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6화 〉수아의 탈출 (116/129)



〈 116화 〉수아의 탈출

"으음…"

머리가 깨질 정도로 지끈거려왔다.
아, 기절했었지. 순간 머리가  아픈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었다. 그래, 세나가 전기충격기로 나를 공격했고, 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었지. 내 실수다. 그녀를 믿었던 것도 실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것 또한 실수다.

아니, 애시당초 자만해 혼자만의 힘으로 수아를 타락시키고 세뇌시키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머리가 어지럽다.
놀이터에 있는 뺑뺑이에 갇혀 누군가 사정없이 돌리고 있는 것만 같다.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휴, 통증이 조금가시는  같다. 어지럽게 돌던 세상도 차츰 제 자리를 찾아갔다.


아아, 어떻게 된 것일까.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으로 봐선 아직 쓰러진 길가에 있는 듯했는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옷들이 모두 벗겨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좆됐네.'


분명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터다. 아니, 오히려 안 일어났다면 이상하겠지. 세나가 배신했고, 수아와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세뇌조교를 시키랬더니, 역으로 세뇌조교를 당해버린 걸까, 세나가 나를 공격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녀가 보여준 충성도는 모두 진심처럼 느껴졌으니까.


뭐, 수아에겐 세나와 달리 배신할 수 없다는 암시가 걸려있긴 했으나.. 시스템의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허약해진 내 정신력은 암시효과를 백퍼센트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아마도 지금쯤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세나였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자세로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죄를 비는 모습이었다.


공격의사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만이 가득한 눈동자, 세나를 처음 데려왔을 때 보았던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세나."


"..네… 주인님.."


"아직, 날 주인님이라 여기는 건가?"


세나가 머뭇거렸다.
그래, 어차피 공격당한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겠지. 나 또한 정신을 차린 후부터 세나는 더 이상 내게 육노예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유가 궁금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이유나 들어보자."

"..주인님이 아니었어요."

세나의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함축적인 의미. 내가 아니었기에 나를 공격했다..  의미를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를 멈추기 위해, 나를 공격했다?"

"..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어요…"


이상하게도 뉘우치는 세나의 모습이 밉지가 않았다. 진심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 머리가 복잡하다. 세나를 어떡하면좋을까. 이대로 안전감옥에 가둬버리는게 나을까, 아니면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다시 바깥세상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까.

그녀가 밉지 않다해서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노예신분으로 주인을 배신하는 중죄를 지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한다. 중세시대였다면 당장 참수를 당했겠지. 그정도로 잔악한 벌을 내리진 않을 터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우리의 주종관계는 끝이 났다는 것이다.


시스템으로 세뇌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수아를 잡으러 가야하지 않을까?

"기절한지는 얼마나 됐지?"

"30분 정도…"


30분이면 수아도 그렇게 멀리가진 못했을 것이다. 개년, 감히 우리 세나를 홀리고 나를 능멸하다니.  잡아야한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상당히 골치 아플 테니까.


"세나, 어서 집에 가서 옷 들고 와. 빨리."

"..수아를 잡으러 가실 건가요?"


내가 세나를 노려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넌 수아에게 홀린거야. 정상적인 사고판단이 안 되서 그런 거니 용서해줄게. 대신 어서 옷 들고 와. 그리고 신발장에 열쇠 하나 있을 거야. 그것도 들고 오고."

아직 몸이 뻐근했다.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고. 세나가 옷을 가지러간 사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물론 세나를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다. 한번 틀어진 인간관계란 바로 잡기 힘든 것이니까.


처벌의 방향에 대해선 우선 급한 불을 끈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후, 세나가 헐레벌떡 옷가지와 열쇠를 들고 왔다.옷을 모두 입고 철조망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다시 잠궜다. 이전처럼 세나가 편히 드나들도록 해두지 않을 것이다.

세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그 눈빛을 무시하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조망 위에 걸린 옷가지로 보아 이곳을 넘어간 듯했다. 최후의 방책인 산초입의 철조망은주택가와 가까워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면 충분히 들릴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이제껏 영위해온, 그리고 쌓아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횟수제한이 걸린 시스템의 능력으론 모든 생각을 덮어버리기에 부족할 테니까.

-타닥, 타닥.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갔다.
젠장, 정신력이 약해졌다해서 이런 위기가 닥쳐오다니. 아니, 정신력이 약해져서 위기가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약해진 정신력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끔 하니까.


 되겠다.
급한 불만 끄고 나면 자아유지기능을 지속할 지에 대해선 고민해보아야할 듯싶다. 단순수면부족으로 정신력이 약해진 것이고 숙면을 취하면 나아지리라 생각했지만 이미 사태는 겉잡을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급한 불을 끈다해서 능사가 아닐 것이다. 시스템에 휘둘리다 결국은 스스로 자멸해버리겠지.


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아마 철조망을 넘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가시철길을 넘어갈 옷가지가 없었을 테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선 혹시나 싶어 마컨을 시도해보았다. 10미터 범위 내에 있으면 마컨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명령없이 움직이지 못하니 찾기에 한결 수월할 것이다. 부르면 냉큼 달려올 테고.


[ 인접한 범위에 시전대상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


역시나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실감하니 조금 실망스럽긴하다. 뭐, 아직 초입 철조망까진 제법 거리가 있으니 실망하진 말자고.


초입에 다다랐다.

하지만 느껴지지않는 수아의 기척에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마, 탈출이라도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철조망으로 다가갔다. 비탈길을 오르거나 내려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뭐지, 젠장! 설마 도망쳤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가시철길도 멀쩡했고 자물쇠잠금 또한 굳세게 걸려있었다. 침입 흔적도, 탈출 흔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산기슭에숨기라도 한 건가?


난 우선 초입 건너의 동태를 확인했다. 어떤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했다. 벌레나 짐승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젠장, 나가보는 수밖에 인 건가.


내가 예상치 못한 루트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니면 철조망 공사를 하며 움푹 파인 구덩이를 메우기 귀찮아 시공사에서 그냥 공사해버렸다면 분명 몸이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났을 것이다.

급히 비탈길 쪽을 확인해보았다. 시공사에 막대한 공사비를 들인 이유가 바로  전체에, 마치 군사비밀구역처럼 그 어떤 틈도 없는철조망 공사였다. 그렇기에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비탈길에도 빼곡히 철조망이 이어져있었다.


물론 산 전체를 꼼꼼히 순회하며 구덩이의 유무에 대해 확인하진 못했다. 시공사에서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고, 둘러보기엔 너무 광범위한데다 제대로 둘러보려면 낙엽들도 싹 걷어내야했기에 엄두도 나지 않았으며 시간도 없었었다.


그렇기에 어딘가에 구덩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버렸거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초입 바깥이 너무 고요했다. 빠져 나갔다면 분명 소리를 지르고 다녔을 테고, 그렇다면 주택가가 저리도 고요할 리가 없었다.


고로, 아직 빠져나가지 않고 이곳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빠져나가서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한번 더 마컨을 시도해보았지만 역시나 10미터 범위 내에는 없었다. 우선 근방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 * *



"저,  놈이유?"


"쉿!"

철조망 너머로 비치는 손전등불빛에 노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지만 수아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을 종용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간발의 차이였다. 하마터면 놈에게 발각될  했기에 아직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수아의 눈동자는 잔뜩 날이 서있었다.


노인의 손에는 절단기가 들려있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달음박질을 해 들고온 것이었고, 절단기로 철조망 밑동을 끊어 여성 한명이 나올 수 있을만 한 구멍을 만든 것이었다. 그덕에 수아는 거기로 나올 수가 있었다.


좁은 구멍을 나오며 거대한 젖가슴이 긁혀 핏방울이맺혔지만 수아는 1도 신경쓰지 않았다. 탈출했다는 생각에 희열감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노인의 기지로 구멍은 낙엽을 쓸어모아 자연스레 덮어두었다. 수아는 당장이라도 노인을 안고 빵빠레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직 주택가까진 조금 더 가야했다.


그렇기에 놈에게 발각되었다간 다시 덜미를 잡히고 말 것이다. 다행히 놈이 철조망을 나오지 않고 주변을 배회한다.


수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신고하셨죠?"


"당연하네. 그나저나 처자가 어쩐 일로… 이런 꼴을…?"

"그건 내려가서 말씀드릴게요. 우선 내려가요."


수아와 노인은 강한의 행동을 살피며 재빠르게 초입을 내려왔다. 초입을 완전히 빠져나와 주택가에 들어선 수아는 노인이 가져다준 옷으로 급히 입었다. 펑퍼짐한 꽃무늬 바지와 우중충하고 늘어진 회색 티셔츠였다.


"허허, 할망구 거라.."

"아니에요."


수아의 수려한 육신에 비하면 거적데기보다 못한 옷에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노인이 말했지만, 수아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맨몸으로 경찰서에 가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둘은 다시금 어둠 속을 닌자처럼 은밀히 움직이며 산을 완전히 벗어났다.


경찰서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노인의 안내에 따라 경찰서로 들어간 수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제 아무리 놈이라해도 경찰서까지 손길을 뻗을 순 없을 것이다.

야심한 시각이라 텅빈 경찰서엔 순경이 꾸벅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타들어가는 제 마음도 모르고 천하태평으로 졸고 있는 순경에게 수아가 역정을 내었고, 화들짝 놀란 순경이 습관적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일어섰다.


"수, 순경! 박돌배! 무, 무슨 일이십니까!"


"납치, 감금, 성폭행 신고하려고요!!"


"네, 네에ㅡ?!"

지루하리만큼고요했던 경찰서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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