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백아는 어렴풋하게 정신이 들었다. 붙어 버린 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지만 시야가 흐렸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슴푸레한 시야에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포만감이 드는 아래도 느껴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백아도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속도는 느려 백아의 몸은 잔잔하게 요동쳤다. 백아는 헌원이 이야기해 주었던 바다의 파도가 이런 느낌일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흐리던 정신이 돌아오며 백아는 근처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 했다.
“허…… 하응, 읏, 으응…….”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 비음에 놀라 흐리던 시야가 단박에 밝아졌다. 새벽이 아니라 한낮인 것 같았다. 장막을 드리우고 등잔으로 빛을 밝혀 새벽이라 착각한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기 어려워 힐긋 빛이 드는 장막을 보고 말았다. 누운 배 위를 따스한 손이 덮었다.
“백아, 일어나셨습니까.”
살갑게 인사하는 헌원은 아랫도리를 백아의 안에 깊이 삽입한 채였다. 속을 꽉 채우던 포만감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백아는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헌원이 몸을 숙이고 가만히 속삭였다. 늘 단정하게 묶고 있던 헌원의 머리카락이 백아의 위로 장막처럼 길게 드리워졌다.
“사흘째입니다.”
백아의 뺨에 입을 맞추고 물러나는 눈은 총기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색욕이 가득했다. 백아는 잔뜩 쉬어 버린 목을 애써 가다듬어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 희락 ……이에요?”
백아의 질문에 헌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벽을 간지럽히던 양물이 움직임을 멈추니 이상하게 백아가 아쉬워졌다. 움직임을 조르자니 헌원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해 재촉할 수 없었다. 백아가 숨을 크게 들이켜 배가 일렁이자 헌원이 손을 뻗어 백아의 배를 어루만졌다.
“저도 처음 겪는 희락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니 희락인 것도 같으나 저는 백아를 보면 늘 배 속이 들끓는 열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열기가 희락으로 인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정욕인지 분간이 어렵습니다.”
헌원은 배를 어루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배꼽과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 양물까지 스친 손은 회음마저 지나쳐 맞물린 사타구니에서 멈추었다. 헌원은 손이 멎은 연결 부위를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움직여 헌원을 품은 백아의 아래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흐…….”
헌원은 비어져 나온 정액을 도로 집어넣거나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보거나 하며 손장난을 쳤다. 민감한 곳을 스치는 손길에 백아가 몸을 떨며 숨을 들이켰다. 장난을 치던 헌원의 손이 미끄러져 백아의 허벅지를 잡았다.
“하지만 희락이 아니라도 지금만큼은 제 욕심껏 백아를 안고 싶습니다.”
백아의 한 다리를 들어 올린 헌원은 갑자기 거칠어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백아는 헌원이 치대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새 헌원의 색향에 달아오른 몸은 헌원의 손길에 움찔움찔 튀었다.
내내 헌원을 품고 있었을 내벽도, 사흘이나 하였으면 감각이 없을 만도 하건만 아직 희락으로 잔뜩 예민하게 달아 있었다. 헌원과 닿는 것만으로 뜨거움과 차가움이 상반된 감각이 온 배 속을 누비며 쾌감을 끌어냈다. 헌원은 오래지 않아 백아의 안에 정을 토해 냈다.
사흘간 몇 번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아의 안은 헌원의 정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헌원이 여전히 부풀어 있는 양물을 백아의 안에 지그시 누르자 백아는 메스꺼움까지 느꼈다. 결합부 사이가 새어나온 정으로 질척해졌다.
그럼에도 헌원은 백아의 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신 헌원은 이번엔 자신이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고 백아를 제 위에 올렸다. 백아가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도록 할 생각인 듯했으나 백아가 영 몸을 가누지 못했다. 헌원은 백아를 그대로 제 몸 위에 얹어 둔 채 백아의 몸을 쓰다듬었다.
민감한 곳을 스치는 손길은 지분거림에 가까웠으나 그것이 헌원의 손길이라 백아는 포근함을 느꼈다. 헌원의 맨가슴에 뺨을 기댄 채 손길을 받던 백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헌원을 의심했던 걸 사과해야 했다.
“헌원, 나…….”
“예, 백아.”
묘하게 차분한 헌원의 대답에 백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이라 다짐하고 입을 열었다.
헌원을 믿지 못해 미행하고, 거기서 태자를 만나고, 헌원이 다른 이를 보는 듯해 속상해했던 이야기들을. 태자가 추파를 던진 일은 숨기려 했지만 조용히 응시하는 헌원의 눈빛에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태자 전하께 왜 혼인하였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인이라 하였어요. 사실은, 부부라 하려다가, 우린 아직 첫아이가 누굴 닮아야 할지 정하지 못했으니까…….”
백아는 갑자기 헌원에게서 향이 일어 당황했으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백아를 보는 눈빛만은 이상하게 한결 따스해져 있었다. 백아는 이제는 조금 가눌 수 있게 된 팔로 헌원의 몸을 감싸 안았다.
“미안, 미안해요. 나는…….”
“백아는 저 말고 다른 이를 마음에 두신 적이 있습니까? 아, 왕자님은 제외하고요.”
“아니, 아니요. 그런 적 없어. 왕자님도 결국 헌원이었는데.”
백아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자 백아의 머리카락이 헌원의 땀에 젖은 가슴팍에 비벼졌다. 헌원은 손을 들어 백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왜 제가 그랬을 거라 여기셨을까요?”
“음…….”
백아는 다시 말을 망설였다. 헌원은 채근하지 않고 천천히 백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기다렸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정리한 헌원은 손끝으로 백아의 귀 모양을 덧그렸다. 헌원의 손은 턱 선을 지나 입술로 올라갔다. 헌원은 백아의 말랑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꽤 긴 기다림 후에 백아가 입을 열었다.
“탁문군의 백두음을 알아요, 헌원?”
“모를 리가요.”
“앵앵전은?”
이어지는 질문에 헌원은 백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헌원은 대답 대신 백아를 끌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헌원에게 사죄하던 입술은 여전히 달콤했다.
헌원은 그대로 자세를 뒤집어 백아의 위에 올라탔다. 백아의 위를 제 몸으로 덮어 버린 헌원은 그사이 물러난 양물을 다시 깊게 삽입했다. 온통 헌원에게 감싸인 백아의 입술 새로 비음이 새었다. 입술을 뗀 헌원이 속삭였다.
“그거 아십니까, 백아?”
“무…… 흡.”
헌원은 다시 백아에게 입맞춤했다. 말을 하며 말랐던 입술은 조금 전의 입맞춤으로 촉촉해져 더욱 달았다. 헌원은 다시 입술을 떼었다.
“백두음의 기록은 훨씬 후대입니다. 탁문군이 지은 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백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탁문군이 아니라면 시를 지은 그 사람은 왜 남의 이야기에 자신의 시를 얹었을까? 이번엔 헌원이 뺨에 입을 맞추어 백아는 의문을 온전히 내어 놓을 수 있었다.
“어째서?”
“질투를 하였을 수도 있고 문장을 뽐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마음 하나 얻어 흰 머리가 날 때까지 헤어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문장은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도 천 년 전의 사람이라 연유는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반대쪽 뺨에 입을 맞춘 헌원이 말을 이었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저는 후의 이야기는 야사로 여깁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해로했을 거라 믿어요. 그리고 앵앵전은.”
헌원은 다시 백아의 입술을 깊게 맛보았다. 앵앵을 입에 올리며 앵두 같은 백아의 입술을 맛보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내 헌원의 입술에 눈길을 주고 있던 백아도 호응하여 제법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서상기는 백아가 읽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지은 각각의 서상기가 있어요. 하지만 그 결론은, 최초의 앵앵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앵앵과 장생이 해로하는 내용으로 맺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을까요?”
헌원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백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백아에게만은 한없이 인자하고 자애로운 스승인 헌원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보다 많은 사람이 바라는 건 행복으로 맺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다들 그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 많은 서상기가 탄생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앵앵전의 헤어짐이 서상기의 백년해로로 바뀌었듯 우리도 그러하면 되는 겁니다.”
헌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엔 백아가 헌원의 입술을 찾았다. 양팔을 헌원의 목에 감고 다리마저 헌원을 감쌌다.
그리고 헌원은 드디어 결심했다. 백아와의 해로를 위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노력을 하기로. 헌원은 깊게 입맞춤하며 여전히 흉흉한 성기를 백아의 안에서 휘저었다. 지난 사흘간 애써 남긴 이성의 끈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마음의 벽을 무너트리자 헌원의 양물이 백아의 안에서 부풀었다. 결을 시작한 헌원의 양물은 금세 백아의 안을 가득 채웠다.
배 속의 한계를 넘어 커지는 양물에 고통을 느낀 백아가 진땀을 흘리며 헌원에게 물었다. 헌원이 주는 상은 늘 달콤하고 짜릿하고 즐거웠으니 이런 고통은 상이 아닐 것이다.
“벌인가요?”
“아니요, 제 욕심입니다. 이기심이고 소유욕이며 독점욕입니다. 용서하세요, 백아.”
백아는 헌원이 바라는 용서를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지금 백아가 느끼는 고통은 기다림이 길었던 헌원의 고통일 것이다. 벌이 아닌 그것이라면 백아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백아와 헌원의 결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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