들의 극단적인 전진 배치에 고전하는 동안 동국의 현란한 손길을 느낀 지아가 투수의 약간 높은 직구를 잡아 당겨 깔끔한 우익수 앞 안타를 신고했다.
리사를 고의 사구로 내보내고 1사 만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아연이 들어섰다.
특훈실을 나서며 동국과 벨리나에게 타점을 올리고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아연은 타격 자세를 잡고선 투수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내가 한 방 때리고 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1루에서 자신을 히쭉거리며 바라보는 리사의 표정에 더욱 강해졌다.
병살을 노리는지 초구는 존보다 살짝 낮은 코스의 직구였다. 하지만 아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연의 등급은 C+, 하지만 투수인 안소연의 등급은 그보다 거의 2등급 정도 낮은 D-이다. 웬만한 소연의 공에는 다 대처가 가능한 것이었다.
2구는 바깥쪽으로 가라 앉는 체인지업. 아무래도 안소연과 한태연 배터리는 아연과의 승부를 최대한 어렵게 끌고 갈 모양이었다.
"볼~"
몸쪽으로 완전히 낮게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아연이 치려고 해도 칠 수 없는 공이었다. 여기서 아연의 고민이 시작됐다. 바로 여기서 볼넷을 골라 나갈것인지, 아니면 장타를 노려야 하는지 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볼넷으로 내보낼 심산이었는데, 여기서 자신이 나가게 된다면 다음 타자는 AI 타자이고, 그 다음 타자는 현아였다.
현아가 은근히 타점이 있긴 하지만, 그녀에게 많은걸 기대할 순 없었다. 우드페커스의 타선이 만만치 않은데 과연 여기서 1점에 만족해야 되는지 고민이었다.
슬쩍 더그아웃을 바라보니 앤서니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지은은 자꾸 고개를 돌려 복도 쪽을 바라보는 것이 동국과 현아가 하고 있을 스킨십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에이씨, 몰라~! 그냥 칠 만한 공이 오면 치고, 어림 없는 공이 오면 걸어 나가지 뭐.'
그리고 그런 아연을 유혹하듯 투수가 던진 체인지업이 살짝 몰렸다. 물론 완전히 빠져 나갈 공이 살짝 보더라인 근처로 온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연은 그 공을 충분히 칠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밀어 친다는 느낌으로 공을 친 아연. 그리고 타구는 라인 선상을 따라 빨랫줄처럼 뻗어갔다.
"어어어..!"
"달려, 달려!!"
잘 맞은 타구에 관중들의 자세가 점차 일어났다. 그리고 파울 라인 안쪽에 공이 떨어지자 홈 팬들은 열광하며 마구 팔을 돌려댔다.
오른쪽 외야 구석진 곳까지 굴러간 공에 아연은 여유롭게 2루에 안착할 수 있었다.
'우후훗~! 기분 좋군~'
기쁨의 미소를 애써 감춘 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 아연. 마치 이 정도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에 우드페커스의 더그아웃 분위기가 가라 앉았다.
이후 연속 땅볼로 2루에 있던 아연을 불러오지는 못했지만, 아연의 싹스리 2타점 2루타로 2점 더 달아난 발키리였다.
"나처럼 멋진 해결사가 있으니깐, 벨리나 너는 마음껏 던져. 알겠지?"
"후훗, 알았어요."
아연이 거드름을 피우며 벨리나에게 말하자, 벨리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아연의 모습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리사였다.
'흥..! 아연 주제에 2타점이라니... 마음에 안 드는군...'
아연이 으스대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렸지만, 리사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4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선 5번 타자 나아지의 타구가 2루수와 좌익수 사이 애매한 곳으로 향했다.
최초 높이 뜬 타구에 장타를 예상한 현아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가, 타구가 급격히 떨어지자 황급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떨어지는 공을 잡을 수 없었고, 나아지에겐 행운의, 벨리나에겐 아쉬운 안타가 되었다.
그렇게 무사 1루가 된 상황. 나아지는 타자가 벨리나의 커브에 크게 헛스윙을 하는 틈을 타서 2루를 훔쳤다.
"이에~!"
도루에 성공한 나아지가 원정 팀 더그아웃을 향해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들며 세레머니를 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외야에서 현아가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았다.
'앞으로 타구 판단을 좀 더 열심히 연습해야 겠어..!'
지난 비 시즌 동안 지지리도 좋아지지 않았던 수비 실력이 동국과 특훈을 하고 난 이후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현아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분명 좋아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점수를 억제하기 위해서 내 외야수 모두가 전진 배치 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자가 벨리나의 커브를 걷어 올렸다.
'좋아, 충분히 홈에서 막을 수 있겠어..!'
얕은 외야 플라이성 타구에 지아가 공을 잡자 마자 바로 홈으로 쏘았다. 지아의 강한 어깨를 이용한 빨랫줄 같은 송구.
그리고 그와 동시에 2루에 있던 발 빠른 나아지가 홈을 향해 돌진했다.
지아가 빠르게 송구를 하긴 했지만, 2루 주자의 발 역시 상당히 빨라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
"..."
선수들은 물론이고 관중들까지 숨죽여서 홈에서의 승부를 지켜보았고, 심판의 입을 바라보았다.
"세잎~!"
"아아..."
"이얏호~!"
심판의 세잎 판정에 송구를 했던 지아는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벨리나와 다른 발키리 선수들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2루 주자였던 나아지는 기뻐하며 껑충 껑충 더그아웃으로 향했고, 희생 플라이를 친 최원주도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아주 경기가 쫄깃쫄깃 하게 진행되는 구만..!"
"그러게... 그나저나 아쉬워 하는 지아 너무 예쁘다..!"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이러한 경기 흐름이 상당히 긴장됐지만, 지켜보는 관중들은 그저 재미나게 경기를 관람하였다.
4회 말, 선두 타자인 지아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우드페커스 감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원래대로 라면 리사를 고의 사구로 내보내고 아연과 승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아연은 3타수 2안타, 그것도 안타가 모두 2루타였다. 이처럼 컨디션이 좋은 타자 앞에 무사 만루는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사와 승부 하기도 위험했다. 1회 말 리사와 승부 하겠다고 달려들었다가 홈런을 맞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한 점차인 상황에서 추가로 점수를 내줬다간 경기를 뒤집기 어려워 진다.
"소연아, 어떻게 할래. 승부 할 수 있겠어?"
마운드를 방문한 투수 코치의 물음에 안소연이 리사를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리사가 볼넷으로 걸어 나갈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무조건 치려고 할테고, 자신은 그런 타자의 심리를 이용해 어렵게 승부 하기만 하면 승산이 있을꺼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선수가 코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겠는가. 이건 거의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다.
"그래, 난 너를 믿는다. 주자가 도루 할 것 같지 않으니 주자는 신경 쓰지 말고, 타자와의 싸움에 집중해. 알겠지?"
"네, 코치님!"
리사와의 정면 승부를 위해 지아가 뛰지 않을 꺼라 판단한 우드페커스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애초에 리사와의 승부를 피해도 그 다음 타자가 아연이기에 발키리 입장에서는 별로 상관 없었다.
오히려 리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아가 도루를 성공할지는 둘째 치더라도 도루를 시도하는게 더욱 유리했다. 하지만 리사가 도루를 할 마음을 가지고 있던 지아를 못하게 막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