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기자회견
강한이 고개를 돌려 레이나킴을 의뭉스레 쳐다보았다. 이전보다 더 고혹스레진 것 같은 그녀의 주름진 얼굴 속 연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혼혈이라 그런지, 눈동자색이 참 아름답다.
"축배요?"
"축배겸, 단합주죠. 시장님과 저와, 작가님의 앞날을 도모하기 위한?"
레이나킴이 소소히 웃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유려한 곡선의 팔자주름마저 매혹적이다. 강한은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어차피 이제 나머지 당들이 연합을 하냐 안 하나만 귀추를 주목하면 될 테니까.
물론 오늘은 꼭 세나에게 들릴 계획이었다. 그간 바빠 발길이 뜸하기도 했고, 세나의 그 개냥이스러운 모습이 그립기도 했다.
'수아를 어디까지 조교해놓았으려나.'
그리고 백옥여신 수아의 속박된 모습도 아른거려왔다. 망할 복수녀지만, 직접 빚은 그 아름다운 자태가.
"그럼.. 오늘 들를 곳이 있으니 일찍 시작하시죠."
"일찍이라면 몇시쯤..?"
"기자회견 끝나고 한 군데만 들렀다가 바로요."
레이나킴이 후후, 미소지었다. 왠지 사람 하난 잘 봤다는 듯 뿌듯한 미소였다.
"역시, 알겠어요. 바로 준비하죠. 장소는 제가 준비해둘게요. 아무래도 시선이 없는 곳이 편하실 테니까. 시장님이든, 작가님이든."
"그럼 감사하죠."
레이나킴이 비서를 대동하고 다시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거의 마지막 질문타임이다. 공식적으로 지정된 한 시간의 기자회견시간이 1분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회견장 벽시계를 확인한 강한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짐이랄 것은 벗어놓은 외투 뿐이었지만.
그때, 진행자의 지목으로 마지막 질문을할 기자가 일어섰다. 이제 빼먹을만한 것들은 거의 빼먹은 탓인지 기자들은 그저 노트북으로 열심히 타이핑만 해대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엔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WTN의 최두식 기자입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시장님과의 이강한 작가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간 이강한 작가와 함께 있던 장면이 몇 장의 사진으로 풀어졌었는데요. 이강한 작가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의 마지막 질문에 노트북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기자들이 사막 미어캣마냥 일제히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리곤 기사와 별개로 왠지, 드라마를 보는듯 흥미진진한표정으로 인아를 응시했다.
만약 나이든 평범한 노처녀 시장이었다면 배우자든 연인이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아는 평범치않은 절세미모에 드라마여주인공과 딱 어울리는 서글픈 인생사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녀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여성기자들은 리모콘만 쥐고 있다면 볼륨을 높일 기세다.
인아가 머뭇거렸다.
어떤 관계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몸을 섞고 자신은 어느정도 마음을 주었다 생각하지만 강한의 속내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강한은 그런 인아의 주저함을 주시했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딱히 합을 맞추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강한은 궁금했다. 그녀의 대답이.
잠시 고민하는 인아에 장내가 숨을 죽였다. 진행자마저 그녀의 미모에 심취한듯 마이크를 내리곤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결심한듯 인아가 마이크 버튼을 다시 눌렀다.
"…이강한작가님과는 그저… 지인 사이입니다. 제 고민을 자주 상담해주는 고마운 분이시죠."
짧게 말하곤 마이크 버튼을 끄고 인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왠지모르게 강한과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 그저 바닥만 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에 장내에선 작은 환호가 터져나왔다.
남자기자들은 '그럼 그렇지.'라며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기자들은 '암, 안 되지.'라며 마찬가지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그들의 반응에 강한은 이상하게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모야 당연 자신이 모지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면전에서 그녀의 연인감으로 매몰차게탈락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울적했다.
'내가 뭐.. 어때서..'
그러다 조울증이라도 온 듯, 자신을 능멸한 기자들에게 사이킥 컨트롤 불닭맛을 선보여줄까하다가 이내 화를 누그러뜨렸다.
'휴.. 화내서 뭐하겠어.'
그는 체념한듯 외투를 입으며 인아를 쳐다보았다. 그사이 인아가 자신을 힐끔 곁눈질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고개가 홱하니 돌아갔다. 그러곤 단상 밑의 무릎에 포개둔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댄다.
'푸훗, 저게 어딜 봐서 42살 노처녀야.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이쁘고 봐야 돼. 못생긴 좆돼지년이 저러고 있으면 마컨으로 족발로 삶아버릴 텐데 말이야.'
기자회견이 드디어 끝이났다.
인아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높은 계단에 강한이 다가가 에스코트 해주려했지만 쑥스러운듯 인아가 거절했다.
"아, 아니야. 혼자 내려갈 수 있어."
민망하게 뻗은 손을 급히 회수한 강한이 그녀가 계단서 내려오길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갑분로맨스'가 되어버린다.
"아, 아앗ㅡ!"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인아가 계단에서 넘어졌고, 그대로 강한의 위로 쓰러졌다. '어어!'하다가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강한이 뒤로 넘어지며 본능적으로 인아를 안았고, 자신의 몸을 돌려 밑으로 깜으로써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해주었다.
-쿠웅!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강한은 침실에서처럼 그녀와 포개진 몸에 당황하고 말았다. 인아의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인다. 머리칼이 커텐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파바바밧!
-찰칵찰칵찰칵!
-아아, 안돼ㅡ
-찰칵!찰칵!
그런 둘의 로맨스적인 몸 포개임에 기자들은 하이에나로 변모해 카메라 셔터를 허벌나게 눌러댔다. 강한이 급히 그녀의 몸을 밀치듯 옆으로 보내곤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미, 미친. 이게 무슨…!'
자신을 찍어대는 카메라 셔터에 강한이 이를 곱씹었다. 하여튼, 뭐 물어뜯을 거 하나 있으면 득달 같이 달려드는게 꼴사나웠다.
그러다 문득, 인아를 너무 매정하게 밀어버린 것 같아 강한이 급히 인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아있었다.
'…거기 왜 그러고 앉아있는 거냐!'
강한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시장님, 어서 가시죠. 멍하니 있지 말구요."
"아, 응.."
강한은 마치 보디가드마냥 그녀를 부축하며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몰려드는 기자들은 방송국소속 경호원팀이 제지시켜주었다.
이름모를 대기실로 들어온 강한은 인아를 소파에 앉히고 문을 잠궜다. 딸깍.
"어휴.. 하여튼 기자놈들이란."
강한이 괜히 한번 퉁명스레 중얼거리곤 고개만 살짝 돌려 인아를 흘금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욱씬대는 발목을 만지고 있었다.
강한은 아까 밀친 것이 괜히 미안해 쭈뼛댄다. 인아는 그가 밀친 것에 대한 서운함과 관계에 대한 답변 탓에 어색하게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복잡미묘한 기류가 감돈다.
"저.. 국장님이 한 잔 사겠다고 하던데, 가실래요?"
강한이 힘겹게 운을 뗐다. 이런 상황은 질색이었다. 더군다나 인아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지만 사과를 하기엔 조금 그랬다.
연인사이었다면 사과하는 것이 응당 옳지만, 자신과 인아는 따지고 보면 아직 남 사이이기에 밀친 것을 구태여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난 괜찮아. 피곤하기도 하고. 발목도 얼음찜질할 겸 집에 가서 좀 쉬어야할 것 같아."
"그래요.. 바래다 드릴게요. 가요."
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밖에 기자들이 깔렸을 텐데 같이 나갔다간 또 물어뜯겠지. 그냥 혼자 갈게. 먼저 출발해."
"흐음.. 그렇겠죠.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요. 발목 찜질 꼭 하시구요."
인아가 강한의 말에 처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곤 싱긋 웃었다.
하지만 강한은 도망치듯 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어색한 상황이 생기는게 영 불편했다.
"하, 괜히 밀쳤나.."
그가 주차장으로 향하며 후회스레 중얼댔다. 계속 신경이 쓰였다. 밀치고 난 후, 비통하게 주저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어휴, 모르겠다. 우선 가자."
차에 오른 그는 문자를 확인했다.
[ 그랜드 호텔 1202호 ]
레이나킴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그런데, 그랜드 호텔이란 장소에 강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술집이거나 아니면 개인연회장 같은 곳일 거라 생각한 탓이다.
"뭐지?"
우선 그는 그곳으로 네비를 찍었다. 20분 정도 가야하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네비로 대충 확인하니 근처에 딱히 건물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강한은 므훗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보안에 신경을 쓰느라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곤 넘겨버렸다.
문자를 닫고 인터넷을 켰다.
아니나다를까, 인아가 넘어지며 자신의 몸 위로 포개지는 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짤방처럼 온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절세미모의 여시장, 인아의 유명세 탓이었다. 그녀는 지금 가히 톱스타를 웃도는 인지도를 쌓고 있었으니 말이다.
ㄴ 대박.. 나도 저런 여자한테 덮쳐져봤으면ㅠ
ㄴ 개쩐다… 드라마같아.. 남주인공만 조금… 그렇지만..
ㄴ 어므나ㅠㅠ어뜩해ㅠ존예ㅠ우리 시장님 화이팅♡
ㄴ 둘이 진짜 사귀나? 포옹이 예사롭지 않은데
ㄴ 남자가 안으면서 쓰러지는게 좀 썸은 있는듯
ㄴ 지랄ㄴㄴㄴㄴㄴㄴ저런 여자가 저런 남자한테?
ㄴ 저 작가도 돈 존나 많음. 모름?
ㄴ 하여튼 남자는 돈이 최고야.
"…."
하나같이 인아에 대한 이야기뿐.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곤 은근한 비난 뿐이었다. 괜스레 차 백미러로 얼굴을 비춰 쓰담해보았다.
"쒸빨… 백미러가 원래 얼굴이 좆같이 나오긴 해."
악플을 받는 연예인들이 이런 기분일까, 애써 위안을 삼아본 강한은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절대 못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인아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니 상대적 오징어 이론에 걸려든 것일 뿐.
-부우웅ㅡ
"술이나 마셔야겠다. 좆또."
우선 볼 일을 보기 위해 어디론가 향했다.
그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진작에 들렸어야할 곳이지만 그간 바빠 들리지 못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