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사내의 정체
-퍼억!
"으윽.."
-퍽!
"윽!"
-쿠덩텅.
"으악!"
몽롱한 내 정신머리 사이로 남정네들의 비명소리와 물건이 박살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뭐지, 기절한 건 맞는데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니면 진짜 요단강은 건넜고, 이 전능한 시스템을 가지고도 바보 같이 죽어 온 회귀자들이 한데 모여 시스템 전이자에게 처맞고 있는 걸까?
흐음, 우선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현실감각 없이 희미한 정신은 자꾸만뭔가에 잠식되어가는 것 같다. 두개골 가격으로 기절한 것은 전생, 현생 통틀어 처음이니 이 몽환적이면서도 지끈대는 기분이 낯설다.
으음, 조금 더 누워있을까.
일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요단강을 건넌 것 같지는 않고.
얼음장 같은 길바닥과 케케묵은 냄새가 콧털을 간질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쓰러진 곳이 맞는데.
-퍼억!
"크윽!"
근데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람.
아직 기절한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아 일단 눈을 감고 계속기절해있는 척을 했다. 기절한 놈을 설마 건드리겠어?
'으으읍!'
일부러 건드린 건 아니겠지만, 갑작스레 내 몸을 덮치는 무언가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큼큼한 냄새와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게 느낌이 싸해 실눈을 떠보니 왠 남정네 하나가 내 몸 위에 엎어져있다.
'음, 무리에 있던 새낀 거 같은데.'
놈은 눈을 까뒤집은 채 볼품없게 내 배 위에 쓰러져있었고 황급히 다시 눈을 감았다.
-퍼억!
"크윽! 너 이 씹새끼 뭐하는 새끼냐!!"
철수 놈 목소리다. 뭐하는 '새끼'냐고 단칭으로 묻는 것을 보니 혈혈단신의 사내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모양인데, 정체가 궁금해 실눈을 떠보자 온통 거무튀튀한 사내가 남은 세 명의 놈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체격도 그리 크지 않았고 키도 175센치 쯤 되어보이는, 보통 체격의 사내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이라 어둡기도 했고, 검은 모자에 마스크까지 둘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슈욱! 퍼억!
하지만 평범한 차림새와는 달리 주먹은 진짜 마이크 타이슨이 재림한듯 날쎄고 정확했다. 거기다 춤을 추는 듯한 발놀림까지.
"크윽! 가, 강하다!"
"젠장! 한 대도 못 맞추겠어!"
".…"
목소리도 내지 않는 걸로보아 정체를 철저히 숨기는 듯했는데, 어쨌든 덕분에 이 절체절명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아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도 조직 간의 분쟁이거나 철수 저 막되처먹은 새끼에게 복수하러 온 놈이겠지. 뭐가됐든 이 추접스런 무리들만 처리해주면 땡큐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를 또 도와주시는군요.'
-퍼어억!
"크악!"
-퍽!
"크윽! 어, 어디 조직 놈이냐고!"
흠..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전쟁터에서 죽은 척하는 패잔병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스릴 넘치면서도 긴장되는, 그리고 아찔함까지 느껴지는게 묘한 기분이다.
기척 상으로보아 이제 한 놈 남은 듯했다.
꼴에 형님이랍시고 가장 뒤에 빠져있던 철수 놈이겠지.
"씨발.. 대체 누구냐고!!"
놈의 절규어린 물음에도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현상수배범이라도 되는 건가? 난 기회를 엿보다 도망가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내 몸 위에 엎어져있는 이 쪼다새끼 때문에 움직임이 마땅치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체를 저리도 숨기는 것을 보면 목격자의 등장을 썩 달갑게 보진 않을 것이다. 적의 적은 동지라지만, 한쪽 적이 무너지면 동지는 다시 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고로, 이 무리들을 고이 쓰러뜨리고 쿨하게 퇴장해주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이 씨바아알!! 답하기 싫으면 내가 벗겨주마!! 우리 흑호파의 무서움을 보여주지! 뒤져라!!"
-쉬욱! 퍼억!
-털썩...
아구창을 제대로 맞은 건지 중2병 대사를 날리며 돌진하던 철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듯했다. 실눈을 뜨자 검은 사내는 무릎꿇은 채 파도에 흔들리는 미역처럼 흐느적대는 놈의 머리채를 잡고 안면에다 냅다 니킥을 꽂아버린다.
-빠각!
강냉이가 우수수 털리는 소리와 함께 철수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쿠웅! 거구의 덩치가 고꾸라지니, 땅바닥이 한번 진동한다. 그때, 한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듯 터져나왔다.
서연이었다.
둔기 같은 것을 든 듯했는데, 남자의 촉으로보아 절대 저 가녀린 팔목으로 사내의 털끝하나 건들지 못할 것이다. 나의 간절한 바람은 서연이 기적적으로 둔기로 사내의 머리를 내려쳐 기절시키는 것이다.
여성 하나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에 내 시스템도 걸 수 있다.
'쯧쯧. 얼굴이나 좀 아끼지. 촬영해야하는데.'
"꺄아앗! 이 개새끼야! 너 뭐얏!! 저리 꺼져!"
-쉬육. 퍼억.
-풀썩...
사내는여성 또한 같은 인간이라는 만인만성 평등사상에 철저히 입각한 굉장히 올바른 신념을 가졌는지 서연의 아구창에도 냅다 주먹을 날려 그녀를 기절시켜버렸다.
간결하고도 확실한, 그리고 묵직한 한방이었다. 주먹마다 싣는 체중이보통 파이터가 아닌 듯싶었다.
그나저나 내 첫 웹드라마의 신인배우인데 얼굴은 때리지 말지. 귀한 얼굴 상해서 어쩌나, 분수를 모르고 까불었으니 처맞는 건 맞다만.
당장 촬영 들어가긴 힘들겠군.
내일 가인에겐 알아서 둘러대겠지.
-쿵.
서연은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를 끝으로 상황은 정리되었다. 대체 뭐하는 자일까, 조폭조무사 놈들이라곤 해도 장정 열 명을 단숨에 쓰러뜨리다니.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뭐, 나완 상관없는 사람일 터이니 우선 다시 눈을 편안히 감았다. 놈이 가고 나면 이 케케묵은 골목을 어서 벗어날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내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고야만다. 오늘 하루, 참 빡세네.
'이 씨발, 이 씨발. 오지마.오지마라고.'
사내가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벅대는 사내의 발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소리같아 눈이 절로질끈 감긴다. 기어코 근처로 다가온 사내는 잠시 멈춰섰다.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뛰면 '리쓴투마하뜨빗'하며 가슴팍이 펌핑질을 해댈 판이다.
하지만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숨이 거칠어진다.
'뭐지? 왜, 왜 날 쳐다보는 건데!'
젠장, 보는 눈도 없으니 마컨 횟수만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곧바로 눈을 마주쳐 정신지배를 해버리겠건만 하루 2회라는 제약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그렇게 잠시간 나의 근처에서 멈춰있던 사내가 대뜸 몸을 낮추더니 내 몸 위에 엎어져있던 사내를 치워버렸다.
으읍, 순간 놀래 소리를 낼 뻔했지만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수상자도 울고갈 연기력으로 최대한 자연스레 몸을 뉘인 채 눈을 편안히 감은 상태를유지했다. 호흡이 살짝 작위적으로 변했지만, 이미 돌이킬 순 없었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뭐지? 대체 누구야.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암살자? 크흠.. 그건 아닐 거고.
아니면 미드 덱스터 같은 살인마 잡는 미치광이 살인마인가? 한드로 패치하자면 조폭 잡는 싸이코 조폭? 하지만 그렇다해도 내게 관심 가질 만한 건덕지가 없는데?
차라리 저 미모의 진서연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는게 고추달린 인간으로써 강호의 도리가 아닌가? 강간, 음.. 내 복수녀를 내가 아닌 사람이 강간해선 안 되지.
젠장, 그니까 제발 그냥 가라고!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직감했다.
사내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으니까. 피식, 세어나오는 숨이 애써 외면하려는 나를 비웃는 듯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밖에 없다. 이래도 처맞고, 저래도 처맞으면, 뭐라도 하고 처맞는게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호, 혹시 스텟 초기화는…? 남은 인생 절반 까고 해주면 안 되냐?'
[ ..죄송합니다. ]
'..나쁜 년.'
들숨을 가늘게 들이킨 난, 곧장 눈을 부릅뜨며 사내의 다리를 걷어차려했다. 급습에 사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곧바로 36계 줄행랑을 치리라. 이 골목만 벗어나면 바로 사람들이 거니는 길거리가 나오니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쪽팔리긴해도 여기서 비명횡사하는 것보단 낫겠지.
만약 여의치 않으면 여관 쪽으로 도망가고.
뭐, 소란을 듣고 이미 문을 걸어잠궜는지도 모르겠지만.
쳇, 모 아니면 도다.
'하나.. 둘.. 세…?'
그런데, 그순간 고요한 골목길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킥킥, 에라이 병신아. 실눈뜬 거 모를 줄 알았냐? 이 븅딱쉐이야?"
킬킬대는 역겨운 웃음으로 시작하는 사내의 말에 오늘 뜬금없이 등장한 싸이코패스 살인마에게 뒤지는구나 싶었다. 아아, 좋은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진짜 가게 생겼군요.
이럴거면 희망이라도 주지 말지.
장정 열 명을 한 주먹에 한 놈씩 쓰러뜨린 인간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차라리 죽이시옵소서.
자포자기한듯 누워있는 내게 사내는 이젠 대놓고 작대기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비아냥댔다.
"에라이. 쪼다새끼야. 어떤 놈이 처맞고 있나 했더니 니놈일 줄이야, 큭큭큭. 야. 일어나. 븃신아. 닌 내만 때릴 수 있다는 거 까먹었냐."
그런데.. 낯이 익은 목소리, 그보다 더 낯익은 구수한 말투가 희끄무리했던 나의 짙은 암영 속에 하나의 얼굴을 그려냈다.
반갑고도, 고마운 그 얼굴.
난 휘둥그레 눈을 뜨곤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소리쳤다.
"수, 순재?!!"
"풋, 살아있네."
사내는 내 물음에 피식, 조롱하듯 웃으며 마스크를 턱밑으로 끌어내렸다. 익숙한 얼굴, 반가운 얼굴, 진짜 순재였다. 순재는 내 놀란 표정을 벌레보듯 쳐다보며 계속 킥킥 웃어댔다.
마치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도 놈은 중딩들에게 얻어 맞고 있는 나를 구해주곤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말투로 내게 면박을 주었었다.
"큭큭. 에라이 쪼다등신아. 내가 얘기했제. 니는 내만 괴롭힐 수 있다고. 어데 이 순재 행님 허락도 없이 처맞고 댕기노. 대가리는 괜찮나."
순재는 내게 손을 건넸고, 난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폭력으로 가열된 주먹이 손난로보다 따뜻하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자 뒤통수에서 쎄한 통증과 함께 현기증이 일어났다.
"으윽."
"가지가지한다."
순재는 그런 나의 비틀대는 모습을 보곤 오히려 비아냥댔다. 참, 변함없는 놈이다. 순재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다시 깔끔하게 쓸어넘긴 후 다시 착모했다. 그러곤 마치 엄마처럼 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댔다.
잔소리 같았다.
먼지를 터는 건지..
나를 터는 건진 모르겠지만.
-팍팍팍팍퍽!
"아, 아! 아프다!"
-팍팍팍퍽!
"가만 있으라! 이런 놈들한테 처맞고나 다니고. 쯧쯧. 하여튼 니는 내 아니믄 안 되는기라. 운동을 좀 시켜야되나. 하긴 닌 평생 글이나 쓰사가꼬 지금 운동해도 유치원생도 못 이길기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치 어젯밤에도 같이 한잔했던 것처럼 아무 일 없이 나타난 놈은 평상시 나를 대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익살스럽고도 밉지 않은 허풍 가득한 그 모습.
"야.."
"뭐, 낯간지럽구로 고맙다 같은 말하믄 여기 같이 눕히뿐다. 고마움은 물질로 갚는다켔다. 일단 가자."
"어, 어. 그래. 근데 어디로."
"쉐끼, 따라와보믄 안다~ 늘 가던 곳 있다. 오랜만에 찐하게 한잔해야지? 이 쒸빠라?"
"그, 그래."
순재는 나를 떠밀었고 우린 골목길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골목길에 열 댓명의 사람을 눕힌 채로 말이다. 저러다 동사하면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 순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하곤 여관에서 물바가지를 받아와 그나마 깨어날 기척을 보이는 놈에게 끼얹었다.
"어푸어푸푸!!"
놈이 싱싱한 고등어처럼 펄떡댄다. 난 순재에게 윙크를 날렸다. 우리만의 수신호였다.
놈에게 다가간 난 허우적대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고정시킨 후, 놈에게 뇌까렸다. 중저음이다못해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까리한 목소리로.
"한번만 더 깝치면 뒤진다잉. 그리고 여기 쓰러진 놈들 알아서 잘 챙겨라."
"네, 네넵."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이 내가 자신을 쓰러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피식, 자리에서 일어선 난 순재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물론 돌아오는 것은 순재의 비아냥뿐이었다.
"에라이, 쪼다야. 그게 그렇게 하고 싶더냐?"
"어차피 너도 정체 숨기는 것 같고, 그리고 저 놈들 저래 놔뒀다 죽으면 뒷일 감당 안 될 텐데, 뒷처리 해준 거 아니냐."
"쉐끼, 역시 대졸자답네."
그때도 얘기했지만..
난 고졸인데..
"퍼뜩 온나. 할 얘기도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