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성공신화의 시작
그나저나, 마컨 암시로 인아에게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게끔 해놓았으니 이제 그녀의 몸을 취하면 된다. 어떤 부탁이든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아직 인지도가 148이기에 조금 더 때를기다려야한다. 상승세로 보아 조만간 150을 돌파할 듯싶지만.
자신과 잘 어울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 인아가 머리를 넘기며 차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뭐, 다들 그러더군요. 인기가 많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절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죠. 오히려 정반대에요."
"네?"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슬픔 한 웅큼이 엇비쳤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얻고자하는 것을 모두얻을 수 있는 위치에 선 그녀가 짓는 옅은 슬픔이 뜬금없이 내 가슴을 한번 두드린다.
뭐지, 이 여자.
"내가 가진 권력과 돈은 오히려 상대의 눈을 멀게 만들고 허영과 탐욕만 보게끔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같이 날 이용하고픈, 아니면 이용 당하기 위해 꼬리를 흔드는 남자들 뿐이었죠. 그러다 인연이 나타났다 싶으면 내가 가진 권력, 돈이 무서워 도망가버리고…"
갑작스레 이어지는 그녀의 회한 섞인 서글픈 넋두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것을 가진 그녀는 늘 행복할 것만 같았는데, 역시 사람이란 한 길 속을 모르는 종족임이 실감난다.
잠시 마땅한 답을 찾으려 뜸을 들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슬픔을 황급히 주워담아 숨기려는듯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술도 한잔 마시지 않고 주책이네요.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하고픈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역시 작가님다운 말씀이시네요."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사실 오늘 그녀를 만나려한 가장 큰 목적이기도 했다. 투자자 유치 따위는 이미 수연과 소유에게 말해놓았기에 선이까지 합세한 나의 육노예들의 성화에이기지 못한 아비가 투자하겠다며 으름장을 먼저 놓을 것이다.
왜냐면 연예계 진출이후, 급전이 필요해질 상황에 대비해 남은 마컨 횟수를 그에게 사용해놓았었으니 말이다.
그에게 건 마컨은 나의 부탁이 아닌, 가족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 집안의 여자들이 내 육노예가 되어버린 이상, 굳이 그와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일처리엔 무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의 충실한 육노예들에게 바치는 포상이기도 했다.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물주에 나의 육노예들은 하루하루가 행복할 테니까, 큭큭.
그때문에 그녀와의 만남 목적에 투자자 유치는 2순위였고, 1순위는 따로 있었다.
"제가 부탁드린건요?"
인아가 옆에 놓아둔 서류봉투를 집으며 내게 건넸다. 헌데 내가 봉투를 집으려하자 그녀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봉투를 꽉 잡았다.
"이게 바로 공권력 남용입니다. 아시겠어요, 작가님?"
"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장님?"
인아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모르게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다.
미소 속으로 빠져든 달까, 아니면 미소 속에 감춰진 것이 궁금하달까.
여우다, 그것도 타고난 모태여우.
"후훗, 이번 한번만이에요."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그녀에게 건네받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풀어 내용물을 꺼냈다. 가히 50장을 될 법한 A4용지들이었다.
물론 백지가 아닌, 다양한 여성들의 신상정보가 담긴 용지들이었는데 타이틀 별로 구분되어있었다.
바로..
페미니즘사상에 찌든 여성단체들의 타이틀로.
이 50여장의 분량에 상후돔 시에 기거하며 페미니즘 오프라인 단체, 혹은 온라인 단체에 가입된, 그리고 활발히 활동 중인 여성들의 신상정보가 모조리, 그리고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이 50여장의 종이는 바로 나의 새로운 복수계획의 시발점이었다.
그간 빠른 성공으로 하루빨리 페미니즘 단체의 이목을 끌어 남은 두 년들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게끔 만드는 것이 복수계획이었지만, 한 가지 너무나도 큰 사실을 간과해버렸었다.
중요매개체인 '자서전'은 전생에서 찬란한 성공 이후, 즉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나 등장한다.
그 자서전에 적힌 페미니즘 비판 내용이 그녀들의 심기를 건드렸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는데 그것은 곧, 지금으로부터 5년 후에 자서전이 등장해야 그 두 년들이 들러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성공해 자서전에 페미니즘 비판을 담는다한들, 전생보다 5년이나 이른 지금 시점에선 두 년들이 단체를 이끌만한 거목이 되지도 못했을 가능성이상당히 높았기에 만약 자서전을 출간한다해도 두 년들이 얼굴을 드러낼지는 상당히 묘연하다는 점을 불타는 복수심 탓에 간과해버린 것이다.
세나의 경우만 봐도 길바닥에 앉아 농성이나 하고 있던 것을 우연찮게 티비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복수계획을 완전히 새로 잡았다.
그들이 내게 찾아오게끔 만드는 것이 아닌, 내가 그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5년이란 시간을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이 허락치않으니까.
뭐, 쨌든 결과적으로는 큰 맹점을 간과했다하더라도 그 불타는 복수심 덕에 빠른 성공을 이루긴 했으니 후회하고 자책할 일은 아니었다.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모든 세상 일에는 허투로 흘러가는 것이 없기에 빠른 성공은 또다른 지름길을 내게 선사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개잡년들 제발 있어라…!'
"휴.."
인아가 한숨을 쉬며 다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에 결국 나 또한 그녀를 이용하려는 한 인간일 뿐이란 자각이 스쳐갔지만, 상관없다.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내 대업에 이득이 되어주는 존재만 되면 된다.
"작가님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작가님을 돕기 위해 개인신상파일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해가 안 되겠지, 하지만 이해시켜 줄 생각은 없다. 설명해준들 그녀가 받아들일 수도 없을 테니까.
난 서류봉투에 용지를 넣으며 선하게 미소지어주었다. 지금 당장은 충직한 노예에게 해줄 수 있는 주인의 최선어린 칭찬이다.
"뭐, 시장님께서 저를보고 첫눈에 반하신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는 나의 농담에 인아가 제 허벅지를 팍팍 때리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안면근육을 제 멋대로 움직여 웃음에도 이뻐보이다니, 대체 저런 피조물을 낳은 부모의 얼굴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
"호호호! 글을 쓰셔서 그런가 역시 입담이 좋으시네요!"
"좋아해주시니 영광이네요. 아, 그리고 시장님."
"네? 말씀하세요."
내 눈빛에 날카로운 기세가 퍼졌다. 뷔페미즘 단체만 생각하면 욕지기가 솟는 탓이다. 이제 상후돔 시의 대장이 나의 육노예다. 고로, 내 눈길에 거슬리는 것들, 방해되는 것들은 싸그리 치워버릴 터다.
"페미니즘 여성단체에 나가는 지원금 모두 끊으세요. 기존에 지급되던 것까지 모조리 다."
"네, 네?"
나의 급작스런 말에 인아 역시 가인처럼 상체를 튕겨올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난다.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규모 시위라도 벌어지겠죠."
인간은 특히나 줬다 뺐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애시당초 주지를 않으면 그러려니 할텐데, 얻음으로써 느낀 행복이 100이라면 뺏길 때의 좌절감은 오히려 마이너스로 치닫아버린다.
그렇기에 뷔페미즘 쿵쾅이들은 단체 운영금, 지원금이 모두 끊기면 거리로 다시금 뛰쳐나올 것이고 잠시 소강상태인 집회분위기는 다시 가열될 것이다.
만약 이 신상명단 안에 두 년들이 모두 있으면 좋겠지만, 없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도 가미된 것이고.
당시 단체장이었던 년은 아마도 이 신상파일에 있을 확률이 높지만 나머지 년은 없을 확률이 높았기에 뷔페미즘녀들을 거리로 끌어모아 직접 찾아다닐 계획이다.
세나도 집회현장에서 우연찮게 봤던 것이니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겠지.
"여성 단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리고 그건 저도 당대표님하고 얘기를 해봐야…"
"그래서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인아의 난처한 기색에 자꾸만 괴롭히고 싶은 생각만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곳, 상후돔 시의 최고권력자가 나의 말 한 마디에 쩔쩔매는 모습에 희열과 색다른 쾌감이 느껴졌다. 어느 누가 시장을 이렇게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대통령이나, 하다못해 당대표는 되어야겠지.
결국 지금 나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과 마찬가지다. 흐음, 이게 권력의 맛인가. 제법 맛있긴 하네.
"여성시장이 여성단체를 배척하면 제 입지가 너무 좁아질 것 같아서.."
"여성들에겐 입지가 좁아질지 모르더라도 남성들에겐 입지가 확장이 될 텐데요. 결국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유명세는 더욱 오르시겠네요. 이슈몰이론 충분할 테니까. 그리고 각 방송국에 연락해서 지원금 차단 단체가 모두 뷔페미즘에 찌든 단체라는 것을 강조해달라고 하세요. 그럼 여성 중에서도 깨어있는 사람은 오히려 시장님께 환호하게 될 겁니다."
"그런가요.."
어느새 인아는 나의 말에 수긍의사를 비치며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인터넷 상에도 극단적인 뷔페미즘으로 오히려 같은 여성들을 폄하시킨다며 뷔페미즘 단체들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가설이긴 하지만, 완전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
난 그녀가 정신차리기도 전에 쉴 새없이 퍼부었다. 이번엔 투자 건이다.
"그럼요. 아, 그리고 제가 지금 네오 스튜디오에서 쓴 시나리오로 30부작 정도로 미니드라마를 제작하려는데 자본금이 부족하다네요. 여성단체에 끊은 지원금, 운영금을 네오 스튜디오에 차명계좌로 투자 좀 해주세요. 투자인은 굳이 시장님이 되지 않아도 되니 필요하시면 지인이나 친인척 명의를 빌리시구요."
"네, 넷..?"
인아의 동공이 다시금 확장된다. 큭큭, 철혈의 영애처럼 냉철하고 고귀하던 그녀의 얼굴이 나의 말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에 마치 중세시대 대귀족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기세를 몰아 나도 정계로 진출해볼까.'
사실상 나의 마컨 능력으로 대통령까지 올라가긴 힘들 것이다. 얼마 전에 치뤄진 선거에서 1등을 차지해 당선이 된 대통령의 득표수는 자그마치 1,300만 표.
결국 1,300만의 마음을 홀려야한다는 것인데, 마인드컨트롤을 1,300만번 사용하기 위해선 650만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54만년이 필요하단 얘기.
물론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어느 정도 당선표가 들어올 것이기에 54만년은 다소 허무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지금의 마인드컨트롤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는 것.
뭐..
생각해둔 계획이 있긴하지만, 그 계획은 복수가 완전히 완성이 된 후에야 다시 고려해볼 것이기에 우선 넘겨버리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복수에 치중해야하니까. 그리고 벌써 대통령은 무슨, 김칫국도 유분수지. 끓기도 전에 처마실 생각부터 하는 꼴이라니.
"어차피 여성단체에 모든 지원을 끊으면 돈이 막대하게 남을 텐데, 그 돈으로 네오 스튜디오에 투자하시던 아니면 개인 돈으로 투자하시던 상관은 없습니다."
"가, 갑자기 투자요?"
"대박날 겁니다. 투자금 회수에 수익까지 확실히 보장해드리죠."
어차피 암시 탓에 그녀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암시가 풀리기 전까지 그녀는 나의 충직한 노예일 뿐이니까.
물론 내가 하는 짓도 여성 단체 못지않게 쓰레기 짓이라는걸 알고 있다. 결국은 공금횡령이고, 남는 세금은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 옳은 일이니까.
하지만 늘 얘기했듯, 난 성인군자처럼 청렴결백한 삶을 살기 위해 이제껏 올라온 것이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일 뿐.
결국 뷔페미즘의 썩어빠진 단체들에 들어가는 헛돈을 빼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박드라마를 만들어 국민들에겐 즐거움을, 내겐 성공길을 선사하는 것이고.
그옛날 홍길동이 부패관료들이 부정하게 모은 금은보화를 털어와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기네들 생일파티에 공금을 쓰고, 품위유지비니 특수활동비 따위 같은 어처구니 없는 명목으로 공금을 사유재산처럼 부리는 그 악덕관료들의 돈을 다시 걷어와 공중증발해버릴 돈으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니까.
전생의 기억으로 지금 제작하려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45퍼센트까지 나왔었다. 다양성이 판치는 현 드라마 시장에서 나올 수 없는 수치였고, 그것은 곧 국민의 절반이 드라마로 인생의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뭐, 결국은 나의 자기합리화지만 적어도 악덕관료놈들의 사유재산으로 소리소문없이 증발해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당연히 남성단체들도 똑같은 짓거리를 할 테지만 그들은 나의 복수대상이 아니기에 신경쓰지 않을 뿐이다.
만약 남성단체가 나를 공격했었다면 응당, 남성단체들을 족쳐버렸겠지.
인아가 고운 목선의 울대를 꿀꺽, 움직이곤 조심스레 물었다.
"투자금액은요…?"
"그건 추후에 네오 스튜디오 대표와 조율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연락처가 없네요."
내가 휴대폰을 내밀자 그녀가 번호를 찍어주었다. 다시 휴대폰을 받아든 난 자켓 속주머니에 넣었다.
"제 연락처는 뭐, 아실 테고."
이제 그녀에게 볼 일은 모두 끝났다.
뷔페미즘 활동인원의 신상파일과 뷔페미즘 단체의 공격, 그리고 투자금액 유치까지.
하루만의 만남으로도 이렇게 쏙쏙 빼먹을게 많은 여자라니, 그녀는 곁에 두고두고 천천히 써먹어야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피타이저로 젖가슴 촉감이라도 한번 느껴봐야지 않겠는가.
자주 볼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시장님이라 불리는 권력의 여자의 젖가슴 촉감은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고.
가까이서보니 왠지모르게 서글픈 저 눈빛이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개색기 이선생이 이 기회를 놓치면 섭할 테지.
자리에서 일어선 난 의뭉스레 쳐다보는 인아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의 뒤에 섰다. 이런 일(?)을 대비해 룸식 카페에 왔기 때문에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장님?"
"네…?"
"가슴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