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강한의 각성
"야. 너, 커피 좀 사와라.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로."
"에? 생년 그런 거 안 드시잖아요. 자판기만 드시면서."
"새끼, 말이 많아. 고급진 게 마시고 싶다. 바람 쐬고 온다 생각해. 따분하잖냐."
박 형사가 신참에게 카드를 쥐어주며 기어이 쫓아냈다. 동료 당직자도 잠시 야참을 먹으러 자리를 비웠고, 서에는 박 형사 밖에 남지 않았다. 야참시간은 1시간. 그리고 근처에 카페가 없기에 테이크아웃도 제법 시간이 걸릴 터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금 오시면 됩니다."
잠시 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한이 서로 들어왔다. 박 형사는 마치 접대라도 하듯 공손히 인사하며 버선발로 다가왔다. 강한은 그의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5만원권이 100장 들어간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하하.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강한은 옅게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없어도, 이 세상엔 조종하기 쉬운 부류도 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박 형사의 안내를 받아 서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기대했던 떡고물보다 상한치를 치는 봉투에 표정이 날아갈듯 가벼워보였다.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될 듯합니다. 이것도 원래 신고자가 거부하면 안 되는 건데.. 작가님의 넓은 아량 덕분입니다. 하하."
30분도 필요없었다.
수아와의 재만남은 5분이면 끝이날 것이다.
"네, 뭐."
"그런데 이렇게라도 만나시려는 이유가…?"
강한이 심기가 불편한듯 입을 다물자 박 형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들떠서 방정맞게 놀린 입을 한차례 팍 친다.
"근데 확실히 미친 여자 같습니다. 신원이야 해외에서 밀입국했을 거라 추정하고 있고요. 지가 정수아라고 우기긴 하는데, 믿을 근거가 없으니까요."
드디어 방 앞에 도착했다. 유치장이나 조사실이 아닌 휴식방이라고 했다. 불법 밀입국에 초점을 두고 신원확인을 하느라 어차피 서에 잡아놔야하는데, 신고자라는 위치상 유치장에 놓긴 그랬다고 한다.
"자, 그럼. 유익한 시간 되십쇼."
문을 연 박 형사가 나이트클럽 웨이터마냥 인사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 돈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달은 강한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못 오게 해주세요. 형사님도."
"네엡ㅡ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고개를 푹 조아린 채, 뒷걸음질로 멀어져가는 박 형사를 보며 강한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하여간, 돈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종자들은 치가 떨리면서도 또 우스웠다. 저런 놈들이 있기에 자신과 같은 종자가 돈으로 사람을 굴릴 수가 있으니 말이다.
고요해진 복도.
강한은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틈 사이로 얇게 드러난 백옥의 얼굴이 점점 넓어졌고, 그 얼굴은 놀람에서 경악으로, 그리고 공포로 변화되어갔다.
"꺄아아아악ㅡ!"
수아가 비명을 질렀다. 강한이 급히 문을 닫았다. 비명이 세어나가긴 했을 테지만 형사도 크게 신경쓰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신고한 사람이니 비명을 지르는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나 반가운 거야?"
강한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아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듯, 기겁을 하며 구석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이 좁은 공간은 그에게서 도망칠 곳을 선사해주지 않았다.
"흐으으! 뭐, 뭐야! 꺼져! 저리 꺼지라고!!"
수아가 근처에 보이는 잡다한 물건들을 집어 던졌는데 모두 강한의 근처에 명중할 뿐, 그의 몸에 맞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정신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암시의 효과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줘ㅡ!!"
수아가 문을 향해 목 놓아 소리쳤지만 구원의 손길은 묵묵부답이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파리새끼마냥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을 빌어댔다.
"제발! 제발요! 부탁이에요! 저를 좀 놓아주세요! 제발요! 흐흑.. 제발!"
울며불며 애걸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한은 희열을 느꼈다. 그래, 육노예라면 응당 이런 자세를 취해야 옳지. 강한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멱살을 잡아 올렸다.
"큭큭, 누가 구해주길 바라는 거야? 넌 내가 창조했고, 그러니 넌 오로지 내 소유야. 알겠어?"
"크흡…! 무슨 소리세요…!"
"여기 경찰서에서 니 본모습을 보았을텐데? 멧퇘지새끼마냥 꿀꿀대는 니 얼굴을 말이야. 그게 원래 니 모습 맞아. 내가 널 개조한 거니까."
수아의 동공이 확장됐다. 형사가 몇번이나 얼굴 앞에 들이밀어보인 사진이뇌리 속에 떠올랐다. 정수아는 이 여자인데, 자신은 대체 누구냐는 그 답답하고 어이없던 질문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산기슭에서 강간당하며 입술이 붙어버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믿기 힘들지만,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문조차 사진 속 정수아랑 똑같다고 했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그것이 모두 그가 만들어낸 상황이란 생각에 현실감각이 무너져갔다.
몰래카메라가 아니냐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하하하! 보기 좋은 얼굴이네. 이제 이해가 되는 거야? 난 니 년 따위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그러니 날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이렇게 예쁜 얼굴과 몸매를 줬으면 감사합니다하고 절을 해도 모지랄 판에 감히 도망을 쳐?"
-찰싹!
오른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직격했다. 힘을 제대로 실지 않았었기에 그녀의 뺨이 옅게 붉어졌다. 수아는 정말로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풋. 뭐가? 이 모든게? 아니라고? 그러기엔 내가 직접 보여준 것을 봤는데, 안 믿을 수 있겠어? 다시 입술 붙여줘?"
"시, 싫어! 제발.. 제발 나 좀 놔줘요.. 부탁이에요.. 흐윽.. 흐으윽…!"
수아가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강한의 얼굴엔 그 어떤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며 그가 뇌까렸다.
"조교한답시고 설친 내가 잘못이지. 여자를 능욕하고 겁탈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고 싶었던 거야."
거듭된 육노예들의 배신에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껏 했던 짓은 복수가 아니었다고. 욕망실현을 위한 동기이자 그저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조교가 복수라며 애써 합리화시키곤 여자들을 길들이고 가학적으로 능욕하는 것에 눈이 멀어 멍청하게 즐긴 것이다.
"그래, 조교는 복수가 아니야. 이게 바로 복수지."
뜻 모를 그의 중얼거림에 수아의 얼룩진 눈동자가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강한이 수아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바닥에 추락한 수아가 콜록대며 숨을 고른다.
강한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형사들의 이목을 끌었기에 그녀를 다시 안전감옥에다 감금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수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경찰서의 모든 이들을 시스템으로 기억조작을 하면 될 테지만, 이미 수아의 신원확인을 위해 검찰 아니면 여타 수사기관에 그녀의 존재가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강한은 더 이상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욕망에 휘둘리다 이미 많은 위험을 겪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한번의 실수로 시스템을 가진 현생이 끝날 수도 있었다.
"자, 널 어떻게 해줄까.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댔나?"
"네, 네! 제발요!"
수아가 헛된 희망을 품으며 대답했다. 강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조롱이 담긴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래, 그럼. 나에게서 벗어나게 해줄게. 아, 그리고 그전에 이젠 대답해줄 수 있겠네."
"네.. 어떤…?"
"대체 너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지?"
"네.."
"대답해주지. 이제 듣지도 못할 텐데. 그건, 지금부터 6년 뒤에 너가 세나, 그리고 장 대표라는 씹년과 나를 각종 성범죄를 저질렀다며 고소를 해. 난 속절없이 당하기만하다 결국 자살했고. 그뒤에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했어. 그래서 니 년들을 하나둘씩 찾아 복수를 하고 있는 거고. 어때, 대답이 충분히 됐어?"
수아가 어안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이 거짓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껏 자신이 당해온 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이 지금 미쳐버려 모든 것이 망상이고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찰싹!찰싹!
제 뺨을 두차례 때린 수아는 깨달았다. 이곳은 현실이라고.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몸이 떨려왔다.
"큭큭. 믿을 수 있겠어?"
"이, 이건.. 지독한 악몽이야…"
악몽이 아님을 알지만, 수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싶었다. 잠에서 깨면 사라질, 그런 악몽.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저리도 잔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간은 실재하고 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악몽.. 이건 악몽이야… 잠든 거야.. 잠들면 모든게 끝날 거야…"
수아가 정신병자처럼 혼자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의 등장에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다.
"자, 이제 내 눈을 봐."
강한의 말에 수아는 홀린듯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딱. 그녀의 눈빛이 탁해졌다. 시선을 맞추느라 숙인 상체를 세운 강한이 말했다.
"자, 이제 너는 나를 고소하겠다는 생각을 접게 돼. 그저, 내 돈이 탐나 꾸민 거짓말이라고 형사한테 얘기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넌, 지금부터 12시간 후에..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거야. 알겠어?"
"고소.. 안 한다… 돈.. 거짓말.. 12시간 후.. 기억.. 잃어…"
강한은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도 나락까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자신의 이전 모습이 모조리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살인은 정말, 모든 선택지가 없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할 생각이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자고."
그녀에게 걸린 마컨을 풀어준 그는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12시간 후면 모조리 사라질 것이고, 곁에서 지켜본 형사는 그녀를 정신질환자로 확정짓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것이다.그럼, 그녀의 신원은 오리무중 상태로 정신질환자란 타이틀에 가려 서서히 희미해져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