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붕괴되어가는 세상
"씨발.."
바람에 낙엽이 걷히며 드러난 철조망 아래 구멍에 강한은 욕을 내뱉고 말았다. 누가 보아도 절단기로 끊어 도망친 것이 확실한 모양새였다. 시공사에서 했을 리는 절대 없었다. 고로, 이 구멍은 수아가 도망친 구멍이리라.
게다가 절단기는 안전감옥에조차 없는 물건이었기에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경찰들이 이곳을 들이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ㅂ
물론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단최면이란 전능한 능력이 있으니 모두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될 터. 하지만 단번에 모든 인파에게 최면을 걸기란 쉬운 일은 아니기에 더 안정적이고 확실한 묘수가 필요했다.
우선 세나가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강한은 추적을 포기하고 급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현생을 끝낼 수는 없었다.
복수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 복수는 그 의미가 퇴색된지 오래였으니까. 복수보단 여성들을 능욕하고 짓밟으며 마음껏 유린하는 시스템의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 복수는 그 이후에, 겸사겸사 진행하는 것이 되어버렸기에 지금 그를 위협하는 것은 시스템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현생에 위기가 닥치는 것은 어떻게서든 막아야한다. 뭐,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크게 위기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형사들이 방문할 테고, 그에 맞춰 사이킥으로 정수아를 미친년으로몰고 가면 된다. 어차피 신체개변한 정수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로지 그와 부모만이 알고 있는 존재, 그렇기에 수아가 백날 자신이 정수아라며 증언해봐야 형사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서류상의 정수아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테니까.
그렇기에 그에 맞춰 대응만 잘하면 될 터다. 그리고 다짜고짜 특공대가 파견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에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이정도 고비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의 정신력이 조금 걱정스럽긴하다만.
우선 강한은 세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나에게 집정리를 시켰다. 만에하나의 경우에 대비해야했다. 시스템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게 가장 차선책이다. 현재 자신의 정신력은 시스템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속박기구와 성기구들을 모조리 치우고 수아의 흔적도 깨끗이 지웠다.
세나가 청소를 하는 사이, 그는 시스템을 정리했다.
'자아유지기능은 꺼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아유지기능에 이토록 정신력 소모가 심하다면 지속할 수는 없었다. 말릴 때 진작 듣는 건데. 아니, 애초에 인간이 버티지 못할 정신력이 들어가는 기능을 왜 넣은 거야? 이해가 안 되는군.
[ 자아유지기능을 삭제합니다. 한번 번복된 기능은 다시 재생되지않습니다. ]
하아, 최선의 선택이다.
그리고, 혹시 다른 기능들 중에 정신력 소모가 심한 것들이 있나? 아니지. 자아유지기능 다음으로 정신력 소모가 심한 기능을 알려줘.
[ 육체조작과 기억조작입니다. 그중에서도 육체조작이 뒤늦게 발현된만큼 정신력 소모가 높습니다. ]
그치만 이제까지 육체조작을 하거나, 기억조작을 하면서 지금처럼 정신력이 소모되는 느낌은 없었다고.
[ 육체조작과 기억조작은 기능발현시간 외엔 정신력이 소모되지 않지만 자아유지기능은 시전대상자의 자아가 유지되는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소모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
아니, 그러면 애초에 내가 자아유지기능을 업그레이드할 때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줬으면 좋았잖아.
[ 그때 설명드렸습니다. 하지만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더 들어볼 것도 없다며 기능 업그레이드를 하셨죠. ]
..그런가.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기억력이 부족해서 그래, 이해해줘.
[ … ]
이제 자아유지기능을 껐으니, 소모된 정신력도 회복되는 거겠지?
[ 네. 하지만 시간이 제법 걸릴 듯합니다. 소모가 워낙 심하셔서요. ]
됐어.
회복만 된다면. 며칠정도 푹 자면 괜찮아지겠지. 그외에 내게 해줄 조언은 없냐는 질문에 시스템의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시스템이기에 그만큼 시전자의 정신에 많은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시전자의 정신력이 약해지면 최면효과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전자님의 상태를 보아서는 시스템 기능을 당분간 운용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계수치입니다.]
'잠시만, 만약 한계수치를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게 될 겁니다. 짐승이 되는 거죠. ]
젠장..
그럴 순 없다고. 지금 당장만해도 조금 있으면 형사들이 들이닥칠게 뻔한데, 가만 손 놓고 있다가 감옥신세나 지라고?
아니, 그리고 그렇게 정신력을 소모하는 기능은 대체 왜 넣어놓은 거야! 씨발, 날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냐?!
순간, 약해진 정신 탓인지 울화가 치밀어올라 난생처음 시스템의 그녀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말았다. 하아ㅡ 머리를 싸매며 고개를 숙였다. 신경이 쇠약해지면 감정컨트롤이 안 되어 공격성이 짙어진다더니, 진짜인가보다.
'미안해. 너가 잘못한 것도 아닐 텐데.'
[ ..아닙니다. ]
"저.. 주인님? 어디 편찮으신지..?"
청소를 끝낸 세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왠지 모르게 가증스럽게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댕댕미 넘치는 그녀의 세뇌당한 모습이 귀여웠을 테지만 이젠 아니다.
"그럼, 안 편찮겠냐?"
내 마음을 곧이곧대로 대변한듯, 퉁명스런 짜증이 그녀에게 향했다. 나의 극명히 갈린 반응에 세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 주방으로 가버렸다.
집은 깨끗해졌다.
이제, 세나만 처리하면 끝이다.
그럼 내게 흠집을 잡을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세나를 불렀다.
"네.. 주인님.."
세나가 죄인처럼 손을 앞으로 다소곳이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죄인은 맞지. 난 곧바로 그녀에게 마컨을 시전했다. 혹시 몰라 마컨 기회를 아껴놓고 싶었지만 세나를 처리하지 않으면 모든 준비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아유지기능이 꺼졌기에, 세나는 이전처럼 영혼을 잃은 인형마냥 멍하니 서있었다.
"너를 어떡할까…"
고민에 빠졌다.
아직 확실한 죗값에 대해 책정을 해보지 못했다. 중세시대라면 죗값은 목숨이겠지만 지금은 중세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형사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나를 산의 초입까지 바래다줄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그때, 머리가 갑자기 핑돌며 시야가 보랏빛으로 일렁였다가 돌아왔다.
"으윽.. 뭐야."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현실감각이 아득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 뭐지? 손을 펼치자 손끝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려다 돌아왔다.
"뭐, 뭐야!"
소스라치게 놀란 난, 소리를 질렀다. 눈을 껌뻑이고 다시 쳐다보자 손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순간, 영화 필름이 끊기듯 시공간이 잠시 멈추었다가 암전, 다시 불이 켜지는 등의 기현상이 나타났다.
공포심이 생겨났다.
듣도보도 못한 상황에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나를 압도해갔다. 그러다 이내, 다시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귀신의 등장이나 신체에 위해가 가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공포에 멈춰버렸던 호흡이 일순간 터져나왔다.
"후으ㅡ 후우ㅡ 씨, 씨발. 뭐야."
"..주, 주인님?"
"뭐, 뭐?!"
미친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정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금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세나였다. 마인드컨트롤이 풀린듯, 세나의 눈빛은 돌아와있었다. 그녀가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씨발! 뭐야ㅡ!!"
"네, 네…?"
"대체 뭐냐고!!"
세나가 듣든 말든, 난 반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쳤고, 시스템의 그녀가 답을 전해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뒤틀리고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 말씀드렸듯, 현재 정신력은 한계치입니다. 컨트롤 능력이 운용불가한 수준입니다. ]
"씨바알!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곧 형사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는데!!"
[ 시스템을 남용하신 부분은 저도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능력에는 큰 힘이 따릅니다. 시전자의 정신력에 대해선 초반에도 설명드렸던 부분이구요. 시전대상자가정신력이 강하면 반응이 다르게 나올 수 있듯, 시전자의 정신력이 약하면 시스템의 반응이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그, 그치만 자아유지기능을사용한지 얼마나 됐다고!!"
[ 그러게, 왜 제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신 겁니까. ]
그녀가 나를 타박했다.
처음이었다. 그녀의 성난 어조와 타박은 마치 선생님께 혼나는 우매한 제자 같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자아유지기능 업그레이드 당시 그녀는 내게 은근히 말리며 정신력에 대해 강조했었지만 신체개조정사에 눈이 멀어버린 난,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자아유지기능이 없으면 마인드컨트롤 소모횟수가 늘어났기에나름대로 차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신력 따위야 얼마든 자신있었다. 이제껏 정신력이 부족해 시스템 운용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원망스럽긴 했다.
조금만 더, 끈질기게 나를 말려주지.
그러면 이런 파국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뭐, 이제 와서 원망해봐야 소용없겠지. 결국 내가 냄비 속에서 천천히 끓어 죽는 개구리가 되고 말았다. 피식, 황당한 실소가 나왔다.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물이 어느정도 끓기 시작했을 때라도 도망쳐나올 수 있었겠지.
자극적인 성욕에 눈이 멀어 더 큰 자극을 찾아 해매이다 결국 들어가선 안 될, 금단의 구역에 들어와버린 것이다. 욕망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더니, 옛 선조들의 말씀엔 역시나 거짓이 없었다.
난 지금,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세나가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두려움에 질려 얼굴은 새파랬다. 마치 나를 귀신보듯 보고 있었다.
"후.. 정신 차리자. 정신."
우선 시스템이 없다는 가정하에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휴식기를 통해 정신력을 회복하면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문제점을 제거한다. 세나는 지금 세뇌가 불안정한 상태다. 형사들에게 나를 보호해줄 증언을 해줄지는 미지수.
뭐, 영장이 없는한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겠지만 판단에 따라 철조망을 뜯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만약 형사들에게 모든 것을 이실직고 한다면 난 곧바로 연행되고 말 것이다.
난, 우선 방안으로 들어가 세나가 치워두었던 성기구들 중, 수갑과 안대, 그리고 재갈까지 모두 들고 나왔다. 그리곤겁에 질려 떨고 있는 세나를 묶어 지하실에 가두었다.
그녀가 읍읍대며 눈물을 쏟아냈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일이 잘 정리되고, 시스템 운용이 가능할 정도로 정신력이 회복된다면 그때 그녀는 지하실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아ㅡ 하아ㅡ"
흐트러진 정신상태 때문일까, 계속 지끈거리는 머리에 숨이 가빠왔다.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들이켰다. 그마저도 여의치않아 소주병을 들고 거실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니지, 씨발.. 내가 무슨 짓을. 지금 소주 마시면 진짜 골로 갈지도 몰라."
순간적인 판단력이 흐려진다. 소주를 마실 생각을 하다니, 이 정신 나간 새끼.
소주병을 대충 던져버린 후, 난 우선 눈을 감았다. 형사들이 오기 전, 조금이나마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