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시장 박인아와 순애씬
다음부턴 암시를 걸 때 초딩도 알아들을 수 있게끔 쉽게 풀어서 걸어야겠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머리 한번 내어준 덕분에 좋은걸 배워가는군.
"자, 이제 니놈 하나 남았는데. 어떡할까."
"개, 개새끼가! 오지마! 이년 죽일까!"
"풋. 어디 해 봐."
나의 태연한 으름장에 놈보다 인아가 두 눈동자를 휘둥그레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위태로이 일렁인다.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뽀얀 목선과 웨이브진 긴 머리칼이 어지러이 얼굴을 덮은 모습이 왠지모르게 퇴폐미가 묻어나와 감탄하게끔 만들었다.
참, 나란 놈도 글러먹었어.
난 겁에 질린 인아에게 싱긋, 윙크를 날려주었다.
당연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인아는 그저 놈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떨고 있었다.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아냐!!"
"아, 잠깐만."
칼을 막 그으려던 놈이 내 말에 눈을 멀뚱히 뜨며 행동을 멈췄다. 그러곤 다시 소리를 질렀다. 목청 하나는 쓸만한 듯싶다.
"왜! 이 십새야!"
"너 혹시.. '위해' 라는 단어 뜻 아니?"
놈이 의기양양히 조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안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얼굴이 비웃음을 짓자 완전 씹창내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럽다.
"이거 완전 븅신새끼네. 그것도 모르냐?"
"뭔데?"
"위하여 줄임말 아니냐! 이 븅따아크윽.."
-퍽.
-풀썩..
놈이 한눈 판 사이, 재빠르게 근접한 난 놈의 목에다 넥슬라이스를 날렸다. 근력증강으로 다리근육이 발달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날렵한 움직임이 가능했었다.
보폭 10걸음정도의 거리였지만, 거의 날듯 움직여 다섯 보폭만에 놈과의 거리를 좁힌 것이다. 놈이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위해'라는 단어가 고오급 단어였단 말인가.
하여튼 허구헌날 술처먹으며 위하여를 외쳐대니 대가리 속에 든게 그모양 그꼴인 듯싶다. 뭐, 아이러니하게도 그덕분에 내 최면암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만.
"자, 작가님ㅡ! 흐으윽…!"
놈에게서 풀려난 인아가 드라마속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달려와 내 품에 포옥 안겼다. 예상치 못한 포옹에 잠시 당황해있다가 이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흐윽… 흐으윽…"
인아는 정말 서럽게도 내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들썩이고 숨도 못 고를 정도로 말이다. 무섭기도 했을 거고, 내게 미안하기도 한 모양이다.
인간의 속내란 참 한길 앞을 모르는게 맞는 듯싶다.
대중들의 시선에 그녀는 모든 것을 이룬 신여성(新女性)이지만, 알고 보면 결국은 이리저리 굴림 당하는 가련한 돌멩이 신세일 뿐이라니.
측은지심에 그녀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40대 초반의 여성이 20대 후반의 내 품에 안겨아이처럼 울어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울음을 어느정도 그친 인아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당대표와 아버지가 제 존재를 눈치챘나보죠?"
"..네.. 작가님께 성접대 사실을 얘기한 것을 알고는 이 일을 꾸몄어요… 죄송해요."
"쉿. 시장님이 잘못한 것은 없어요. 우선 이동하시죠. 여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이제 사이킥 컨트롤 기회도 없다. 혹여 후발대에서 들이닥친다면 그녀를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근데.. 어디로?"
인아가 눈물을 훔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40대 초반이라 믿기 힘든 눈물 젖은 아름다운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치 응석부리는 아기 같기도 한 모습에 보호본능이 일깨워졌다.
"제 집으로 가시죠.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끝장을 봐야겠네요."
"..끝장요?"
"시장님은 아무 생각마세요. 제가 모두 깨끗이 처리해드릴 테니까."
이미 당대표와 그녀의 아비란 작자를 아작내버릴 계획은 머릿속에서 구상을 마친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국장 레이나킴을 포섭한 것이기도 했었다. 물론 잇몸펠라는 덤이었고.
우선, 인아를 데리고 차에 오른 난 곧장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물론 종이에다 놈이 일어나면 볼 수 있도록 전언을 적어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ㅡ사주한 새끼들한테 곧 찾아갈테니 기다리라고 해라ㅡ
* * * *
"우와…"
인아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풋살을 해도 충분할 법한 공간을 그녀는 연신 둘러보았다. 벽면 곳곳에 자리한 값비싼 조각상과 미술품, 그리고 설치예술가에게서 구매한 품격있는 인테리어소품까지.
오랜만에 소싯적 느낌을 살려 인테리어해보았었는데, 그녀가 감탄스러워하니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저희 집보다 훨씬 좋네요.. 스타작가가 되신 것은 들었는데 연봉이 어마어마하신가봐요."
"탈탈 털었어요. 이제 빈털털이죠. 펜트하우스라 보안이 엄격해서 외부인이 쉬이 들어오진 못할 겁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세요."
"신세를… 꼭 갚을게요."
"제가 갚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너무 염려말고 편히 있으세요. 일이 정리되기 전까진."
진심이었다.
여자는 생체오나홀이란 나의 집념어린 가치관을 바꿔준 첫 여성이자, 복수계획에 큰 도움을 준 그녀에겐 내가 신세를 갚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한 것도 없는데."
"흠, 그나저나 좀 씻으셔야겠는데."
먼지바닥 공사장을 굴러다니느라 인아의 몰골은 한평생 길바닥에서 연명해온 똥개못지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는 시멘트 먼지가 묻어 얼룩했고 옷 역시 먼지가 묻어 뿌옇게 변해있었다.
"아아,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샤워실은 저기 있어요. 안에 용품들하고 수건하고 다 있으니 쓰시면 돼요. 음.. 옷이 문제네."
"아니에요! 옷은 이거 다시 입으면 돼요."
"더러워서 그래요."
딱히 청결에 유난떠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 값비싼 펜트하우스로 온 이후론 청결이 조금 신경쓰였었다. 중고 벤츠탈 때는 하지 않던 신발밑창 털기도 벤틀리를 탈 때는 빠짐없이 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샤워하고 있으세요. 입을만한 옷을 찾아볼게요."
"네, 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인아가 도망치듯 샤워실로 들어갔다. 참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여자다. 공식석상에선 도도하고 당당하며 사석에선 귀엽고, 순함을 가진 매력의 여성이니 어찌 생체오나홀로 쓴단 말인가.
벽면 옷장을 열고 입을만한 옷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정장 말고는 거의 입을 옷이없었다. 평상복과 잠옷은 모두 아직 안전감옥에 모두 있었다. 펜트하우스로 이사한지 얼마되지도 않았거니와 아직까진 이곳은 내게 잠자리보단 쉼터의 느낌이 강했었다.
있는 평상복이라곤 내가 입을 한벌밖에 없었다.
"흐음.. 난감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쇼핑이라도 좀 해둘걸 그랬다. 고심 끝에 결국 흰색 와이셔츠 하나를 꺼낸 후 벽면옷장을 다시 넣었다.
바지도 일단 내 사이즈에 맞춘 정장바지를 꺼내긴 했는데 가녀린 그녀의 체구에 당연히맞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근력증강으로신체사이즈가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어버려 와이셔츠 역시 그녀에겐 펑퍼짐할 테지만 어쩌겠는가.
이 야심한 시각에 옷을 살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을 텐데 말이다.
와이셔츠를 들고 샤워실로 다가갔다.
-쏴아아ㅡ..
샤워실 문 너머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모르게 침이 꿀떡 넘어갔다. 숨소리를 죽이고 샤워실 문 쪽으로 귀를 갖다대었다.
이미 끝장을 다보았다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는 법이기에 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40대초반의 미모의 여시장이 내 샤워실에서 내가 쓰던 용품과 타올로 샤워를 하고 있다니.
어느새 상상의 나래는 그녀의 나신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샤워하는 모습을 소리에 맞춰 재현해내고 있었다.
'아냐. 오늘은아니라고.'
상상을 애써 지워버리며 정신을 차렸다.
오늘 그녀는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를 오늘만큼은 겁탈하기 싫었다. 이성이 본능을 억누르는, 현생 최초의 순간이다.
-똑똑.
"앞에 옷 놔둘게요.입을 옷이 와이셔츠하고 정장바지 밖에 없네요."
-..고마워요.
옷을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풀썩, 주저 앉았다. 펜트하우스에 처음으로 들일 육노예는 세나일 거라 예상했건만, 어째 인아를 처음으로 들이고 말았다.
그녀의 신변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경찰서에 맡겨봐야 놈들은 고위기득권층의 힘으로 손쉽게 그녀를 빼내올 것이기에 오직 나만이 출입가능한 이곳, 펜트하우스가 아니면 그녀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상후돔시에서 내노라하는 경제계 인사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있는 이곳이기에 외부인은 출입부터 검색대 통과에 짐류도 모두 검사받아야하며, 신분확인까지 철저히 걸쳐야 출입이 가능했다.
펜트하우스의 손님이라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곳엔 함부로 처들어오진 못할 것이다.
뭐, 내가 오히려 쳐들어갈 생각이긴하지만.
상념에 잠겨 소파에 몸을 맡기고 있자 샤워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돈다.
주섬주섬,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애써 신경쓰지 않는 척을 하며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저… 작가님, 바지는 너무 커서 못 입겠어요."
"그렇죠? 모두 같은 사이즈라…"
심드렁하게 들어올린 시선에 인아의 모습이 포착되었고, 그순간 부왁하며 코피가 뿜어져나올 뻔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에 민낯조차 여신미모, 거기다 본의아니게 오버사이즈핏이 되어버린 와이셔츠는 그녀의 브라색상이 연분홍임을 알려주었고, 무엇보다 하체가 압권이었다.
루즈하게내려온 와이셔츠 끝단은 핫팬츠라인까지 그녀의 하체를 가려주었고, 그 밑으로는 완전한 나신이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못한 그녀의 수려한 각선미가 조명아래 광채를 발한다.
각선미가 저렇게 예뻤던가. 잘록한 발목에 아담한 발은 분홍빛마저 감돌아 군침이 돌았다. 없던 발페티쉬도 생길만큼 어여쁜 발이었다.
나도모르게 침을 꿀꺽하곤 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왜?
이미 잠자리까지 나눈 사이인데, 뭐 때문에 이런 멜랑꼴리한 상황이 연출되는 거야. 난 시선을 돌린 채 냉장고로 향했다.
"배 안 고프세요?"
"네, 안 고파.."
-꼬르르르륵ㅡ
공허한거실에 울리는 굉장한 배울림에 인아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곤 고개를 숙여버렸다. 마치 '뭐가 배가 안 고파!'하며 주인을 꾸짖는 소리 같았다.
"…배 고픈 것 같네요"
피식, 나이가 무색한 귀여움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배달앱을 열어 음식을 주문했다. 안전감옥이었다면 냉동식품으로 떼웠을 텐데, 그리고 보통 바깥에서 끼니를 떼우고 들어오는 편이라 음식주문은 처음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치킨하고 피자 시켜놨으니까요."
인아가 급히 벗어놓은제 옷을 뒤적거리며 소리쳤다.
"계, 계산은 제가 할게요!"
"푸훗. 됐어요. 카드 긁었다가 여기 있다고 광고라도 할 셈이에요?"
"아…"
물론 놈들은 인아가 이곳에 있을 거라 예측은 하겠지만, 모름지기 형사들도 수사할 때 물증으로 움직이는 것과 확증으로 움직이는 것이 다른 법이다.
당분간은 인아와 내가어떻게 나올지 모를 것이기에 몸을 사리고 있을 터다.
잠시 후, 배달음식이 도착했다.
이곳은 경비가 워낙 삼엄해 배달음식 또한 경호원이 직접 가져다준다. 음식값은 경호업체에서 우선 지불하고, 달마다 정산해 요청하는 방식이다.
이곳에 와서 느낀 거지만, 정말 인간은 돈에 의한 삶의 질이 천지차이다. 없을 때로 무일푼, 회귀능력도 없이 골방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젊음을 준다해도 거절할 정도로 말이다.
젊음을 보상으로 고단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들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거짓말로 위선을 떠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한 인생이 고단한 젊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젊은 이들에게 인생을 팔아 제 인생의 격을 높이기 위한 헛소리인 것이다.
어느누가 성공할 지 모르는 깜깜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절대 못 돌아가지.'
고급식탁에 어울리지 않는, 치킨피자 상자를 올리고 인아를 불렀다. 그녀가 쭈뼛대며 식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서 먹어요."
"감사해요.. 진짜…"
그녀의 잔에 맥주를 부어주었다. 그리곤 건배를 치곤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ㅡ 역시 사는 곳은 이래도 먹는 건 이게 최고라니까.
먹는 곳이 중요한게 아니다.
먹는 게 중요하지.
인아도 맥주를 홀짝인 후, 피자 한입을 베어물었다.
그리곤 오물오물 음미하며 씹는가 싶더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으윽… 흐읍…"
피자를 입에 머금고 구슬피 우는 그녀에 당황한 난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서둘러 티슈를 건네주었다. 인아는 고개를 숙인 채 티슈를 받아들었다.
"흐윽…흐으윽.."
밥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막 한입 베어먹으려던 피자를 놓아두고 소주 하나를 꺼내와 맥주에다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잔을 바꿔주었다.
소주반, 맥주반인 독한 소맥이었다.
인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마치 오랫동안 속에 묵혀두었던 울분을 토해내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티슈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하아ㅡ.. 이렇게 우니까 그래도 기분은 좀 낫네요. 누구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는데.. 죄송해요.. 식사하시는데…"
"시장님은 죄송하단 말을 정말 자주하시네요. 병적으로."
"..그런가요… 죄송해요… 아, 아니. 그.."
죄송하단 접두사를 빼버리자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 다시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왠지모르게 편안한 미소가 자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