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세나의 죗값
세나의 목소리가들려왔지만, 강한은 거리의 행복한 사람들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심장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달까.
시스템으로 욕망과 욕정으로 비어버린 공간을 메워도 어딘가에 구멍이난 듯, 다시 공허해질 것만 같았다.
강한은 순간 우울해졌다.
물론 한 여성을 마인드컨트롤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행복한 가족을 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껍데기뿐일 것이다.
시스템이 전능하다하지만 자신의 정신력이 약해지면 암시는 풀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거나 피치 못할 병력으로 정신력이 약해진다면? 개막장 가족치정극이 펼쳐질 게 뻔했다.
전능한 시스템으로 성적 판타지는 채웠지만, 마음의 빈자리는 채우지 못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을 쳐다보았다. 세나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마인드컨트롤로 그녀의 기억을 다시금 셋팅해두었다. 자신이 변하기 이전의 기억으로.
그녀에게 자신은 이전처럼 자애롭고 따스한 주인님이었다. 세나 역시 충성과 정성을 맹세한 댕댕미 넘치는 노예로 돌아와 있었고.
그도 알고 있었다.
욕망과 쾌락에 물들어 자신이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애시당초 시스템으로 복수녀 외의 여성들을 능욕하고 유린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타락의 시발점이었다. 복수의 당위성은 사라지고 성욕에 미쳐버린 짐승이 날뛴 것이니까. 마컨의 시간동안은 기억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세나의 변화도 자신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쾌락에 눈이 멀어 수아를 폭력강간하지 않았다면 세나는 이전처럼 싱글벙글한 얼굴과 톡톡 튀는 귀여움으로 자신을 맞이했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한 [주인님 변했다]는 것은사실이었기에 강한은 그녀와 오늘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비록 기회를 저버린 그녀지만 강한은 그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나?"
불안한 눈으로 차창 밖을 두리번대는 세나를 쳐다보며 부르자 그녀가 강한을 쳐다보았다.
"주, 주인님..무서워요."
"괜찮아. 그냥 편안히 데이트한다고 생각해."
세나가 반색하며 물었다. 머리 위에 강아지 귀 하나만 달아준다면 완벽한 멍뭉미가 나올 것 같았지만 강한은 그저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애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눈빛이지만 세나는 그때로 돌아가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헤.. 주인님이랑 데이트라니! 신난다! 아, 아니.. 신나는데 뭔가 무섭기도 하구…"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기억을 자신이 변하기 전으로 셋팅한 것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껏 잘 따라와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 그리고 그녀와의 마지막 기억은 좋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비록 배신했지만 배신의 원흉이 자신에게 있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공허한 마음이 이렇게라도 하면 달래지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도 있었다. 강한이 벨트를 풀며 말했다.
"가자. 영화 한편 볼까?"
"우아ㅡ! 광고 많이 하던 거 있던데, 그거 보는 거에요? 네? 네?"
"..보고 싶은 거 있었나봐?"
"네! 신기생충인가? 그거 재밌어보였어요!"
"그럼 그거 보자. 세나가 보고 싶은 거니까."
"아아ㅡ 신난다! 주인님과 영화를 보다니! 헤헤."
세나가 아이처럼 해맑게 좋아했다. 강한은 그 모습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세나의 모습은 이거였는데.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잔뜩 겁에 질린 세나가 걸음마다 주저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강한은 그녀를 어르고 달래주었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두 분이신가요?"
"네, 두 명입니다."
영화관 입구 직원의 확인을 받고 상영관 내부로 들어갔다. 어둑한 실내에 그제야 안정감을 느끼는지 강한의 팔뚝을 꽉 쥐고 있던 세나의 손이 느슨해졌다.
"주인님,여기에요."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는 강한을 세나가 뒤에서 불렀다. 사회와 단절된지 4달 정도 되었기에 빠르게 다시 적응해가는 그녀다. 세나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강한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세나를 배려해 사람들이 앉지않는 측면자리였다.
"바깥에선 주인님이라고 하지마."
"넷..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음… 오빠라고 해."
"히힛. 네. 오빠."
작은 일에도 연신 즐거워하는 세나와 달리 강한의 표정은 상영관에 내려앉은 어둠처럼 무거웠다. 헛헛한 마음은 역시나 달래지지 않았다. 시작부터 잘못되었기에 그런 걸까? 아니면 무거워진 마음이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이끌어내는 걸까? 그의 혼란스런 마음을 모르는 영화는 시작되었고, 두 시간 가량을 강한은 세나에게 애써 미소를 보이며 보내었다.
영화가 끝났다.
그저 멍 때리고 있던 강한과 달리 세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신나게 읊어댔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그는 다시금 겁을 먹는 세나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최고급 식당이었다.
중간중간 자신을 알아보고 쑥덕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아와의 염문설이 생각보다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공인도, 연예인도 아닌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다니 말이다. 쑥덕대는 폼이 썩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인아의 자위영상을 찍고 유포한 사람이 자신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뭐, 맞긴 하지만 오늘 저녁에 있을 성대한 기자회견 분수쇼가 끝나면 자신에 대한 논란은 종식될 터이기에 강한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오, 오빠… 사람들 너무 많지 않아요?"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세나는 마치 뭔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잔뜩 주눅이 든 채 식사를 했다.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도 한 모금 했다. 식사를 마친 강한은 세나를 이끌고 여성옷 의류매장으로 들어갔다.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돼."
"..네?"
세나가 머뭇거리자 강한은 직원을 데리고 와 그녀에게 맞는 옷을 달라고 했다. 직원이 여러 셋트의 옷을 들고와 세나의 몸에 맞춰보며 강한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고, 그는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넋이 나가있는 세나에게 건네주었다.
"뭐해? 샀으면 입어봐야지?"
직원이 사이즈는 지금 입고 있는옷하고 딱 맞을 거라 했고, 강한은 세나를 탈의실로 밀어넣었다.
잠시 후, 세나가 강한이 골라준 옷을 입고 수줍게 문을 열었다. 직원은 세나의 핏이 너무이쁘다며 물개박수를 쳐댔다. 강한 역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강한은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이쁘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원래 입던 건 버려주시구요."
"넵."
10분만에 쇼핑을 끝내고 매장을 나오자 세나가 등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에요?"
화사하게 밝던 세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자의 촉이란 역시 무서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강한은 몸을 돌려 세나를 마주 보았다. 수많은 인파 속, 그녀와 단둘이 남은 것 같았다. 예쁜 옷을 걸치니 역시나 그녀의 미모가 살아난다. 성격이 바껴서 그런지 날카로웠던 눈매가 다소 부드러워졌는데, 그 부드러움이 썩 보기가 좋았다.
세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강한을 올려다보았다. 버림 받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그녀의 표정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강한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무겁고, 어두웠다. 마치 이별 데이트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찝찝하고, 뭔가 꽉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이제 세나는 죗값을 치룰 시간이다.
주인을 배신한 노예에겐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된다. 또 언제 배신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녀는 복수의 완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죗값을 받아야한다.
물론 수아와는 다른 죗값이다.
그녀가 이제껏 자신에게 보여준 충성심과 정성은 진심이었었으니까.
묵묵한 강한에 세나의 눈동자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직감한 것이다. 이제 끝이라는걸. 세나의 어깨가 옅게 들썩였다.
"세나, 처음에 너한테 왜 이러는지 궁금해했었지?"
"아뇨..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저를…"
"넌 6년 뒤에 수아와 장 대표라는 년하고 나를 거짓미투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숴버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으로 회귀했고, 특별한 능력까지 얻었지. 그래서 널 괴롭히고 복수하기 위해서 세뇌와 조교를 시킨 거야."
세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상황이든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를 품고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완고했다.
"이해하기 힘들어도 사실이야. 이제 복수는 끝났어. 이제부턴 각자의 길을 가는 거야."
"흐윽.. 싫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세나가 고개를 숙이자 지면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강한이 그녀의 턱을 받쳐 고개를 들었다.
"세나, 내 눈을 봐."
"흐윽…"
강한은 슬프게 일렁이는 세나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핑거스냅을 튕겼다. 주저함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할 시간이다.
**
강한이 먹먹한 눈빛으로 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차 안이었고, 세나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기분이 오묘했다. 뭔가 마음은 그녀를 거두어들이라며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았고 이성은 그녀를 보내줘라며 응석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이성의 편을 들기로 했다.
시스템으로 여성들을 겁탈하고 다니던 과거는 청산하고 조금 더 건실하고 미래적인 일에 시스템을 활용할 생각이다. 그렇기에 세나는 죗값을 받고 보내주는게 맞으며 장 대표 역시 죗값을 치루게끔 만드는게 맞았다.
물론 과거의 그들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의 그들은 뷔페미즘이란 썩어빠진 사상에 찌들었지만 아직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애꿎은 화풀이다.
전생에서 하지 못한 화풀이를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못난 일이지 않은가?
전생에선 등신 같이 당하기만 해놓고는 과거로 왔다고 화풀이를 해대는 꼴이라니 말이다. 치졸한 짓이었다. 그녀들에게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었다면 전생에서 하는 것이 옳았으며 현생에서 하고 싶다면 먼저 그녀들이 전생처럼 자신의 인생을 공격하게끔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그래야 복수란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니까.
물론 이제와서 장 대표에게 복수를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잠재적 범죄자다. 수아와 세나의 정신을 뷔페미즘에서 구제했듯, 그녀도 썩어빠진 정신을 개조시켜 잠재적 범죄성을 없애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건실한 남자를 공격해버릴 것이고 그녀는 억울한 희생양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기에 복수는 끝을 맺어야했다. 희생양은 자신 하나면 충분했다.
"후.."
잠시 멍하니 서있던 세나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인파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강한은 그녀의 모습을 아련히 쳐다보다 눈을 감고 운전석에 기댔다.
그러다 불현듯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너무 감정이입을 한 것같아 민망함에 나오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풋.. 꼴에 작가랍시고 감수성은 풍부하네."
세나를 보내는 것이 마치 슬픈 로맨스물의 남주인공처럼 슬프고 애절해 너무 과몰입했던 것은 아닌지 싶은 것이다. 그녀에 대한 복수를 끝낸 것이다. 그냥 그렇게 끝난 것이다. 그녀를 사랑한 것도 아니었는데 지나친 감상은 또 이성을 마비시키려할 것이다.
세나가 인파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손에 쥐어준 돈으로 그녀는 택시를 잡아 집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치열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물론강한은 세나를 곱게 보내주진 않았다. 죗값은 받고 보내주어야지 않겠는가. 하여 몇 가지 암시를 걸어두었는데.
1. 평생 성관계를 금지한다.
2. 평생 홀로 살아간다.
3. 연애 금지.
4. 페미니즘 여성을 보면 공격한다.
5.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6. 평생 성욕이 들끓는다.
총 여섯가지의 소소한 암시들로 그녀의 죗값을 책정한 그였다. 최애 육노예였던만큼, 그녀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정을 나누길 바라지 않았다. 하물며 연애 감정까지 원천 차단했다. 그녀는 평생 자위만으로 해갈되지 않는욕구를 억지로 누그리며 힘겹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유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페미니즘 여성을 공격하는 여전사가 되어 자신을 대신해 썩어빠진 여성들을 타도할 것이다.
그녀의 죗값은 이정도였다. 평생 정신병원에서 썩을지도 모를 수아에 비해선 가벼운 죗값이지만 세나에겐 이정도면 충분했다.
처음과 끝을 같이한 그녀였기에, 비록 배신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지만 그간 자신에게 선사해준 행복감과 쾌감으로 나머지 죗값은 치룬 셈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만큼 그에겐 세나와 보냈던 안전감옥에서의 시간이 만족스러웠었다.
"그래.. 이정도면 됐어."
강한이 눈을 떴다.
이제, 마지막 보스년인 장 대표만이 남았다. 그녀는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었다. 고로, 그녀들과는 다른 가혹한 형벌로 죗값을 거두리라. 복수가 끝이 나면, 새 다짐과 마음으로 새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흐트러졌던 복수심을 되새김질하고 있자, 전화가 걸려왔다. 타이밍상, 분명히 그년일 것이다. 예상대로 모르는 번호였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량 스피커로 조심스런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여보세요?
"네, 누구시죠?"
- 아.. 방송보고 연락드렸어요. 찾는 분이 저랑 되게 똑같이 생겨서…
강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덫에 걸려들었다.
대바늘에 꿰어둔 탐스런 미끼를 대어가 드디어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