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순애히로인 시장 박인아
아린의 목소리와 나의 회귀능력으로 탄생한 음원은 첫 등록 당시에는 반응이 미미했다. 초록수박 사이트에선 순위 100위권에 들지도 못했지만, 이내 며칠 만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노래는 단숨에 50위권, 일주일만에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름 없는 가수, 순재의 네이밍 센스로 탄생한 순희라는 아주 구성진 가수이름이었는데, 구수한 누룽지가 잘 어울리는 순희라는 이름과는 달리 세련되고 그루밍 넘치는 반전 목소리에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거기다 대중성과 음악성은 당연했던 것이고.
순희라는 이름 없는 가수에 대한 추측성 글들이 난무했지만 아린은 계약서대로 모르쇠로 일관해주었다.
절대복종이란 암시덕에 아마도 목구멍에 칼이 들어와도 지조 깊은 춘향이처럼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것이다. 물론 초대박 음원에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지만, 투정은 가뿐히 무시해주었다.
이 저작권료는 오로지 나의 친구 순재를 위한 것이니까. 인터넷 찌라시에 따르면 1990년대에 '술이 한 잔'이란 곡을 메가히트시킨 가수는 아직까지도 1년에 중형차값을 벌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 곡이 그렇게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바뀐 미래에 그 히트성은 아직 무궁무진한 법이니 또 술이 한 잔같은 명곡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노래는 각종 음악방송에서 음원 점수만으로도 1위를 달성해 3관왕을 차지하는 국내 기네스기록을 세웠다.
저작권료는 단 한달만에 억 단위로 찍혔고, 순재는 그 돈으로 모든 빚을 청산, 거기다 전세로 작은 집까지 구했다.
"새끼, 내 진짜 친구 하나 잘 뒀네. 근데 요즘 느끼는 거지만 닌 내가 알던 강한이 아닌 거 같다."
"왜, 부럽냐? 큭큭."
"미친놈, 킬킬."
순재는 나의 성공신화에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지만, 내겐 썩 듣기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찌질했던 과거는 이제 영영 안녕이니까.
"하~ 인생 재미지네."
세상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었다.
기억이 전승된 회귀라는 압도적인 선물로 세상을 내 손바닥 안에 놓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기분, 중독될 것만 같다.
상후돔 시는 나의 또다른 업적으로 굉장히 시끄러웠다. 바로 박인아 시장이 부패한 여성 단체의 명을 그대로 공개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금을 모조리 끊어버려 그 비슷한 뷔페미즘 단체에서 거리로 나와 연일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덕에 난, 마지막 보스 년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웹드라마 제작은 감독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한편이 완성될 때마다 내가 직접 검토해 수정사항과 조언들을 주면 거기에 맞춰 재작업이 들어갔다.
가인에게 내린 특별지시였다.
그렇게 되면 어찌보면 난 시나리오 감독이 아닌, 총괄제작감독이 되는 거였기에 제작 감독이 내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지만 난 오로지 내가 원하는대로 네오스튜디오를 움직였다.
제작 감독도 몇번 그녀에게 자기가 감독인지 내가 감독인지 모르겠다며 항의했다지만 뭐,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짜놓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오늘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택시로 장소를 이동하며 시위현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복수를 어서 마무리짓고 싶었다.
복수 말고도 이 재미난 세상에서 이룰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물론 복수의 완성은 무조건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남자가 칼을 뽑아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하지 않겠는가.
"흐음.. 안 보이네.."
시위현장은 점조직 형태로 퍼져있어 크게 인원이 많지는 않아 둘러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을 식별하기가 여의치않았다.
"젠장, 이 씨벌년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거냐."
인아가 추려내어준 활동도 높은 인원명단에 올라있지 않았으니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것보단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비율이 높을 것이다.
특히나 이런 시위현장을 전전하고 있을 수도.
아니면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결국 오늘 하루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할 듯싶다. 이대로는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밖에 되지 않는다.
"젠장, 어떡한다."
하지만 딱히 묘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 년의 성이 '장'이라는 것과 얼굴 밖에 모르니까.
"아.. 그 생각을."
그러다 조금 번거롭고 상당히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딱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인아에게 다시 부탁해 상후돔 시에 기거중인 40대 여성 중 '장'으로 시작하는 여성의 명단을 모조리 뽑아달라고 하는 것.
아마 수 천명이 나오겠지..
상후돔 시의 인구가 560만임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만 단위를 찍을 수도.
나이 대가 정확하지 않았으니까.
전생의 당시 얼굴로 대충 유추해낸 것이다. 그것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성이 그나마 흔하지 않은 장 씨라는 것에 위안삼아야겠지.
"그래서.. 이번엔 장 씨의 40대 여성의 명단을 뽑아달라고요?"
인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스카이라운지가 있는 타워의 끝층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중이었다.
스테이크 하나가 무려 20만원이나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왠지 그녀에겐 아깝지 않았다.
현 복수계획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으니까. 정수아가 아직 전생의 그녀인지는 살이 빠져봐야 알겠지만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런 시도마저도 못했을 것이다.
"명단이 엄청 많겠네요.."
"출력하지 마시고 정리해서 파일을 그냥 넘겨주세요."
"네, 알겠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우린 잠시 묵묵히 식사를 재개했다. 차창 너머로 상후돔 시의 전경이 눈에가득 들어온다. 마치 상후돔이란 왕국의 국왕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시장님, 다른 부탁이 있는데."
"네?"
은은한 조명아래 빛을 발하는 그녀의 미모가 한층 수려하다. 저런 미모를 가지고, 저런 권력을 가지고도 눈동자에 슬픔을 머금을 수 있다니.
여성은 그저 생체 오나홀일 뿐이라는 나의 신념에 그녀가 자꾸 금을 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가 궁금했다.
"혹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 없으세요? 있으시면 듣고 싶어서요."
스테이크를 썰던 그녀의 칼이 우뚝, 멈춰섰다. 부탁이란 전제가 있기에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다.내 추측이 망상인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하겠지.
"..말 못할 고민은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찌르는군.
그래도 그녀에게 서글픈, 어떠한 고민이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이전처럼 애잔하게 가라앉았으니까.
젠장..
왜 그녀가 궁금한 거지.
왜 그녀의 고민이 듣고 싶은 거냐.
이제 세상 조금 살만해졌다고 감성세포가 미쳐 날뛰는 건가. 아니면 복수계획을 도와주고 있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에서 우러나온 감정일까.
그래, 후자가 맞는 감정이겠군.
고마운 건 사실이니까.
"작가님이 보기엔 제가 어때요? 행복해보이나요, 슬퍼보이나요."
"슬퍼보입니다."
그녀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다시 벌건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에 시선을 가져갔다.
"관심법이라도 쓰시나봐요."
"뭐, 관심법 쓰지 않아도 시장님 눈빛이 나 슬퍼요, 누가 좀 내 얘기를 들어줘요라고 얘기하는데 모를 수가 있을까요?"
"..그래요?"
그뒤로 그녀는 내게자신의 인생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의 집안 자체가 명망있는 정치가문이었고 그녀 역시 부모님을 따라 정치에 입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늘 하위직에 전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란 작자가 자신을 당대표에게 성접대를 시켰다고 했다.
난 이 대목에서 세상은 역시 히토미 속이다, 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자신의 딸을 성접대를 시키는 아버지라니, 이런 패륜적이고도 반인륜적인 아버지가 다 있다니, 세상은 넓고 또라이들은 많다던데 아직 난 우물 안 개구리인가보다.
가문의 수치라며 딸의 권위 상승을 위해 성접대시키는 정신머리는 쪼개보면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나도 현생에선 나름 쓰레기라 자부(?)하건만 그녀의 아비란 작자는 나의 쓰레기 지수를 가뿐히 뛰어넘어버린다.
"..미친 새끼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인아가 적적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 대신 욕해줘서."
그리고 그녀는 그 성접대 이후로도 당대표에게 끌려가 수시로 성폭행을 당했으며 그 대가로 당의 고위직을 꿰찰 수 있었다고 했다.
"이게.. 나의 말 못 할 이야기에요. 참 우습죠? 후훗."
애써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왜 이렇게도 가슴을 후벼파는 걸까. 강인할 것 같은 마스크 아래 숨은 여린 얼굴이 남심을 자극하는 걸까.
참 알다가도 모를 여자다.
"그럼.. 지금 당대표가 이야기 속 작자겠네요?"
"그렇죠."
덤덤하게 얘기하는 그녀에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세요?"
"..누구한테요?"
"둘 다. 아버지란 작자든, 당대표란 작자든."
순간, 그녀의 눈빛에 나와 똑같은, 거울 속으로 수천번은 보았던 분노가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찰나였지만 난 포착할 수 있었다. 복수심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부모자식은 천륜으로 이어진 인연이라는데.. 어떻게 복수를 하겠어요."
"하여튼.. 정치하는 인간들은 머릿 속이 꽉 막혀있군요. 그러니 이용이나 당하죠."
"..네?"
나의 힐난에 인아가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당황했는지 입만 몇번 뻐끔거리다 이내 나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잘 알 터다.
"..차라리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부정하고 도망치기 바빴는데.."
와인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알싸하고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감칠맛나게 돈다. 가만보면 이 와인이라는게 참 복수의 맛이라하기 딱 좋았다. 첫모금은 독하고 알싸하지만, 그 뒷맛을 치고 올라오는 달콤함이 복수의 쾌감과 아주 잘 어울렸다.
"뭐, 모든 건 시장님 하시기에 달린 거죠. 제가 주제 넘었네요."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니 마음이 조금 편안하네요."
물론 그녀를 대신해서 복수를 해줄 생각은 없다.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도, 부인도 아니니까. 우린 서로 상부상조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
뭐, 상부상조의 격차가 조금 한쪽으로 기울어있긴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내 곁에 있으면 시장, 그 이상으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난 도움이 되는 자는 결코 버리지 않으니까.
순재처럼.
자, 그럼 이제 본게임을 시작해볼까.
그녀의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인지도는 165를 찍고 있었다.
내가 지시한 여성단체 지원금 중단이 여파가 상당히 쎘으니까. 거의 그녀의 인지도는 톱스타에 버금가는 수치였다. 물론 추측이지만.
아직 톱스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시장님, 부탁이 있는데."
"..또 요?"
스테이크를 고운 입술 사이로 넣고 오물오물 예쁘게 씹던 인아가 살짝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젠장, 그런 눈빛 짓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퀘스트 완수는 내 현생의 필수 업이니까.
그리고 인지도 150이상의 여성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 우리 섹스할래요?"
"네, 네..?"
인아가 어여쁜 두 눈동자를 크게 뜨며 충격 받은 듯했는데 이내 암시 때문인지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을 들이켰다.
"저랑.. 그걸 하자구요?"
당혹감에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에 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젠장, 그녀의 과거를 듣지 않았다면 이제껏 늘 그래왔듯 죄책감 따위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대체 왜 물어봐버린 걸까.
그리고 왜 나의 절대적 공식이었던 여성은 생체오나홀이란 공식의 답이 흔들리고 있는 걸까.
과거,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딨다고.
나도 슬프고 분개한 과거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흔들리는 걸까.
인간에게 당했다는 같은 과거?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나보다 더 심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은 친족에게 당한 것이니까.
퀘스트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상처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그녀보다는 퀘스트가 중요하기에 말을 물리진 않았다.
아니면.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녀를 고통스런 기억에서 해방시켜주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
마컨 기회가 남는다면 그녀의 기억을 조작하던지, 아니면 전능한 능력으로 기억의 근원을 없애버리던지.
보상이다.
그녀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아닌, 순재에게 은혜를 갚은 것과 같은 것이다.
복수계획과 퀘스트 완수에 혁혁한 도움이 되고 있는 그녀에게 보상을 내리는 것.
단지그뿐이다.
그렇게 하면 불필요한 이 죄의식이 사라지겠지.
결국 나를 위한 일이다.
생각정리를 마친 난 다소 경직되었지만 대범한 말투로 말했다.
"네, 시장님하고 섹스가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