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새 히로인 진서연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개인작업실에서 외로이 작업하다보니 식사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고민하던 찰나에 가인이 오늘은 같이 밥 먹자며 나를 이끌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어디 가는 거에요?"
"엄청 맛있는 곳 있어요. 첫 출근인데 어디 도망가시지 않게 저만 아는 단골 맛집으로 모시고 갈려고요."
도망은 무슨.
새로운 맛집을 놔두고 어딜 도망 가?
거기다 대충 사무실을 훑어보니 죄다 여직원 밖에 없는 것 같던데, 가만.. 알고 보면 씹페미소굴에 들어온 거 아냐?
그럼 씹소름인데..
젠장, 불길한 낌새는 꼭 틀리는 법이 없는데. 우선 조심하자고. 만약 씹페미소굴이면 보스몹이 이 흑표범이 되려나.
따먹기 전에 사상검증이 꼭 필요하겠군.
도보로 5분 정도를 걷자 건물과 건물사이로 작은 골목이 나왔다. 좁은 골목이었는데, 가인은 거침없이 그 골목의 끝자락까지 걸어갔다.
그 끝엔 맛집 포스 제대로 풍기는 허름한 식당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윤식당이었는데, 뭐 티비에 나오는 그곳은 아닐 거고. 어쨌든 맛집 포스가 제대로 풍기긴 한다.
"들어오세요. 가정백반집인데 마음에 드실 거에요. 전 일 년째 이곳에서 매일 점심 먹고 있거든요."
아무리 맛있다해도 일 년365일 매일 먹으면 물릴 만도 하건만, 독한 여자인 듯싶다. 아니면 주인장이 음식에 마약이라도 탔거나.
기사를 보니 중국 어느 음식점에선 단골 만들려고 음식에다 양귀비를 넣었다던데, 여긴 한국이니 그런 일은 없겠지.
고로, 존나 맛있나보다.
뭐, 아무렴 여성육체보다야 맛이 있겠냐만은.
가게 안은 바깥처럼 허름했다. 벽지엔 여느 맛집처럼 검은색 볼펜으로 갖가지 글귀들이 적혀 있었고, 식탁도 아담하기 그지없는데다 서로 수근거리며 대화해야할 정도로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그런데 구석 테이블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손인사를 하는 여성이 있었다.
"여기에요."
진서연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부딪히는 거야?
"어, 주문 다 해놨어?"
"넵. 늘 드시던 걸로 두 개 주문했어요."
"오늘은 철수 씨도 있네?"
그런데 서연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사내였는데, 앞자리를 비워두고 굳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으로보아 서연의 남자친구이거나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근데,낯이 익은데?
"혹시 저희 구면인가요?"
자리에 앉으며 철수에게 얘기하자 그는 생판 처음보는 듯한 시선으로 반문했다.
"초면인 것 같은데.. 본 적이 있나요?"
흐음, 뭐지. 낯이 익단 말이지.
아.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가던 기억 속 중 한 장면이 캡쳐되어 시야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장면에 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확장된 동공에 맹렬한 노기가 담겼다.
'..이 씨발놈도 요기잉네?'
전생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내 앞에 대뜸 나타나 내가 그녀를 꼬시고 성폭행했다며, 자신은 10년간 교제해온 남친이라며 잔혹하게 나를 폭행한 새끼였다.
푸근한 인상과 달리 주먹에 너클을 찬 듯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그의 주먹이 온 몸에 각인된듯 닭살이 돋아났다.
'오, 신이시여. 이 개씨발년놈들을 한꺼번에 보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가인이 철수에게 나를 소개했고, 그는 나의 화려한 데뷔에 박수를 치며 놀라했다. 그옆의 서연은 오전의 능욕 때문인지 표정이 어두웠다.
물론 그 시무룩한 표정은 오히려 철수에게 오전에 니놈 여친 입보지 맛 잘 봤다며, 좆물까지 먹어서 배부를 거라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뿐이지만.
"아, 그 거물신인작가 분이시구나!"
"네."
"하하! 영광이네요. 저는 서연이 매니저입니다. 아니 대표님은 어떻게 이런 분을 스카웃 하셨대요?"
"작가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주신 거지."
"크, 역시 대표님 말씀이 아주 겸손하십니다."
그뒤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콧구녕으로 들어갔는지 귓구녕으로 들어갔는지를 모르겠다. 연신 서슬퍼런 기세로 철수 새끼에게 신경쓰느라 말이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건 무슨 조합이지?
메이저 제작사 대표와 겸상하는 일개 직원이라니, 일반 회사라면 상상하기 힘든 밥상머리인데.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난 납득할 수 있었다.
"앗, 언니가 주문한 거 먼저 나왔어요."
"씁."
그런데 가인이 얇게 숨을 들이키며 서연을 책하는 노한 눈빛을 보냈다. 서연은 그 눈빛에 범 앞에 놓인 가련한 개새끼마냥 쑤그러들었는데, 난 그녀의 찌푸린 미간이 관능적으로 보여 침을 꼴딱 삼키고 말았다.
눈빛만으로도 싸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색기 가득찬 여왕이 있다면 딱 그녀와 같겠지.
"죄송합니다. 대표님."
"내가 근무시간에는 언니라 부르지 말랬지 않니?처음 말하는 건가?"
"아, 아닙니닷.."
"으유, 서연아. 좀."
철수가 분위기를 풀기 위함인지 팔꿈치로 익살스레 서연의 옆구리를 찌르자 서로 투닥댄다. 그나저나 언니면, 설마 나의 육노예 자매들처럼 친자매 사이인가?
"자매 사이세요?"
"아뇨. 사촌동생이에요. 철 없는."
"힝.."
사촌이구나, 다행이군. 저 씨버러지년과 친 자매 사이였다면 관능미 폭발하는 가인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조금 바뀌었을 텐데 말이다.
'다행이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왔고 우린빠르게 식사를 시작했다. 나와 가인의 경우엔 규율에서 다소 자유롭지만 앞의 두 년놈들은 점심시간을 칼 같이 지켜야 하는지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먼저 식사를 마친 철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구의 떡대만큼이나 식사 속도가 푸드파이터급이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응, 그래."
새끼, 나한텐 대화는 주먹으로 하는 것이라며 무자비하게 폭행하던 놈이 상사랍시고 깍듯하게 대한다.
흠, 그나저나 지금이 기회겠는데? 식사를 완전 마치진 않았지만 어차피 배떼지야 밥으로 채우는 것보다 철수새끼를 괴롭히는 것이 더욱 포만감이 생길 터다.
수저를 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화장실 좀."
"그래요."
철수의 뒤를 미행하듯 따라붙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놈이 세 개의 소변기 중에 끄트머리에서 소변을 누고 있다. 원래 상도덕이라면 한칸을 띄우고 소변을 보는것이 남자들의 국룰이지만, 난 가운데 칸에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철수란 이름은 알지만 성을알 길이 없다.
고로, 감사하게도각성하신 마컨의 능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왼손으로 곧휴를 잡은 채 핑거스냅을 칠 준비를 했다.
"철수 씨, 제 눈 좀 봐주실래요?"
"네? 갑자기 무슨.."
인간이란 본래 당황하면 상대를 보게 되기 마련이다. 철수는 내 눈을 바라봤고 딱, 마컨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길게 끌 것 없다.
"넌 앞으로 나한테 맞으면 그 고통이 5배는 크게 느껴지고 서연을 내게 성상납해주고 싶게 돼. 그리고 내 몸엔 손가락도 하나도 까딱하지 못해. 물론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알겠냐?"
"네."
큭큭, 저열한 미소가 나왔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순위를 나타내는 맥길 통증 어휘표(Mc Gill pain index)를 인용하면 타박상의 고통 순위가 10위이다. 일반적으로 단순 폭행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10위란 소리다.
난 그것의 다섯 배에 달하는 고통을 지금 철수에게 암시로 걸어놓았다. 내겐 전능하신 육체조작의 능력이 있으니까.
그럼 10위의 고통 순위를 1이란 수치로 잡았을 때, 다섯 배의 수치는 5위, 즉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
결국 철수 이 호로썅놈의 새끼는 내가 단순히 때리기만해도 매번 출산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10배로 암시를 걸어 지표상 1위인 극악의 작열의 고통을 주어도 되지만 그랬다간 가녀린 인간의 육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적당히(?) 다섯 배만 걸어놓은 것이다.
쉽게 피폐해져버린다면 재미없을 테니까.
-딱.
핑거스냅으로 마컨을 해제시켰다. 같은 고추 달린 것을 갖고 놀 껀덕지도, 이유도, 흥미도 없다. 본 게임은 마컨이 풀렸을 때부터니까. 그리고 암시의 효과는 마컨 상태에선 발현되지 않으니 말이다.
-쪼르르르..
먼저 소변을 털어낸 난 아직 싸고 있는 철수를 뒤로 하고 화장실 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워낙 손님도 적다보니 화장실로 들어오려는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끼익.
-턱.
"철수."
존칭이 사라진 나의 부름에 철수는 적대감을 살며시 얹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이도 어린 놈이 하대했으니 아니꼬울 수밖에 없겠지, 큭큭.
"네? 방금 저 불렀습니까?"
"그럼 여기에 철수가 너 말고 또 있나?"
"이게 미쳤나. 거물신인이라 우대 좀 해줬더니 눈에 뵈는게 없냐? 어?!"
"풋, 한 대치기라도 하겄소다?"
나의 뜬금없는 도발에 철수가 어안벙벙한듯 나를 노려보다 바지를 추스르며 욕을 내뱉었다.
"이 개새끼가 진짜 돌았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미쳤냐? 아니면 뭐, 너도 서연이 좋아하냐? 그래서 배알이 꼴리냐?"
철수 입장에선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초면인 사이에 이렇다할 시비의 껀덕지도 없는데 대뜸 나이도 어린 놈이 시비를 거니 말이다.
하지만 늘 하는 얘기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설명해준다한들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내가 7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이나 하겠지. 그리고 나에겐 지금의 현생이 영화와 같은 이야기지만, 그들에겐 그저 현실일 뿐이기에 아무리 이해시키려해도 내 주둥이만 아플 뿐이다.
고로,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땐 폭력이 답임을 그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그의 방식대로.
"이유는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니까."
분노에 두 주먹을 파르르 떨며 철수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 짐승 같은 눈빛에 전생의 일들이 떠오른다. 좋아, 덕분에 복수심이 불타오르는군.
"시나리오 쓰고 있네. 이 미친 새끼가."
음,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같은데, 근데 그 대사는 주인공이 했었던 거 같은데 역할이 바껴버렸군.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으로 귀지를 파내 놈 쪽으로 후불었다.
"후~ 시나리오는 쓰고 있지."
"미친 새끼. 시나리오 쓰더니 완전 맛탱이가 가버렸구만?"
그가 영화대사를 날려주었으니 나도 영화 대사로 응수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다. 난 스타일리쉬 액션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며 몸을 돌려 화장실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걸쇠 두 개에 손잡이 자물쇠 하나.
배경은 다르지만 영화 속 상황과 딱 맞아떨어짐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이런 말이 있지. 신사들의 세계에선."
"뭐라는 거야. 정신병자새끼가."
제일 윗 걸쇠를 잠궜다.
-철컥.
"매너가."
중간 걸쇠를 잠군다.
-끼릭.
"사람을."
마지막, 문 손잡이 걸쇠를 잠근다.
"만든다."
-철컥.
몸을 돌린 나는 황망히 나를 쳐다보는 철수새끼를 노려보았다. 영화 속에선 장소가 멋진 술집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이곳 누추한 화장실을 참교육의 장소로 정하기로 했다.
어디 데리고갈 수도 없고.
"미, 미친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냐? 안 되겠다. 오늘 좀 맞자."
문을 잠궈버리는 나의 도발적인 행동에 잠시 주춤하던 철수가 으르렁대며 돌연 내게 다가왔다. 말로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음을 인지한 것이다.
선빵필승.
고만고만하게 주먹 좀 쓴다는 놈들 사이에선 승리의 불문율이 아니던가,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생의 타격감으로보아 주먹은 좀 쓰는 듯했다.
많이 맞아본 자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자면 말이다.
놈은 선빵필승을 위해 큼지막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곧장, 내 얼굴을 향해 휘두르려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일말의 후퇴도 없이 놈을 그대로 응시했다. 약간의 비웃음을 입꼬리에 건 채로.
"이 개새끼가…! 확! 씨! 어?! 처 맞을려고! 어? 확! 씨! 돌려차기! 씌바! 엘보, 니킥! 팍씨!"
경박스레 겁박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놈은 절대 내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기에 연신 주먹으로 가격하려는 시늉과 촐싹맞게 발차기를 하려는 시늉만 오질나게 해댄다.
마치 어디 재미 없는 슬랩스틱 코미디 프로그램마냥 말이다.
큭큭.
남자새끼를 가지고 노는 건처음인데, 재밌으려나.
몸을 놈에게 당겨가 가볍게 복부 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누군가를 때린다는 일은 내게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지만 다행히 주먹은 아래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놈의 복부에 꽂혔다.
-퍼억.
"끄어어어억!! 으아아아애애악-!!!"
온 힘을 다한 것도 아니지만 나의 가벼운 주먹질에 놈은 복부를 감싸안은 채 화장실 타일 바닥이 제 집 안방인냥 굴러다닌다.
크으.
등줄기에 극도의 전율이 일어났다. 어깨선에 배치된 오페라 교향악단이 감동과 전율의 교향곡을 내 귓가에다 연주하는 기분이다.
'죽이는데…!'
난 항상 약자였었다.
성공한 이후에 나를 우러러보는 이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모나지 못한 심성에 약했던 깡으로 내게 시샘과 질투로 툭툭 자존심을 건들던 남성들에게 찍소리도 내지 못했었다.
일부러 어깨를 치고 가도 되레 내가 죄송하다했었고,특히나 학창시절엔 순재를 만나기 전까지 갖은 괴롭힘과 모욕을 당했었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분위기가 음울하다는 이유 등등.
갖은 이유를 갖다부쳐 나를 괴롭혔었는데, 그 오랜 멸시와 모욕에 비하면 철수 놈은 단 한번의 폭행을 내게 선사했었기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쨋든 내 인생을 유린한 년과 붙어먹은 데다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심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던 놈이기에 극한의 희열감이 터져나왔다.
그간 나를 괴롭혔었던 인간들의 면상이 놈의 얼굴에 오버랩되어 스쳐간다.
안 되겠다.
오늘 좀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