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막장의 그녀
인아였다.
음, 하기사 그녀를 못 본 지도 조금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짐이 석연찮기도 했지. 그녀의 마음을 밀친 듯한 구릿한 상황에 우린 살가운 말 한 마디없이 헤어졌었으니까. 난 그녀가 제대로 토라졌을 거라 생각해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녀의 비련에 찬 반응은 확실히 삐졌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란 옛말이 적중한듯, 그녀의 토라짐이 누그러든 모양이다.
'음..'
문자메세지창을 열었다.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내용을 읽은 난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 밤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짧지만 함축된 의미는 나를 흡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수아와의 대면을 주선하는 문자였다. 빠른 일처리에 간만에 미소가 피었다.
"보자.. 그럼 시간이 비겠네."
밤까지 시간은 충분히 여유로웠다. 물론 앉아서 멍하니 보낼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맑아진 정신에조금 더 휴식을 취하는게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오히려 조바심이 들었다. 왠지 이 정신이 또 언제 흐트러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당장 인터뷰 방송을 잡아달라고 했다.
머뭇하던 그녀는 암시 덕에 오후 방송으로 잡아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비록 복수의 의미가 퇴색되긴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복수를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도 보스 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느긋하게 여자들을 다스리며 지내다 전생에서 그 년이 나타난 시기 쯤에 자서전으로 뷔페미즘을 거세게 타도해 스스로 두각을 보이게끔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은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마무리지을 생각이다.
"씻어볼까."
샤워실에 들어가 깨끗이 씻고나오자 간만에 상쾌함이란 것이 느껴졌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었다. 외출준비에 점심을 준비하던 세나가 국자를 다소곳이 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절부절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이전 같았으면 어디 가냐는 둥, 점심 다 됐다는 둥의 말을 내게 건넸겠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듯했다. 뭐, 그녀 덕에 간만에 꿀잠을 잔 것 같아 딱히 뭐라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따뜻하게 대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를 한번 쳐다본 후, 별 말 없이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 시동을 키자 전화가 걸려왔다. 레이나였다.
- 오후 4시에 잡혔어요.
"그럼 시간 맞춰 갈게요. 피디 연락처 좀 보내주세요."
- 네.
인아를 만났다가 방송국으로 향하면 딱 적당한 시간일 듯싶었다. 레이나와의 연락을 끊고인아에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시간과 장소만 적힌 간단한 문자였다.
**
시 외곽으로 30분여를 차를 몰았다. 인아와의 염문설이 이슈가 되면서 펜트하우스에 파파라치 놈들이 기생하고 있어부득이하게 외곽에서 그녀를 만나야했다.
이름 모를 산의 중턱 쯤을 차로 올라가자 작은 카페가 보였다. 당연히 룸식 카페 였고, 모자와 마스크로 신분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한번 더 용모를 점검하자 마치 톱스타들끼리 밀애를 나누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참, 인생 피곤하네."
전생의 부와 명예를 회복시킨 것까진 좋았으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데다 인아와의 염문설 탓에 바깥생활이 조금 조심스러웠다. 특히나 그녀를 만날 때면 더욱.
혼자 움직이거나 할 때는 날 알아보는 이가 그리 많진 않았다. 아무래도 연예인은 아니니, 이슈성도 금방 식어버리는 편이었고. 게다가 첫 작품이 끝난 후론 작품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이슈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돈이야 이미 차고 넘쳤고, 그간 틈틈히 기억난 상장회사들 주식도 사놓아 차익만해도 수십억이었다. 그렇기에 이젠 조금 은밀하게 존재를 감출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인아와 계속 엮인다면 힘들긴 하겠지만.
가명으로 예약해두었던 곳으로 들어서자 인아가 앉아있었다.
"어.. 왔어?"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나 역시 딱히 자연스럽다곤 하지 못할 제스처로 인사를 받아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 역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내가 앉자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모자를 벗어 머리를 풀었다. 풍성한머리칼이 모자 덕에 굴곡져 그 아름다움이 한층 배가 된다.
역시,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제 예전과 같은 당당함도 묻어나왔고.
"소식은 들었습니다. 당대표가 되셨다고."
나의 사무적인 어조에 인아가 서운한 눈치로 답했다.
"아, 응.. 아무래도 당 이미지 쇄신이 필요하니까."
"아버지 일도 들었어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던데."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단게이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에 결국 진짜 미쳐버려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죗값이 두려워 도피성으로 입원한지 알았는데 직접 확인해보니, 진짜 미쳐있었었다.
[ 흐에에, 난 게이야. 게이, 흐흐. 고추! 고추가 필요해 ]
..라는 식의 말을 내뱉으며 침을 흘리는 꼴은 확실히 코스프레 같지는 않았었다. 뭐, 죄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죄를 저질렀으면 죗값을 받는게 진리니까.
"아.. 들었어?"
인아가 의외라는듯 물었다.
"아는 분 중에 기자님이 있어서요."
"그렇구나.. 난 괜찮아. 이제 아버지도 아니니까."
그녀가 트레이드마크인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굳었던 마음도 풀어버릴 그 미소에 난 커피를 마시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나.. 임기 끝나면 서울 쪽으로 출마할 것 같아. 당에서도 이제 수도권으로 나를 들이려고해. 임기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잘됐네요."
인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 혹시… 같이 가지 않을래?"
"저를요? 왜요?"
노림수였지만 난 연기공작을 펼쳤다. 수도권으로 출마해 입지를 탄탄히 굳힌다면 차기 대통령 후보로써 발판을 마련하기 충분할 것이다.
"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든든하기도 하고.. 너랑 있으면 뭔가 마음도 편하고…"
"생각해볼게요. 저도 본업이 있으니."
"으, 응. 절대 부담가지지마. 그냥 물어본 거니까."
나의 고려에 그녀는 손사래까지 쳐가며 말했다. 착해빠져서는. 그런 그녀의 성격이 좋긴 하지만.
"그리구.. 오해하지말고 들어. 얼마 전에 우연찮게 너가 산을 샀다는걸 들었어."
"..네?"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었다. 그 산은 나의 비밀스런 공간이었으니까. 매입할 때도 차명계좌를 이용했었다. 세나의 명의로 한 것인데, 그렇기에 내가 그 산의 실제 주인이란 것은 깊이 조사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고로, 그녀는 지금 나를 뒷조사했다는 것이다. 물론 수아때문에 형사놈들에게 들키긴 했었지만 그들이 일러바쳤을 리는 없다.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느꼈는지, 인아가 다시금 손사래를 치며 당황해했다.
"아, 정말이야. 정말. 우연하게…"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요. 시장님은."
"으, 으응?"
"거짓말 못하는 거요."
"..미안해."
직설적인 나의 말에 인아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어차피 암시가 있기에 그녀가 안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니, 정신력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배신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겠지만 그녀에게서 딱히 낌새가 느껴지진 않았다.
"왜 뒷조사를 한 거에요?"
"그, 그게… 아무래도 너를 완전히 믿으려면 그정돈 해야할 것 같아서."
"그럼 거기서 일어난 일도 알겠네요?"
"으, 응… 여자가 널 신고했다며? 근데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하던데.."
정치인 아니랄까봐, 정보력은 확실히 빠르다. 뭐, 개인비서에게 염탐과 조사를 시켰다면 이정도 알아내는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나저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뒷조사를 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섭게 가라앉는다.
나는 그녀를 믿고 있었건만, 이것도 일종의 배신행위가 아니던가. 근래 정신력이 약해지며 암시효과가 약해진게 화근이 된 건가? 쨌든, 세나의 공격에 인아의 뒷조사까지 얹어지자 신경이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긴, 아주 긴 한숨이 세어나왔다.
결국 그녀도 의심병말기환자집단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답지않게 순박하고 여린 모습이 좋아 믿었는데, 끝내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제껏 여우새끼가 고양이 탈을 쓰고 순한 척을 했던 건가, 큭큭. 그래도 이제라도 밝혀줘서 고맙군.
요즘 이래저래 내 뒤통수를 후리려는 것들이 많다. 뭐, 그녀는 암시 탓에 배신하진 못할 테지만 그것도 내 정신력이 온전할 때의 이야기.
결국 내 정신력이 무너져 암시가 풀린다면 그녀 역시, 세나처럼 내 뒤통수를 후드려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뒷조사가 깊어질수록 세나의 존재가 들통날 것이고 그녀의 증언은 수아의 증언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을 터.
이제 더이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컨이 없어도 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대로 무너져내릴 수는 없다.
"뒷조사라.. 결국 당신도 비열한 정치인이었군요. 그 아비에 그 자식.. 핏줄은 못 속이나봐요?"
베어버릴듯 날카롭게 변한 말에 인아의 표정이 굳었다.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거짓말도 못해, 표정관리도 못하는 참으로 우매한 정치인이 따로없다. 뒷조사했다는걸 오해하지말고 들으라니, 그런 어불성설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으, 으응…? 말이 심…"
"심하다고요? 믿고 싶어서 뒷조사를 해봤다는 말이 더 심한 것 같은데요. 하여튼, 정치판종자들은 뒷조사에 폄하에 분란조장이 특기인가보네요."
-짝짝.
비아냥대는 박수질에 인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우울해진 낯빛이지만, 마음이 굳어버린 내겐 하나의 그저그런 표정에 지나지않았다. 이쯤 해둘 생각은 없었다. 정치판 놈들은 복수가 그들의 철학이자 원동력이다. 당한 것엔 꼭 되갚아줘야하는 것이 그들의 고유 알고리즘인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력이 약해져 암시가 풀린다면 그녀는 내게 당한 수모를 갚으려할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똥 밟은 것마냥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변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배신의 씨앗은 차단해야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장이자 이슈의 주인공.
섣불리 그녀를 납치, 감금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만사해결해주는 것도 아닐 테고.
고로, 그녀의 약점을 잡아둘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것 같았다. 두 변태새끼들을 처리해주길 바라며, 미인계와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내게 기댄 것이다.
만약 진짜라면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인아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했다.
"그래서.. 나랑 함께 하지 않겠다는 거야? 내 치부를 공유한 사이인데, 날 저버리겠다고?"
"풋. 저버린 것 시장님, 당신입니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역시 수준급이시네요."
어느새 180도 달라져버린 우리의 분위기는 닿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베여버릴만큼 날카로워져있었다. 인아가 눈에 묘한 불을 켰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비열해보이기까지했다.
내가 알던 박인아가 아니었다.
"호호. 여기까진가보네, 결국은. 덕분에 신세는 많이 지긴 했어. 어떻게 한 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랑 당 대표도 처리해줘서 고마웠고. 그곳에 너가 있었던 거 다 알고 있어."
"…!"
"살살 구슬리면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호구인줄 알았는데.. 쯧, 사람 잘못 봤나보네. 이제껏 틀린 적은 없었는데. 다시 찾으려면 귀찮게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