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5화 〉수아의 탈출 (115/129)



〈 115화 〉수아의 탈출

수아가 철조망의 반정도를 올라갔다. 손톱이 깨지고 발톱이 깨졌지만 그녀는 매미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으윽..! 한번만 더…!"

이제 한걸음만 더 올라서면 옷으로 덮인 가시철길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이를  물고 두 손과 한발로 철조망 틈을 꽉 부여잡은 채, 나머지 발로 윗칸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당최 발을 걸만한 곳이 없었다.


"읏! 씨발! 제바알!!"


절규에 가까운 욕을 내지르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보지만 원통하게도 발은 철조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질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부들거리는 팔로 힘겹게 지탱하며 아래를 확인하자 세나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씨발, 꺼져! 건들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세나는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마치 주술사에게 조종당하는 몽마처럼 넋을 놓은 채 터덜터덜, 수아에게로 다가갔다.

"오지마! 건들면 죽인다!!"


그녀가 소리를 질러댔지만 세나는 아무  없이 기어코 수아의 발아래에 도착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세나의 머리가 위치했다. 팔을 조금만 뻗어도 당장 수아의 다리를 잡아 끌어내릴  있었다.


수아가 께름칙한 낌새에 한 발로 세나의 머리를 차댔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않아 거의 쓰다듬는 수준의 발차기였기에 세나는 피하지 않았다.


-팍팍팍.


"꺼져! 꺼지라고! 미칠 거면 너 혼자 미쳐, 이 썅년아!"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세나의 중얼거림에 수아의 애처로운 발길질이 멈추었다.


"..밟아.."


주인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세나는 불끈 쥔 주먹을 옅게 떨며 자신의 어깨를 수아에게 내주었다. 그리곤 침음하게 깔린 목소리는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밟고.. 가세요…"


"뭐, 뭐?"


수아가 당황한듯 되물었다.


"뭐라고?"

"밟으라고요.. 어깨 밟으면 그 위에 손이 닿을 거에요.."

세나의 키가 170센치에 수아의 키도 엇비슷하니 세나의 어깨를 디딤판 삼는다면 충분히 가시철길에 손이 닿을  있었다. 하지만 수아가 선뜻 어깨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불과 몇초전만해도 욕을 해대며 머리에다 발길질을 한 것이 미안해져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차피 그녀 또한 놈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신을 능욕시켰던 사람이다. 그녀에게 당한 매질과 항문개통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었다.

물론 그것이 정신개조를 당했었기에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임은 자명했다. 그렇다고해서 그녀에게 당한 능욕은 변함없었다.

그렇기에 수아는 작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그녀의 어깨를 질끈 밟은 후, 살짝도약했다. 세나의 몸이 크게 휘청이다 이내 주저앉았고 철조망의 위끝을 잡은 수아는 아둥바둥대며 힘겹게 한쪽 다리를 옷으로 덮인 가시철길 위에다 올렸다.


"후우ㅡ 후우ㅡ"


도망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댔다. 걸어올린 다리를 고정시키고 동시에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옷덤불 위에다 올리는데에 성공했다.


순간, 섬짓한 등골에 강한이 쓰러진 곳을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아직 쓰러져있었다.

낑낑대며 옷덤불 위로 올라온 수아는 쉴 틈도 없이 재빨리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곤 올라왔을 때와는 반대로 다리부터 천천히 걸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을헛디뎌 주륵 미끄러지고 말았는데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다보니 팔을 쭉 뻗고 매달리자 1미터 아래에지면이 보였다.

"후읍."


숨을 들이킨 그녀가 결심한듯, 손을 놓았다.가볍게 하강한 그녀는 1미터 아래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흔한 낙엽 하나 없이 매끈한 도로라 착지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상체를 일으킨 수아의 시선에 세나가 들어왔다.

"..어서 가요."


세나가 수아에게 손인사를 건넸다. 왠지 지옥 같은 감옥 안에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자신을 가학적으로 능욕시킨 여성이지만 그것은 세뇌 당해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기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방금 자신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놈에게 끌려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감옥에 갇히고 말았겠지. 그렇기에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씨발.. 기다려. 내가 경찰 데리고  테니까."


"아뇨.. 그냥 조용히 가주세요. 여긴 신경쓰지 말아줘요…"

"어휴… 병신 같은 년.. 대체 얼마나 당했으면 저렇게 세뇌될  있는 거야."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었다. 철조망을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데 없는 관용이 생겨난다. 수아가 철조망에 애틋이 손바닥을 데며 말했다.

"병신아.. 치료 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꼭 버티고 있어."


그리곤 산 아래를 향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세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서글픈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아내처럼 서글픈 눈이었다.

"휴.. 이제 어떡해… 제대로 사고 쳤네.."


수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세나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댔다. 그리곤 다시 강한이 쓰러진 곳으로 걸어갔다.

"어떡하지.."

그녀는 길바닥에 널브러진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주인님이 깨어나면 호된 질책이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쫓겨나게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죽음으로 죗값을 치뤄야할 지도 모르는 일.

수아를 다룰  나타난 주인님의 광기(狂氣)는 이제껏 자신이 보았던 주인님이 아니었다. 충격과 공포,그속에서 발현된 광기는 가히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세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주인님을 섬기며 진심을 바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마음 속의 주인님이란 거울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조각난 파편은 가슴을 베고 찔렀다.

자신을 쓰다듬던 따스했던 손길이 이젠 두려워졌고 주인님과 함께할 뜨거운 시간도 이젠 겁이 났다.

광기에 물들어 웃던 주인님의 모습이 눈에서 가시질 않는다.

"어떡하면 좋아.."

그렇다고해서 주인님을 죽일 수는 없었다. 자신을 거두어준 분이 아니던가. 전쟁터 같은 바깥세상에서는 절대 가지지 못했을 윤택하고 안락했던 삶을 저버리긴 싫었다.


주인님이 없다면, 이 생활도 모두 끝나버릴 테니까. 하지만 이제 과연, 주인님이 있다해도 안락하고 윤택했던 삶이 지속될 수 있을까?

'..힘들겠지?'


세나가 털썩 자리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그리곤 쓰러진 주인을 바라보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의 눈망울이 애처로이 흔들린다.


* *



한편, 산 아래로 비포장길을 따라 쭈욱 내려가던 수아가 다시 한 번, 욕을 내질렀다. 전방에 하나의 철조망이 자신을기다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주택가의 불빛들이 까마득히 멀어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야속한 철조망은 굳건히도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씨발ㅡ!!"

같은 높이에 가시철길이 얹어진 철조망.
이젠 가시철길 위에 올릴 옷더미조차 없었다. 사실상, 건너는 것은 거의 불가능으로 보였다. 우선 다급히 비포장길에 닫힌 철조망문으로 다가갔다. 잠기지 않고 그냥 닫혀있길 바래보지만, 역시나 자물쇠로 굳건히 잠겨있다.


"개새끼.."

한숨이 크게 내쉬어졌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려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시잡는다.


"씨발.. 어떻게든 나갈 거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수아가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러다 커다란 짱돌을 하나 발견하곤 낑낑대며 그것을 들었다. 얇은 팔뚝에 과분한 돌이었지만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위급상황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었다.


-깡ㅡ!


짱돌을 거의 던지듯 자물쇠에다 내려쳤다. 하지만 약올리듯 자물쇠는 얕은 흠집만  뿐, 부서지지 않았다.


"으으읏…"

이를  물고, 다시 짱돌을 들어 내려쳐본다. 깡, 처음보다   빠진 타격음이 고즈넉한 산기슭에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무리였다. 거듭될수록 힘만 빠질 것이고 그랬다간 도망칠 힘마저 잃을 수 있었다.


"씨발.. 어쩌지."

불안, 초조, 긴장 같은 감정들에 뒤쫓기듯 수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딱히 방도가 없어보였다. 철조망은 어둑한 어둠 속에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산 전체를 두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험준한 산길을 맨몸으로 구를 정도의 가치는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비록 자신의 위치를노출시키는 것이지만,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온다면 어디에 숨어있든 놈에게 발각되는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단전에 가득 호흡을 불어넣은 그녀가 손으로 나팔모양을 만들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살려주세요ㅡ!! 사람 살려ㅡ!!"

주택가와 이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정도.
운이 좋다면 소리를 들은 주민이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야심한 시간이기에 실패할 가능성이농후했다.


되레 놈에게 발각되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 방법말고는 묘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아는 목청이 찢어져라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어…!"

그 외침이 전달됐는지, 불이꺼진 주택가 중 한 집에서 불이 켜졌다. 수아는그 초라한 불빛마저 풍랑 속에서 만난 등대와 같이 희망차게 느껴졌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ㅡ!!!"

컥컥컥, 얼마나 소리를 질러댄 건지 기침과 동시에 목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제발, 누군가라도 들어주길 바라며.

"살려주세요ㅡ!! 사람 살려ㅡ!"


그렇게 얼마나 외쳤을까, 산의 초입에서 손전등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수아는 그 불빛을 보고 더욱 크게, 핏물을 토하든 말든 상관없이 성대가 찢어져라 외쳤다. 입가엔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에요! 여기요!!"


손전등의 불빛이 어지러이 휘저이며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수아가 다시금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등뒤를 홱 돌아보았다.


"흐읏!"

아무 것도 없었다. 달빛에 비친 나무가 마치 놈의 모습 같아 소스라치게 놀랐을 뿐이었다. 그녀는 철조망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계속 소리쳤다. 철조망이 흔들리며 쇳소리를 낸다.

"어서요!! 여기요!!"

-거기, 누구요!

불빛이 가까워지자 아래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목소리에 수아는 다소 실망했지만 자신에게 선택권은 사치임을 알기에 계속 소리를 쳐 위치를 알렸다.

-휘잉ㅡ

찬바람이 한차례 몰아친다.
나무가 흔들리며 낙엽을 쏟아내고 스산한 소리가 등골을 서늘케 만들었다.

"어서요!! 경찰에 신고해주세요!"

마침내,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홀로 올라온 노인은 철조망의 잠금을 풀만한 힘도, 도구도 어떤 것도 없었으니까.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헐떡이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 오히려 걱정스러운 행색이었다.

섹섹대는, 숨소리를 내며 노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떡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다물어지지 못했다.

노인은 처음 여성의 구조비명을 들었을 땐, 하산 도중에 부상을 입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여신의 아름다운 나체는 보고도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 이 무슨…"


늦겨울에 천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체에 얼굴은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런 여성이 철조망 건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구원을 바라는 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꿈인가? 내 이제 세상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가보오.. 귀신에게 홀려 야산을 오르다니 말이야…"


경이로운 육체와 외모에 노인은그렇게 생각했다. 뭔가에 홀린것이라고. 그옛날, 민담으로 내려오는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는 구미호, 아니면 구슬픈 울음으로 홀려 죽음에 이르게하는 처녀귀신이라던지, 그런 것이라 여겼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이제  이상 겪을 산전수전도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끝을 오늘 경험하는 듯했다.


게다가 방금 자다가 비명소리에 깼으니 필히 이건 귀신에 홀린 것이리라. 그러다 물속에 잠긴듯 웅웅대는 소리가 이내 귓속을 파고들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뭐하는 거야! 이 망할 영감탱아!! 정신 차려! 어서 구해달라고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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