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4화 〉세나의 죗값 (124/129)



〈 124화 〉세나의 죗값

우선 길을 따라  내려가보았다.  겹으로 이루어진 철조망 중 첫번째 철조망은 절단기로 끊지 못했었기에 탈출하려면 열쇠로 문을 열거나 억지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열쇠는 미리 빼두었기에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수아가 탈출하며 걸어둔 가시철길의 옷더미가 그대로 있었다.

수아보다 세나가 운동신경과 근력이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아가 넘어갔다면 세나 또한 넘어갈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넘어간 뒤, 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면 절단기로 끊어 구멍이 난 철조망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시철길 위의 옷더미는 수아가 걸어둔 모양새 그대로였고, 인근에 새로운 옷더미도 보이지 않았다.

철조망을 넘어가진 못한 듯싶었다.

"흠.."

넓은 산을 모두 뒤지려니 막막하긴 했다. 수아와는 경우가 달랐다. 수아는 앞뒤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에 무작정 길을 따라 달려 추적하는 것이 간편했지만 세나에겐 시간이 있었기에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자동차 스마트키처럼 생긴 작은 기계를 하나 꺼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그녀의 신발 창에다 칩을 붙여놓았었다. 원래는 미아방지용 칩인데, 그녀가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 붙여놓은 것이었다.


칩이  수신기와 10미터 이상 멀어지면 소리가 울리는데, 한번 멀어진 상태에서 10미터 이상 50미터 이내에 있으면 칩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경보음이 커진다.


"붙여두길 잘했네. 혹시나했는데."


수신기는 아직 묵묵부답이었다. 현관에 그녀의 신발이 없어져 있었으니 분명히 신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50미터 이내에만 근접하면 된다. 산 자체가 앞서 얘기했듯, 둘레는 좁고 뾰족하게 높은 산이라 길이 닦이지 않은 비탈길을 오르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사도가 평균적으로 50도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문에 공사 시공자들이 철조망 공사를 꺼려해 웃돈까지 얹어주었어야했었었다.


그때, 신호기에서 울림이 들려왔다.

-삑.

강한은 분명 멈춰 서있었다. 그것은 곧, 세나가 스스로 움직여 50미터 범주 내로 들어왔다는 것. 강한이 씨익, 미소지었다. 역시 철조망을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아의 경우에도 세나가 어깨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철조망을 넘어가지 못했을 터다.

-삐빅.


소리 간격이 짧아졌다.
세나가 더욱 근접했다는 소리.

강한은 소리를 죽이며 눈만 굴렸다. 신호기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다시 도망가버릴 것이다. 손으로 꽉 쥔 채, 주머니에 손을 넣자 소리는 강한의 귀에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삐비빅.


소리 간격이 다시금 짧아졌다.
세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삐비비빅.


마치 후방주차경고처럼 경고음의 간격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지?"


강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에 검은색 인영이 포착되었다. 구름에 가린 달에 산은 온통 새까맣다. 하지만 인영이 세나라는 것은 당연한 일. 강한과 마주치자 인영이 걸음을 멈춰버렸다.

"..세나?"

강한의 부름에 인영의 손에 들린 뭔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세히 보자 흙길 위로 떨어진 것은 제법  짱돌이었다. 모서리도 뾰족했다.


"…"

강한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일전엔 자신을 멈춘답시고 전기충격기로 찌지더니, 이번엔 짱돌? 아마 경보음이 없었다면 저 짱돌에 뒤통수가 찍혔을게 분명했다.


여자가 변하면 무섭다더니.
댕댕미 넘치던 세나는 어디 가고 짱돌 여전사 세나가 나타났다.

물론 표피강화로 짱돌에 맞아도 충격은 있겠지만 죽거나 기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기충격기처럼 내부를 타격하는게 아니니까. 오로지 외부공격이라면 크게 두려울 것은 없었지만 짱돌을 들고 있었던 세나의 모습은 무섭긴 했다.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아는 신체개조전의 뚱뚱한 모습 탓에 의기소침하고 겁이 많았었다.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 수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저 도망가려했었다.


하지만 세나는 자신을 기다리며 습격까지 하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데려왔을 때 보였던 공격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강한이 입을 먼저 열었다.

"..그걸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주인님은 변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강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이 변하면 노예도 그 모습에 맞춰서 변해야 살아남는 법이야. 주인이 변했다고해서 노예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노예는  이상 값어치가 없어지지 않겠어?"

"변했어.. 옛날 주인님으로 돌아와요.."

세나의 음성이 옅게 떨렸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예전의 주인이 그리웠다. 따스하게 쓰다듬어주던 손길과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렸었다. 주인님을 기다리며 요리를 하고 편안히 드라마를 보며 틈틈히 욕구도 푸는, 그런 안락한 삶을 다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님이 변해버린 이상,  삶은 더 이상 안락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 없단 걸 너도 알잖아. 그러니 도망친 거 아냐?기회를 줬건만,  스스로가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버린 거야."

"네.. 네?"

세나가 눈을 끔뻑였다.

"내가 내측 도어락을 깜빡하고 설치를 안 했겠어?  중요한걸?"

구름이 걷히고 서슬퍼런 달빛이 세나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얇게 찢어진 그녀의 눈꺼풀 속, 커다란 동공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서, 설마… 일부러 그런 거에요?"

"너한테 준 마지막 기회였어. 하지만  기회를 날려버렸지. 이제 넌 더 이상 노예도 아니야."

세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 고비만  참았으면 지금쯤 주인님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막심한 후회가 들었다. 그녀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추락하듯 꿇린 무릎이 흙바닥에 부딪혔다. 보는 사람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파보였지만, 세나는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죄,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정신이 완전히 개조된지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군. 방금만해도 짱돌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려 했잖아. 이제와서 용서해달라고?"


"두.. 두려웠어요! 주인님이 두려웠다구요!"


세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강한의 표정은 그저 굳어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건 앞전에 써먹은 변명이잖아? 참신한 변명은 없어?"

강한이 심드렁한 시선으로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12시가 되기 1분 전이다. 세나와의 대화도 이제 1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이 슬펐지만 이제 무를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

"1분 밖에 안 남았네. 최후의 변명거리 하나라도 생각해봐. 그럼 용서해줄지도 모르잖아?"


"..제,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세나가 수아처럼 손바닥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빌기 시작했다.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올려다본, 그리고 달빛에 비친 주인의 얼굴은 가축을 도살장으로 보내는 얼굴과 다름없었다. 차가웠다.

"변명거리도 없나보네. 그럼 내가 대신 대화를 끝맺지. 그동안 즐거웠어. 마무리가 비극으로 끝나는게 상당히 아쉽긴하지만 틀어진 인간관계만큼 다시 맞추기 어려운 게 없어. 그럼.."

강한이 핑거스냅을 준비했다. 세나는 겁에 질린 눈동자로 그의 의문스런 행동을 쳐다보았다. 말은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에겐 자신을 죽일만한 무기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수아처럼 두들겨 맞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기 시작했다.

"흐으읏..! 제, 제발.. 흐윽.. 제발요.. 흐윽…!"


강한은 핑거스냅 자세로 잠시 멈춘뒤,그런 세나를쳐다보았다. 그녀를 죽이거나 수아처럼 정신병원에 가두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록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버리지만  과정에서 느낀 그녀에 대한 감정과 기억은 온전히 가져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정성을 다해 자신을 대접해주었던 그녀는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성스러운 시간도.

남녀가 헤어지는 것에서 가장 무서운게 떡정이라고 하던데. 이제껏 육노예들  속궁합이 맞지 않았던 육노예는 없었지만 세나는 많은 육노예들 중에 속궁합도 좋았고, 무엇보다 자신과 가장 많은 관계를 나누었었다.


그만큼 떡정도 깊어졌다는 것.


그렇기에 세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수아와는 전혀 달랐다. 비록 뒤통수를 갈기려했지만, 그녀에게 향하는 눈빛은 경멸,환멸 따위가 아닌 측은과 연민이었다.

싸늘하게 바라보던 수아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세나를 이제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욕망에 짓눌려 망각해버렸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선 그녀도 죗값을 치뤄야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죗값이면 그만이리라. 결심한듯 강한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핑거스냅을 시전했다.


-딱!

어울리지 않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밤하늘 아래의 산기슭에 울려퍼졌다.



**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

"여긴가…?"


강한이 네비게이션 안내 음성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잡한 거리는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하호호 웃으며 행복해 보이는 커플들과 따스히 손을 잡고 오손도손 걸어가는 중년부부들이 시선을 끌었다.

모두 행복해보였다.


조잘대는 어린이를 목마에 태워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강한이 빤히 쳐다보았다. [가족] 그 짧은 단어가 주는 뭉클함과 감동은 강한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시스템 능력 없이도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꺄르르 웃거나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리 행복할까?
강한은 운전대를 두손으로 잡고  위에 턱을 괸 채 거리의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욕망실현의 시스템.
그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지고도 남이 가진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이러니했다. 정작 행복해야하는 건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자신인데, 그들은 이런 전능한 시스템 없이도 행복해보였으니까.

처음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는 날뛰고 싶을 정도로 짜릿하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자신은 뭔가 불행해보였다. 시스템으로 충족시킬  없는 감정의 공허함이랄까. 여성들을 마음껏 능욕하고 유린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공허했다.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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