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모녀 덮밥 타임
"누구시죠?"
명함을 받아들며 묻곤 명함에새겨진 글자를 읽어보았다.
"네오 스튜디오…?"
"영화, 드라마 제작사에요. 나름 메이저급이라고 자부할 수 있죠."
"근데 저를 왜?"
여성이 선글라스를 벗어 코트 윗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난 속으로 탄복했다. 짙은 검정 눈썹과 날렵한 눈매, 그리고 살짝 짙은 레드립까지.
동물로 따지자면 재규어의 날카롭고 맹수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여성이다. 난생처음 보는 분위기다.
대체 이런 미녀들은 어디서 나타나는 거야? 마치 회전초밥집처럼 한명의 미인이 지나가니 또 한명의 미인이 나타나는군.
거기다 회전초밥집답게 다양한 분위기의 여성들이 내 애장 욕구를 건든다. 오늘만해도 세 명의 각기다른 여성이 내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청순가련 아이돌 아린과 고고한 시장 박인아, 게다가 이 재규어 같은 야성미를 가진 여성까지.
마치 포켓몬 게임마냥 내 앞길마다 여성들이 배치되어있는 느낌이다. 얼른 따먹으라며 말이다.
그녀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네오 스튜디오 대표 김가인이라고 해요."
자존감이 모공까지 차오른 난 떨떠름히 그녀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김가인이라,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네.
"네.. 뭐, 아시겠지만 저는 이강한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강한 씨를 저희 제작사에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훅들어오는 스카웃 제의에 내심 놀랬다.
수상하자마자 영화, 드라마 제작사에서 내게 스카웃 제의를 할 줄이야, 전생에선 신인상 이후 명성을 조금 얻긴 했었지만 스카웃 제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뒤에도 제작사들에 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투고하다가 하나가 발탁이 되었고, 그 하나가 천만 관객이라는 역대급 흥행 영화가 되었기에 난 그제야 나름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었었다.
게다가 제작사들이 시나리오 작가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다.
매번 쓰는 것마다 히트작을 내는 스타작가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시나리오 작가들은 나처럼 원고를 투고해 그것이 선정되면계약금을 받고, 거기에 흥행 여부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 일종의 프리랜서면서, 계약직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그것도 메이저급이라는 제작사가 직접 스카웃 제의를 한 것은 어찌보면 어불성설이기도 했다.
문학인들에게 인정 받은 것이지, 또 대중들의 눈은 확실히 다르니까. 아니, 오히려 문학인들에게 인정받은 작가들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도 깊은 내용과 철학을 담으려다보니 가볍게 즐기고픈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렇기에 신인상과 대상의 동시수상이 파격적인 일임은 알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스카웃 제의를 하는 것은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대체 뭘 믿고?
하지만 저 강단있는 표정과 야성미가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는 무모함이라기보단 도전정신이 깊이 새겨져있는 듯했다.
선견지명이라도 있는 걸까?
내 머릿 속에 천만 관객 영화의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가인이 다시 치고 들어왔다.
"연봉은 업계 최고로 드릴 수 있습니다. 인센티브를 제외한 순수연봉만요."
순수 연봉이라.
보통 스타작가들의 연봉이 10억임을 감안한다면 최소 10억은 넘게 준다는 거다. 물론 전능한 시스템을 가진 내겐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일반 작가들에겐 정말이지 혹할 수, 아니 당장 그녀의 발가락 사이까지 핥아가며 개처럼 목줄을 차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근데.. 제가 수상은 했다지만 아직 이렇다할 작품도 없는신인작가인데 어떻게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다는 거죠?"
일리있는 나의 물음에 가인은 소소하게 미소짓곤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훗.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음.. 제 눈엔 보였달까요. 작가님의스타성이?"
사람은 제대로 볼 줄 아는군.
큼큼, 일단 나쁘지 않은 조건이고 무엇보다 재규어를 연상케하는 그녀가 풍기는 매혹적인 분위기가 왠지 사람을 이끄는 것 같기도 해서 우선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덥석, 계약서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가인이 다시 선글라스를 끼며 말했다. 다소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딱히 뒷말을 붙이진 않았다.
"그럼 꼭 연락주세요. 작가님."
"네. 알겠습니다."
물론 철새마냥 정처없이 떠도는 시나리오 작가에게 소속할 곳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마음에 안정을 주기도 하고, 게다가 업계 최고 연봉까지 제시했으니 사회진출의 첫발로는 손색이 없는 곳임이 자명했다.
그리고 제작사에 몸 담고 있으면 이름 알리기도 조금 수월할 것이고, 연예계와 연줄이 닿기도 훨씬 수월할 테니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고로, 향후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조금만 더 고민해본 후 연락을 하기로 했다.
시작이 성대한만큼, 신중하지 않으면 전생의 나처럼 멍청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인생 종지부 찍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재규어를 연상시키는 새 히로인의 뒷태를 바라보았다. 김가인이라, 이제껏 보지 못한 날카로운 그녀의 분위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떤 여자일까. 침대에선 끝내주겠지?'
그녀는 일직선으로 쭈욱 걸어가다 차에 올랐다. 해외 명품 브랜드, 재규어였다. 재규어 특유의 날렵하고 강인한 디자인의 차가 그녀와 참 잘 어울린다.
'재규어 같은 여자가 재규어를 타고 가네.'
라임 오지구요.
'우선 가볼까.'
다시 차에 오른 나는 등줄기를 쭈욱 타고오르는 소름과 전율을 느끼며 재단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니, 잠깐만.
또 또 다음 퀘스트 얘기 안 해주네. 꼭 물어봐야 알려주는 거냐?
[ 퀘스트 8 : 인지도 150의 여성과 관계를 나누세요. ]
음, 이젠 보상에 대해선 얘기하지도 않는구나, 이제 좀 친해졌다고 대충하는 거냐?
[ 그리고 특수조건으로 마인드컨트롤의 능력 없이 관계를 나누셔야 합니다. 특수조건은 미달성해도 퀘스트는 완수되나 특수조건 달성 시, 새로운 컨트롤 능력이 발현됩니다. ]
미친.
그럼 특수조건을 꼭 달성하란말이잖아. 그나저나 새로운 컨트롤 능력이라니, 인간을 조종하는 거외에도 또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가? 뭐, 물건이라도 조종하는 건가?
'쳇, 알려줄 리가 없지.'
그나저나 인지도 150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아린의 인지도가 120인데, 150의 인지도를 가지려면 거의 준톱스타는 되아야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 여성을 대체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쩝,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전능한 시스템 덕에 삶의 여유가 생긴 난 다소 낙천적인 생각을 대뇌이곤 악셀을 밢아 곧장 어디론가 향했다.
.
.
"어머~ 우리 이 작가님 어서 와요~"
"역시 강한씨라면 해낼 줄 알았어요!"
"축하해요."
"허허허, 신인상에 대상이라니 자네 보기보다 대단하더군!"
히로인 맛집에 도착한 나는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빵빠레를 터뜨리며 축하해주는 그들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변태암캐로 완전히 타락한 선이와 수연은 축하를 빌미로 계속 내게 은근슬젖 터치를 해대고 있었고, 소유 역시 관심을 얻으려는 듯 끼어드는 통에 산만하기 그지없다.
난 그들에게 이끌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방에 차려진 푸짐한 안주들과 함께 술을 홀짝여야했다.
있는 집안이라고, 수연의 아버지는 소주가 아닌 양주를 바로 꺼내왔다. 무려 580만원짜리라는데, 내가 무슨 사위라도 되는냥 시원하게 뚜껑을 따버렸다.
'흐음.. 술은 적당히 마셔야하는데.'
내가 세나가 기다리고 있을 안전감옥이 아닌 이곳에 온 이유는 축하주 따위나 들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수연의 아버지가 따라주는 580만원짜리 양주 잔을 몰래 버렸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한두 잔, 내목구멍을 불 태우며 내장을 뜨끈하게 지진다.
"크."
수연의 아버지는 축하주는 빌미였는지 술맛이 끝내준다며 혼자 연거푸 몇잔을 들이붓더니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선이의 풋잡스킬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리배치는 이전과 같았다.
선이가 나의 앞, 그 옆에 소유, 그리고 나의 옆에 수연.
처음엔 소유가 슬쩍 내 옆에 앉으려 했었지만 수연이 잽싸게 앉는 바람에 밀려나고 말았었다.
"한잔해요. 강한씨."
소유가 와인을 홀짝이다 내게 양주 한잔을 따라주었다. 적극적이다. 일전 같았으면 혼자 목이나 축이고 있었을 텐데, 이제 어미와 언니의 앞에서도 내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취기에 볼 언저리에 홍조를 띄운 수연이 소유에게 말했다.
"소유, 너 요새 남자 생겼어?"
"아니, 왜?"
"그냥 변한 것 같아서."
"풋. 싱겁기는."
그렇게 자매들이 나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선이는 와인을 혓바닥으로 할짝대며 내게 대놓고 색기를 표출하고 있었다.
취기 탓에 이성감각이 점점 마비되어가는 모양이다. 흐음, 그럼 슬슬 이 배불뚝이 아저씨를 보내야겠는데..
"아버님. 한잔 하시죠."
내가 양주를 들며 아버님이라 부르자 흐리멍텅히 술잔을 보고 있던 그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몇잔만 더 먹이면 여기서 뻗거나 방에 들어갈 듯싶다.
"허허허! 아버님이라니! 듣기 좋구먼!"
"어머~ 이이도 참. 그렇게 좋아요?"
"그럼 그럼! 우리 수연이도 혼기가 차가니 베필이 나타나면 얼른 시집을 가야지! 허허허!"
허허, 이거 죄송하게 되어버렸네요.
저는 이 집이 소문난 떡집이라 들른 것뿐인데, 큭큭.
수연이 부끄러운듯 볼에 손을 얹으며 아비를 타박했다. 하지만 이미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다. 김칫국을 사발도 아닌, 대접에다 드링킹하고 있다.
"어머, 아빠도 참!"
"호호. 이이가 술이 취했네요. 강한씨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에요?"
선이가 그렇게 말하곤 또다시 발가락으로 내 하물을 비벼댄다. 이전과 달리 식탁보가 흔들릴 정도로 대놓고 하는 통에 들통날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내 불안감과 달리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알콜의 기운에 하물은 점점 단단해져간다. 그녀의 발을 잡아 야릇히 발등을 간지럽혔다.
선이가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런데 마치 나의 '의견'이 수연이아닌 자신일 것이란 그릇된 희망이 비쳐졌다. 쾌락과 알콜에 찌들더니 사리분간이 안 되는 모양이다. 설마 내가 수연을 버리고 자신을 간택이라도 한다는 건가?
나이 차이만 해도 20살은 족히 나겠는데, 너무 나가는군. 수연 뿐 아니라, 이떡집에 기거하는 여자들은 오늘 모두 함께 나와 합방할 터인데 말이다, 큭큭.
"아버님! 한잔 하시죠!"
"어허허! 좋지!"
합방 계획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난 이 떡집의 주인에게 계속 술을 권했다. 누가 봐도 다소 무리한 권주이긴 했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이미.
이 식탁에 앉은 네 마리의 쾌락에 물든 동물은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
"어허어어이~~"
결국 알콜에 만취한 떡집주인이 칠렐레팔렐레, 체통은 개집에다 두고온 듯 인사불성이 되었다. 선이가 가정부에게 남편을 안방에 모시고 난 후, 퇴근하라 일렀다.
가정부가 아직 정리해야할게 많다며 머뭇댔지만 선이는 기어코 그녀를 내쫓듯 퇴근시켜버리고 말았다.
이제 이 떡집에 음흉한 늑대와 여우들 밖에 남지 않았다. 만취한 돼지새끼 한 마리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조금 어색한 기류가 감돈다.
뭐랄까, 서로 묘하게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설마 진짜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수연과 소유는 와인잔을 계속 홀짝이고 있었고 선이는 그런 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자리를 비켜달라는 무언의 압박 같기도 했는데 두 딸은 그런 어미의 눈치를 무시하고 있는 듯했다.
'뭐야, 이상한데?'
떡집주인이 빠져나가자 따로 흐르던 기류가 한데 뒤엉켜 내게 흐르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흠흠."
애꿎게 헛기침을 하자, 그게 신호인냥 어색한 기류가 풀리며 수연이 소유와 눈짓을 주고 받더니 대뜸 내 하물 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놀란 내가 읍하며 하체를 뒤로 뺐다.
"수, 수연씨??"
그런데 수연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아닌, 제 어미 밀프 이선이의 발이었다. 설마,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수연이 선이의 발을 바닥에 팽개치며 소리쳤다.
"엄마! 너무 대놓고 하는 거 아냐?!"
뭐야, 갑자기 이 무슨 전개란 말이요. 주인장!
선이는 다시 발가락으로 내 하물을 문지르며 수연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어머~ 우리 수연이가 눈치가 빠르구나?"
어머니, 그건 눈치가 빠른게 아니라 오히려 모르면 이상한 거였다고요.
"아니, 엄마는 왜 맨날 내가 데리고 온 남자들한테 이러는 거야?! 강한씨랑은 나도 아직 못했다구!"
뭐?
잠깐, 뭐라고?
아니,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