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99회.
지아는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의 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그 전 타석과는 느낌이 좀 달라진 것 같았다.
'뭔가 일반적..? 아니, 특별함이 사라졌다..?'
그 전 타석에서는 허를 찌르는 듯한 투구 패턴이 이어졌다. 직구를 노리고 있으면 계속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그래서 이번엔 슬라이더를 노리면 직구를 던지는, 아니면 아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구종을 던졌다.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타이밍 싸움이라고,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추니 제대로 된 타격이 나오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추 제대로 맞았다.
따악~
투수의 슬라이더를 그대로 잡아 당기자 타구가 우익수의 키를 훌쩍 넘겼다. 지아가 보기에 홈런은 아니지만 2루타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베이스를 빠르게 돌며 확실히 그 미친년이 실력은 있는 포수라는 걸 실감했다.
"세잎~"
여유롭게 2루 베이스를 밟은 지아가 더그아웃을 향해 주먹을 쥐고선 번쩍 쳐들었다.
그 모습에 더그아웃에 있던 동국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박수를 치거나 엄지 척을 날렸다.
"후후~ 이게 내 실력이지..."
레이크걸즈는 아연이 타석에 들어서자 내야 수비수들의 위치를 뒤로 물렸다. 이는 점수를 내주더라도 아웃 카운트를 잡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대로 아연은 평상시라면 내야를 빠져나갈 타구를 쳤지만, 수비수들이 뒤로 가 있는 바람에 땅볼로 아웃 되고 말았다.
다만 그 사이에 지아는 여유롭게 홈을 밟아 1점 만회하였다. 점수는 1-3.
4회 말이 되서 벨리나는 한결 성장한 모습으로 3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5회 초, 발키리의 마지막 공격 기회. AI 타자들이 모두 아웃 되고 2아웃 상황에서 지아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군...'
힐끔 홈 팀 더그아웃을 보니 선수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하마 자신이 아웃 되면 뛰쳐나갈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지아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고선 투수를 응시했다. 어떻게든 경기를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말이다.
투수 역시 신중하게 갈려는 생각인지 초구부터 유인구가 들어왔다. 아래로 떨어지는 백도어 슬라이더였는데, 지아는 슬쩍 움직였다가 도로 멈췄다.
"볼"
지아는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을 더 좁히고선 타격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2볼 1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지아가 원하는 공이 왔다.
딱~
밀어친 타구가 그대로 2루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안타가 되었다.
타구를 2루수가 잡질 못하는 걸 보며 지아는 1루 베이스로 뛰며 불끈 주먹을 쥐었고, 레이크걸즈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은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좋아..!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아연 역시 지아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각오를 다졌다.
동국은 그녀에게 자신이 출루를 하면 그 다음에 대타로 리사를 내보낼 것이니 꼭 살아나가라고 당부를 했다.
아연은 지금까지 3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있었다. 비록 타점이 1개 있긴 했지만, 오늘 부진한건 사실이었다.
'그래, 이쯤되면 한방 때려줄 때도 됬지..!'
아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섰다. 1루에서 왔다갔다 거리며 투수를 괴롭히는 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지아가 저렇게 열심히 움직이는데 마땅히 자신 역시 안타를 뽑아내야 됬다.
수비수들의 위치는 전 타석 때처럼 뒤로 물러나 있는 위치였다.
레이크걸즈 역시 만약 아연을 살려 보내게 된다면 다음 타석 때 대타로 리사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연은 꼭 아웃 시키고 경기를 종료 시켜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습 번트라도 대고 싶지만...'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내야수들을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자신의 발은 빠르지 않고, 오히려 평균 이하였다.
투수가 초구를 던지자 지아가 스타트를 끊었다가 도로 1루로 되돌아왔다. 도루보다는 투수의 신경을 건드리려는 목적이었다.
그 덕분인지 초구가 바깥쪽으로 꽤나 빠졌다.
초구가 제구가 잘 안 되자, 아연은 1루에 있는 지아에게 눈인사를 건냈다.
주자가 이렇게 투수를 흔들어주면 줄수록 타자에겐 유리했다.
'자, 와라..!'
투수는 지아를 한번 보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공을 던졌다.
'직구...!'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자 아연이 크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하고 맞은 공이 빠르게 쏘아졌다.
'됐나..?'
치는 순간의 느낌이 좋아 기대감을 가지고 아연은 타구를 바라보았다. 꽤나 잘 맞은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는가 싶었지만, 1루수가 그대로 몸을 날려 공을 잡아냈다.
"아앗..!"
그 모습에 투수가 황급히 1루 베이스를 커버하러 뛰었고, 아연 역시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누가 더 먼저 가느냐의 싸움..!
탓!
"아웃~!"
아연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달렸지만 1루에 더 가까이에 있던 투수가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게 더 빨랐다.
심판의 아웃 선언이 나자 투수를 비롯한 선수들이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리곤 아연은 헥헥거리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쩝... 아쉽네..."
바닥에 철썩 주저 앉은 아연은 그렇게 레이크걸즈 선수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그아웃에서 동국을 비롯한 선수들이 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정리하고 있으니 재은이 어느샌가 와 있다.
"왔어, 누나?"
"어, 인터뷰 가능해?"
재은의 말에 동국은 기지개를 한번 피고선 미소를 지었다.
"아, 누나면 당연히 가능하지.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가요, 기자님?"
동국의 말에 재은 역시 피식 웃고선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일단 오늘 경기 아깝게 져서 소감 한마디."
"음... 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과분한 거니 별로 아쉽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내년엔 예선전 말고 본선에서 시작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
동국의 말에 재은이 씩 웃으며 팔꿈치로 동국을 툭툭 쳤다.
"오~? 그러면 1부 리그 승격은 기정 사실이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노려볼만 한데, 여기서 선수들을 더 모집해야지. 그러면 아마 여유롭지 않을까? 물론 실제 기사에선 이렇게 안 적을꺼지?"
동국의 말에 재은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길게 늘여뜨렸다.
"그으을~ 세에~? 그냥 동국 감독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게 나을까아~?"
"아이~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재은의 행동에 동국이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고선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재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알았어~ 그리고... 경기 중에 신지은이가 세레머니 한 건 뭐야..? 어떻게 된거야?"
재은이 조심스럽게 묻자, 동국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니, 일단 홈런을 쳤죠? 그리고 배트를 시원하게 던지고, 타구 감상을 여유롭게 한 다음, 느긋하게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2루 베이스 밟고는 우리 더그아웃을 향해 윙크, 그리고 홈플레이트 밟으면서 다시 우리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총 발사. 빵야~"
동국의 설명에 재은이 기가 찬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몇 초간 그렇게 헤 벌리고 있다가 겨우 표정을 가다듬은 재은이 약간 높아진 말투로 동국에게 반문했다.
"진짜..? 진짜 그랬다고? 그럼 완전 미친년 아냐?"
"아, 그래서 우리도 보면서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는데... 다들 흥분해가지고 보복구를 던져야 한다, 누구에게 던지냐,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다음 타자가 보복구가 두려웠는지 바로 번트 대고선 도망가더라고..."
"아, 아~ 그래서 다음 타자가 번트 대고선 황급히 뛰어갔구나~ 난 또 화장실 가고 싶어서 저러나 싶었지..."
동국의 말에 그제야 이해가 갔는지 재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은 말고도 다른 관중들도 지은이 더그아웃을 향해 도발한건 잘 못 봤을테니, 다음 타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그게 보복구가 두려워서 그랬다니...
"나중에 이닝이 종료되고 코치가 찾아 와가지고 사과를 하더라고. 선수가 흥분해서 그랬다, 미안하다, 사과의 의미로 4회부터 지은 대신 AI 선수를 쓰겠다, 뭐, 그러더리고... 그래서 뭐, 보복구도 던지지 못했지..."
"으음... 그래서 홈런 치고 나서 신지은이 교체가 됬구나... 오케이, 알았어. 아, 참. 얘들 좀 불러줄래? 할 이야기가 있어서."
"뭔데?"
"아, 혹시 우리 엄마랑 만나줄 수 있냐고... 우리 엄마가 하도 걱정을 해서 한번 만나보면 걱정이 덜 할꺼 아니야. 그래서."
재은의 말에 동국은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선 얘들을 불렀다.
재은의 설명이 있고 나서 지아가 슬쩍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재은에게 말했다.
"언니이~ 그럼 내가 거기서 깽판 치면 언니, 오빠랑 못 사귀는거야아~?"
지아의 말에 재은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 그러지 않을까..?"
"야, 넌 그러고 싶냐?"
동국이 뭐라 한마디 하자 지아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이~ 뭐, 우리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있을까아~? 재은 언니가 좋은 사람인건 알지마안~"
지아의 행동에 앤서니도 슬쩍 팔짱을 끼며 합류했다.
"그런가아~? 그럼 나도~ 나도 가서 깽판칠래~"
둘의 모습에 재은이 한 숨을 내 쉬고서 둘을 달랠 카드를 꺼냈다.
"에휴... 그럼 니들 말해봐, 뭘 해주면 날 도와줄래?"
재은의 말에 그제야 씩 웃으며 팔짱을 푼 두 사람.
"음~ 언니가 한달 동안 나보고 언니라고 부르는건 어때?"
지아의 말에 재은은 기가 찬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진짜로..?"
"히힛, 진짜로~"
재은이 곤란해 하자 앤서니 역시 지아와 같은 걸 요구했다.
결국 고민 끝에 재은은 둘의 요구를 수용했다.
"휴... 그래, 그럼 내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언니라고 부를게..."
"아싸~! 그, 그럼 한 번 불러봐~ 재은 동생~"
"맞아 맞아~ 불러봐~"
둘의 재촉에 주위 사람들 역시 흥미롭게 그 상황을 지켜봤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재은이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작게 말했다.
"어, 언니들..."
"뭐어라고오~? 자알 안 드을리느은데에~?"
"지, 지아 언니! 앤 언니!"
결국 눈을 꾹 감고선 큰 소리로 외치는 재은의 모습에 다들 크게 웃었다.
"꺄하하~ 언니 귀엽다~"
"재은 동생이 나보고 언니라고 불렀어~"
신나서 떠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재은이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