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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66화 (외전 완결) (66/66)

외전 22화.

헌원은 닷새째에서야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헌원의 눈에서 정욕이 자취를 감춘 걸 본 백아는 행궁의 침상에 누워 미음을 먹으면서도 아쉬워했다.

“희락이 그렇게 좋으셨어요?”

“응, 헌원이 묘하게 평소와는 달라 좋았어.”

미음을 식히는 단이의 입에서 입김이 아닌 한숨이 새었다.

황제 일가는 이미 환궁한 지 오래라 헌원과 백아는 마음 편히 행궁에 머물렀다. 백아의 몸을 추스르고 장안으로 돌아가는데 대로가 사방으로 뻗는 중앙의 광장에서 분서가 한창이었다. 쌓인 재의 양을 보니 태운 책의 수량이 꽤 되는 듯하여 궁금해졌다. 무슨 일인가 묻는 헌원의 질문에 책을 태우던 이가 벽에 붙은 방을 가리켰다. 방은 총 두 가지로 금지령과 회수령이었다.

-색서 <이향애록>을 금서로 지정한다.

-금서 <이향애록>을 모두 회수하여 분서한다.

벽에 붙은 방을 보던 헌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헌원이 희락을 보내는 사이 무화는 헌원에게 언급한 일을 모두 해치웠다. 헌원의 의뢰였던 백아의 수기야 돌려받을 수 있겠지만 원래 헌원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회수령이 내렸으니 백아가 구하여 볼 염려는 없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하고자 한 헌원의 계획은 모두 틀어졌다. 황제께서 아셨다면 누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요, 누님께서 하문하시는 걸 헌원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향, 애록. 어, 나도 있어요, 이거.”

방을 보는 헌원이 영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백아가 다가왔다. 헌원은 백아가 다가온 것보다 백아가 한 말의 내용에 놀랐다.

“보셨…… 습니까?”

“응, 한창 우울해할 때 단이가 구해다 주었어요. 장가의 세책방에선 구하지 못해 다른 데를 돌았댔어. 흠, 색서가 음란한 것 맞지요? 맞아, 꽤 음란했어. 양물의 크기를 백 년 묵은 거북이에 비유하던걸.”

백아는 중간권만 대충 넘겨 본 서책을 떠올렸다. 겉면을 감싼 비단이 예뻤고…… 무엇보다 다 읽지 못했는데.

“금서면 이제 읽으면 안 돼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단이와 함께 읽어 버릴걸.”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리는 백아는 아쉬워하는 기색만 내비쳤다.

방을 읽는 백아를 보는 헌원의 눈에 후회가 가득했다. 헌원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백아는 모르게 하려 한 것도,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한 것도 모두 어긋났다. 심지어 백아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좌절감만이 헌원을 덮었다. 어째서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했는지. 백아를 위함이라고 했지만 더 지혜로운, 백아가 상처받거나 해를 입지 않는 방법을 좀 더 신중하게 찾아볼 수도 있었을 터인데. 자신의 시야가 너무 좁았다.

“내 것도 태워야 해요?”

두 번째의 방까지 모두 읽은 백아가 여전히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태워야지. 천자의 명인데.”

생각에 잠긴 헌원보다 책을 태우던 이의 답이 빨랐다. 홍윤의 무서운 낯을 떠올리며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윤은 마지막 순간에는 자애롭게 웃으며 백아를 보내 주었지만 백아의 뇌리엔 여전히 헌원에게 호통하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저것 때문에 단화각도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걸?”

“단화각이 왜요?”

“아 글쎄, 저것이 무엄하게도 무화가 폐하와의 밤을 이야기한 것이라지 뭔가. 그러니 금지령이 붙었지. 하여 몰래 찾는 이도 있는가 본데, 목숨이 아까우면 하지 말게. 황후께선 오죽 속이 상하실까.”

“사실입니까?”

“무어, 아니라고야 하는데 다들 그리 여기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금지령에 회수령이 설명이 되지 않아.”

그날 저녁 승상가로 돌아온 헌원은 침상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백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던 백아가 되레 놀라 무릎을 붙여 앉았다.

“백아께 사죄를 청할 일이 있습니다.”

“용서는 희락 때 구했잖아요. 나는 용서했어.”

백아가 알고 있는 한, 백아가 헌원을 용서할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백아가 느낀 게 헌원의 고통이라면 백아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원은 다른 것을 물었다.

“백아, 잃어버렸던 수기, 일기를 기억합니까?”

그러고 보니 헌원이 자신을 미워할까 염려했던 이유 중에 저것도 있었다. 헌원과 희락 후엔 떠올리지도 않던 물건이었다.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그것, 어디 있지? 계속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엔 헌원이 숨기고 있던 것을 말했다. 늦은 귀가 때 단화각을 들렀던 이유가 관의 일이나 황명이 아닌 수기를 찾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백아는 자신이 들었던 내용과 다르자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무화와 폐하는 황명이라 하였는데.”

“폐하와 무화는 저를 도우려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헌원을 돕기 위해서요?”

“예.”

“그런데 왜 헌원은 나한테 이야기해요?”

“그게 바른 행동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백아는 헌원이 말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헌원은 언제나 옳았는데, 자신이 틀렸다, 바르지 않다 라고 말하는 헌원은 백아가 받아들이기엔 아직 일렀다.

“우리 둘의 일인데 백아에게 의견을 구하기는커녕 숨기고 몰래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백아의 마음에 의심을 깃들게 했고…… 같이 해결하려 했다면, 아니 적어도 언질을 드렸더라면 백아가 저를 의심하며 슬퍼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인사를 하고 상을 주는 데까지는 이해가 쉬웠다. 그러나 벌이나 죄는, 헌원은 나쁜 이도 아니고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데 왜 자꾸 죄를 지었다 말하고 벌을 청하는지. 여전히 의아한 낯인 백아에게 헌원이 다시 이야기했다.

“백아를 제가 보호하려고만 했어요. 그로 인해 큰 홍역을 치렀는데도.”

부부에 대한 백아의 깨달음을 듣던 중 헌원도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백아가 느낀 것과는 반대로 헌원이 틀렸다. 서로 의지하고 함께 헤쳐 나가야 할 사이인데 헌원은 그러지 않았다. 백아를 성년이다, 모자라지 않다 하면서도 정작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있던 건 헌원이었다.

“나를 위한 일이라며, 그럼 괜찮은데.”

백아의 대답이 뼈저렸다. 전부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대답은 듣고 움직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백아는 믿었을 것이다. 불안하게 하여 일이 이렇게 커질 일도 없었을 터다.

마음을 다잡으며 긴 한숨을 내쉰 헌원은 백아에게 수기와 이향애록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혹여 다른 곳에서 듣고 백아가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괜찮으셨습니까?”

“뭐가요?”

“표현이나 문장 같은 것들. 백아가 적은 것과 닮지 않았습니까?”

헌원의 질문에 백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흥미 없이 대충 읽어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표현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단이와 함께 웃었던 탓이었다.

“내가 쓴 것과 닮긴 했는데, 중요한 게 다르잖아요.”

“무엇 말씀이십니까?”

“백 년 묵은 거북과 천 년 묵은 거북은 크기부터가 달라.”

그거야…… 백아의 표현에 워낙 과장이 큰 터라 수치만을 조정한 것일 터다. 숫자를 제외한 문장은 글자의 조합마저도 꼭 같았다. 그러나 백아는 수를 근거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완강한 백아의 부정에 헌원은 허탈해졌다. 헌원의 이해를 백아가 받아들이기엔 이른 듯했다. 그동안 헌원의 근심과 노력은 다른 의미로 헛되었다.

그러나 헌원은 웃으며 백아를 바라보았다. 백아가 수치스러워하거나 상처받지 않았다면 그걸로 되었다. 헌원의 노력은 보상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웃는 헌원을 본 백아는 헌원이 가장 사랑하는 모습으로 헌원에게 미소 지었다. 모든 일의 근원이던 책도, 그로 인한 근심도, 그로 인한 의심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헌원과 백아는 그저 서로를 보며 웃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폐하와 무화는 모두 알았겠네요?”

헌원을 보며 미소를 짓던 백아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헌원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백아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야.”

“예?”

“헌원이 내 거란 걸 알았으니 폐하도 무화도 헌원을 탐내지 않을 것 아니야.”

백아의 결론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럼 됐다. 헌원에게 눈을 빛내던 이들이 모두 헌원이 백아의 것임을 알았다면 더는 헌원을 빼앗으려 들지 않을 터다. 백아는 그거면 만족했다.

황제 홍윤은 주가의 윤하와 이가의 헌원에게 채방사(특산물의 산지를 탐사하는 직책)의 부사와 별감의 직책을 제수하나 이듬해 둘은 회임을 이유로 관직을 반납한다. 이에 홍윤은 윤하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헌원을 기거사인(천자의 언행과 법도를 기록하는 직책)으로 강등한다. 이후 헌원은 이립의 나이에 중경의 자사를 지내고 상서와 판서를 역임하여 지천명에 승상의 직책을 받아 이 대에 걸쳐 가문의 위신을 드높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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