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마지막 복수를 위하여
"어? 어어? 주인님인데??"
박인아의 외모에 심취해 황홀스레 티비를 보던 세나의 눈이 토끼 눈마냥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보고 있는 화면은 다름아닌, 인아가 단상을 내려오다 넘어지며 강한과 포옹하는 장면이었다.
세나가 입을 떡 벌린 채, 망부석마냥 굳어서 그 장면을 쳐다보았다. 티비 속 강한이 인아를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엇! 진짜 주인님이신뎅? 맞죠? 맞죠?"
세나가 티비리모콘으로 강한의 얼굴을 가리키며 수아에게 물었다. 세나의 작은 배려(?)로속박기구 방향이 90도 틀려 티비를 볼 수 있었던 수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아ㅡ 뭐지? 왜 주인님이 저기 계시지? 아니, 아니징. 그게 아니라 시장님을 안는 손이 찐득했어! 그렇지 않아요? 그쵸 그쵸?"
이번에도 수아가 고개를 끄덕했다. 어차피 세나의 물음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동조를 구하는 것일 뿐.
그리고 원래 여성들의 눈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정확히 캐치되는 법이다.
세나가 잠시 말을 잃은 채 티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수아를 먹일 3분 수프가 냄비서 펄펄 끓어대고 있었지만 그녀의 귀에 푸쉭대는 냄비의 비명소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주인님.. 설마…? 여자친구우ㅡ?"
제 입으로 내뱉었음에도 놀랐는지 세나가 눈을 끔뻑였다. 주인님에게 여자가 있을 거란 생각에 다소 충격을 먹은 듯했다.
"아, 아냐! 주인님한테 그런게 있을 리 없어! 더군다나 저렇게 예쁜 여자친구라니! 가당치 않아!"
불안한 마음을 부정하려 말을 내뱉다가 그만 주인님을 매도해버린 것 같아 세나가 다시 우물거렸다. 검지 손가락을 맞대며 우물대는게 영락없는 귀여운 소녀 모습이다.
"아.. 아니, 주인님 정도면 괜찮치..! 그치만..!"
왠지 배신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세나가 심통이 난듯 볼에 바람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친구가 아닐 것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아본다. 만약 그렇다면 기분이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아냐.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주인님 오시면 물어보면 알겠징."
-삐이이이익ㅡ!
"아앗!! 스프가!"
-호다닥!
그제야 냄비가 지랄발광을 해대는 소리가 들린 세나가 거의 날 듯이 주방으로 달려가 불을 껐다. 세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다 멈칫했다.
짓눌려 삐져나온 수아의 젖가슴이 보였다. 왠지 쓸어내릴 가슴도 없는 듯한 서러움이 밀려와 피유ㅡ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의 세나가 중얼거렸다.
"휴.. 현타 오지넹.."
* ** *
대충 길가에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차를 최고급으로 바꾼 이후로 세상 편해진 게 하나 있었는데 대충 주차를 해놓아도 뭐라하는 사람도 끌고가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차들이 길가에 주차를 쭈욱 해놓았길래 같이 주차를 해두었었는데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내 차만 우두커니 남아있기도 했었다.
흡사 왕따당한 느낌이었었다.
뭐, 따지고 보면 혼자 여럿을 왕따시켰다고 할 수 있지만. 여하튼 그것말고도 재력과 명예가 생긴 후로 세상 편해진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대부분이 시간절약되는 것들이었다.
VIP주차장 주차로 시간 감소, 길가 주차해 미견인되니 시간절약, 그리고 도로만 달리면 앞뒤가 시원하게 뚫리는 모세의 기적까지.
모세가 홍해가 갈라지는 광경을 보고 이런 시원한 쾌감을 느꼈을까 싶었다.
여하튼 시간이 곧 돈인 이 세상은 결국 돈이 많은 자가 시간도 많이 가지게 되고, 결국은 돈이 많은 자가 돈을 더 벌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 역시도 성공하기 이전엔 차 좋다고 유세 떠는 거냐며 기득권층을 욕했었지만, 막상 내가 기득권층이 되니 편의 때문에 똑같이 하고 있잖은가.
다음에 만약 회귀시켜준다면 주둥이나 조심해서 놀려야겠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여긴가."
휴대폰 네비를 끄고 한 건물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진작 왔어야하는 곳이지만 그간 바빴던 탓에 조금 미뤄진 곳이었다. 주택가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이곳 주인이 기거하는 주택의 지하에다 작업실 공간을 마련해둔 곳이었다.
간판 하나 없는 곳은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려있었다. 지하로 통하는 길이래서 어디 음습한 노래주점을 통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평평하고 완만한 넓은 길을 조금만 걸어내려가니 케케한 냄새는 조금 났지만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계세요?"
고요한 작업실에 조심스레 말하자 잠시 후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 김가인 대표 소개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 연락 받았었습니다."
이곳은 바로 개인 화실이었다. 예술가의 혼이 여실히 느껴지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중후한 남성이 방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물감이 어지러이 묻은 화실용 앞치마를 두른 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강한이라고 합니다."
"허허,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하하. 아닙니다. 인물화의 달인이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싶은 얼굴이 하나 있어서요."
쑥스러운지 남성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허! 달인은 무슨요. 그저 인물의 특징을 콧대 높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려내는 미천한 기술 하나 있을 뿐이지요. 또 명확한 명암과 주름결 하나도 그려내는 디테일한 소묘로 생동감도 불어넣을 줄은 압니다만 그걸 달인이라 부르면 모두 달인이지요. 허허허!"
..그냥 순순히 인정하는게 더 낫겠건만. 쑥스러운 척하면서 되레 자기자랑을 하다니.
"뭐.. 그런걸 달인의 기술이라 부르는거 아니겠습니까."
귀한 마컨 기회를 이런 자에게 쓰기엔 남용이어 대충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자, 그럼 작업비는 조금 비싼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습니다."
"하긴 수억대 인센티브를 받으시는 분인데 제가 경솔했습니다. 허허허!"
하여간 이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이 워낙 투명해져서 큰일이다. 가격은 50만원이라했다. 물론 내겐 이제 껌값과 동일했지만 그냥 인물화 한 장에 50만원을 주려니 사기당한 기분도 들었다.
뭐가 이리 비싸.
가인이 무슨 브로커였던 건가.
만약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값비싼 시간을 허비한 죄로 이 화실을 아주 없애버릴 것이다.
"자, 그러면.. 그리고 싶으신 분 사진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의 말에 일순간 화백의 얼굴에'이새끼 뭐지?'라는 황당함이 스쳐갔다.
"그, 그럼 뭘로 그리시겠다는?"
"기억으로요. 제가 말하는대로 그려주시면 됩니다."
화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껏 의뢰인의 기억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을 터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내게 그 희대의 썅년의 얼굴은 기억으로 밖에 회상되고있지 않았으니까.
"으음… 기억으로 그린 경우는 처음이라.. 그, 좀 쉬운 일도 아니고.. 그.. 시간도 많이 들어가고.. 수정도 하면… 더 시간도 걸리고…"
"원하는 만큼 돈은 드리겠습니다."
"…!! 지금 당장 시작할깝쇼!"
나의 호언장담에 중년화백이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서둘러 작업 준비를 했다. 이 인물화 작업에 솔직히 마지막 복수의 사활을 걸었기에 천만원이든 일억이든 결과물만 흡족하게 나오면 돈은 상관없었다.
기억을 형상화시킬 유일한 방법이니까. 자리를 잡은 화백이 내게 물었다.
"자.. 그럼 어떻게 그릴깝쇼?"
"으음.."
막상 얼굴을 설명하려니 쉽게 운이 띄이지 않는다. 그와 상의해 눈썹 하나만 그리는데도 수십번을 지우고 다시 그려 30분이 걸렸다.
썅년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눈썹 한올도 허투루 그릴 수는 없었다.
"후.. 평생 가장 난이도 높은 인물화를 그리는 것 같군요."
중년화백이 진땀을 닦으며 말했다. 얼굴 윤곽과 눈썹을 그리는데에만 1시간이 걸렸다. 언뜻 보니 나를 미친놈 보는 듯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 한 장 없이 어릴 적에 이별한 어머니입니다… 어엿하게 성공했으니 꼭 어머니께 아들이 이렇게 잘 컸다는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그, 그런 사연이..! 크읏…! 잠시 투정부린 저를 용서하옵소서…!"
다행히 화백은 나의 말에 싸이코패스를 보는 듯한 시선을 거두고 오히려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 기세라면 얼굴 완성에 반나절은 걸릴 듯싶었지만 다행히도 대충 얼굴 구도부터 잡으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두 시간여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고, 난 흡족스런 미소를 화백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다시 그리자할 것 같았나보다.
"..이, 이제 다 된 거지요? 수정할 곳은 더 없지요?"
노파심에 말까지 더듬는 그에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가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림을 건네 받았다. 그의 실력이 확실히 뛰어나긴 했다. 주둥이가 가벼워 조금 의심은 했다만 마치 밥로스 형님이 예토전생해 '참, 쉽죠?'를 남발하는 듯 거침없이 그려나갔었다.
커다란 캔버스지에 썅년의 얼굴이 나의 기억 그대로 그려졌다. 잠시 빌어처먹을 씹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흐음, 지금보다 몇년 후의 얼굴이니 이 그림과는 완벽호환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의술로 얼굴을 갈아엎지 않은 이상 충분히 알아볼 것이다.
'좆 같은 년.. 이제 넌 뒤졌다.'
"어머님께서 미인이시군요.. 먹먹하신가봅니다. 저도 어머니를 어렸을 적에 여위어 그 마음 잘 압니다.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중년화백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했다. 뭔가 찔려 그의 위로를 무시했다. 내 마음을 잘 안다니, 큭큭. 괜스레 웃음이 나올 것 같아고개를 푹 숙였다.
난 그림 속 얼굴을 내려다본 채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이 조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안다면 까무러치겠지.
"..예, 꼭 찾아야지요."
화백이 인중에 흐른 콧물을 훔치며 말했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크흑…! 사나이가 주책 맞게 눈물을…! 작업비는 반만 받겠습니다…! 이건 진심에 의한 제 응원입니다…!"
흠, 마치 조금 모지라지만 마음씨는 착한 동네바보형 같군. 작업비를 반만 받겠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그에게 난 오히려 웃돈을 얹어 총 백만원을 송금해주었다.
"입금 확인해보세요."
왠지 아날로그 시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그에게 현금을 뽑아드리겠다하자, 그는 잽싸게 최신 스마트폰으로 능숙하게 인터넷뱅킹을 열어 내게 계좌번호를 불러주었었다.
정감 가는 캐릭터다.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화백은 지하작업실을 빠져나가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어머니를 꼭 찾길 바란다는 응원을 겻들여서 말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썅년과의 조우를 고대하는 사람이 한 명 늘었다.
곱게 포장까지 해준 인물화를 차에 실었다.
자, 이제 인물화를 세상에 알릴 일만 남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