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허허, 불경이로고.”
멀어지는 헌원과 백아를 보며 홍윤이 괜스레 투덜대었다. 그제야 놀람을 수습한 희원이 핀잔을 주었다.
“앞에 두고는 인자하게 웃으시더니 이제 와 그러십니까?”
“좋을 때가 아닌가 말이야. 자신은 항상 낮추는 녀석이 제 짝 자랑은 거침없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희원에게 유난이라 말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그 이상이었다. 홍윤의 수발을 드는 내관도 헌원만큼 제 짝을 수발들진 아니했다. 옆에서 지켜본 헌원은 할 수 있다면 음식마저도 대신 씹어 넘겨 줄 기세였다. 단둘이 있을 땐 정말 그러할지도 모르겠군, 문득 떠오른 생각을 홍윤은 제법 그럴싸하다 여겼다.
“하나 무화.”
“예, 폐하.”
“이 정도에 금전을 요구하긴 민망하지 않아? 지난번보다는 재미가 덜하다.”
“그럼 이야기는 어떠하십니까? 마침 흥미로운 것이 있사온데.”
헌원은 단칼에 거절했지만 무화는 진진을 위해서라도 황제의 윤허를 얻어야 하는 일이었다. 일을 벌이고 난 후면 저이도 어쩔 수 없을 테지.
진진은 무화가 보낸 사람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엉엉 울며 무화에게 고백했다. 장안에 널리 퍼진 글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이다.
탈진할 정도로 우는 진진을 달래어 사연을 들었다.
이향애록은 진진이 연습하던 글이었다. 그것을 진진의 정인이 노름의 판돈으로 남에게 넘겼다. 그것이 어쩌다 너도나도 찾는 책이 된 것을 보며 그래도 글에 재능이 없지 않았다 위안하며 은밀히 자랑하였는데 뒤늦게 필사꾼에게 샀던 서책이 떠올랐다.
내지의 재질도 매끈하니 상품이었고, 책을 묶은 끈도 황마나 삼으로 엮은 것이 아니라 가죽이었다. 보아하니 망상집이라, 어느 귀한 댁 자제가 이런 걸 쓰고는 흘리고 다니는지 칠칠치 못하다고 정인과 농을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거처로 돌아와 서책을 꺼내 내용을 되짚었다. 연습이라 여겨 베껴 쓴 구절이 많았다. 적어도 서책의 주인이 보면 이향애록의 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볼 정도는 되었다. 은밀한 내용이다 보니 너그러움을 바라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해서 진진은 정인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무화가 보낸 사람이 진진을 찾자 정인은 지레 겁을 먹어 진진에게 크게 화를 내고 홀로 자취를 감추었다. 갈 데가 없어 다시 돌아왔다는 진진에게 무화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이 관원이나 그이의 음인이 진진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듯싶었지만 진진은 내내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하여 무화가 나서게 된 것이었다.
“해 보거라.”
“그 전에, 폐하.”
“그 전에, 무어?”
“이번엔 금전 대신 다른 대가를 내려 주시옵소서.”
“다른 대가?”
“예, 폐하. 소신이 이번에 청할 것은 두 개의 령이옵니다.”
“령이라.”
“하나는 금지령이옵고 하나는 회수령이옵니다. 윤허하시겠나이까?”
이번엔 꽤 큰 것을 요구하는 터라 홍윤이 눈가를 찡그렸다. 무화가 요구하는 큰 금전에 매번 투덜거리기야 하지만 그것이 가장 후환 없는 대가이기는 했다. 백지로 내리는 령은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다만 무화가 청하는 령은 향인에 한했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월권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홍윤은 무화의 청을 거의 받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무화의 저 태도 때문이었다. 이번엔 무엇 때문에 령을 요구하는지. 일의 경과를 보면 짐작이야 가능했지만 순순히 아뢰는 법은 없다. 홍윤이 무화를 보며 한껏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무화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거, 태자명으로도 가능한가?”
홍윤이 무화의 의도를 가늠하는 사이 멀리서 구경하던 태자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예, 전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명으로도 충분하옵니다. 내려 주시겠습니까? 그럼 태자 전하께만 말씀드리도록 하고요.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
무화의 판단으로는 이 관원의 음인에게도 이 편이 좋았다. 이미 널리 퍼졌다고 하나 그것을 남들이 두고두고 보게 하느니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말이다.
뻔뻔스레 황제와 태자 사이에서 조건을 저울질하려 드는 무화를 향해 홍윤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윤허할 터이니 말해 보라.”
“윤허부터 부탁드리옵나이다.”
어느새 따라온 내관이 홍윤에게 붓과 선지를 대령했다. 이전부터 이런 거래가 종종 있었던 탓이다. 홍윤은 혀를 쯧 차며 내용이 없는 금지령과 회수령을 만들었다. 무화는 선지를 곱게 접어 소매 속으로 감추었다.
“되었느냐? 이제 말해 보라.”
“이곳은 듣는 귀가 많으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헌원?”
향이 거칠게 울렁이는 헌원은 백아가 아는 헌원 같지 않았다. 늘 백아를 포근하게 감싸던 헌원의 향이 날카롭게 백아를 찔렀다. 백아는 제 향을 헌원에 향에 얽으려 노력했으나 너무 거칠고 날카로워 여지없이 꿰뚫렸다. 벼락 맞은 고목을 만진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 살갗을 달렸다.
두려워진 백아가 향을 내며 헌원을 꽉 끌어안았다. 휘청이던 헌원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백아를 밀어냈다. 그러나 정인의 향을 단호하게 밀어내지는 못하여 팔은 밀어내나 손은 쥐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백, 아, 도망치려면 지금.”
“도망…… 이요?”
“희락, 입니다. 백아가, 흐윽, 다칠지도 몰라요.”
헌원의 말에 백아는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양인의 희락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거칠고……. 백아는 눈앞의 헌원을 다시 보았다. 백아가 아는 헌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할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새벽까지 정사를 나누고도 백아의 잠자리를 봐 주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의미였나? 글은 경험을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하리라곤, 이렇게 힘든 모습을 보이리라곤 백아는 글을 읽으면서는 하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아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럼! 나 아닌 이를 안으려고?”
그건 더 싫다. 아프고 힘들어도 헌원은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거라 했잖아. 나를 은애한다 했잖아!
다시 백아의 소유욕이 폭발했다. 사방에 벽을 세우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의 소유욕은 온전히 헌원을 향했다. 백아의 양팔을 쥔 헌원의 손에 살갗을 쥐어짜는 듯한 거친 악력이 더해졌다.
“싫어, 나랑 해! 내 거라 했잖아! 내게 각인했…… 흡!”
달려든 헌원이 백아의 입을 막았다. 늘 부드럽게 타액을 건네오던 헌원의 혀는 서역의 흡혈귀라도 된 양 백아의 혀를 빨았다. 이대로 헌원에게 계속 타액을 빨리면 백아는 흡혈귀에 피를 빨린 시체처럼, 피가 아닌 타액만으로도 그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어, 헌원과 함께 살 거다. 백아는 헌원 못지않게 헌원을 갈구했다.
휘청이는 헌원은 몇 번이나 벽이나 기둥에 부딪혔다. 헌원이 온통 감싼 백아에겐 둔한 충격만 전해졌다. 이어지는 충격에 헌원을 걱정할 새도 없이 백아는 어느새 침상 위였다.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황가 별궁의 수많은 침소 중 하나이리라.
겉옷도 벗지 않았는데 늘 애지중지 풀어내던 오겹 매듭은 이미 솔기가 뜯어져 거치적거렸다. 헌원은 한 번의 손놀림으로 백아를 반라로 만들었다. 백아도 헌원의 매듭을 갈퀴를 흉내 낸 손에 걸어 뜯어 버렸다. 바지춤 아래로 솟은 헌원의 양물이 흉흉했다.
“백아, 백…… 흣.”
헌원의 용두가 단번에 백아를 꿰뚫었다. 갑자기 내부를 꽉 채운 물건에 백아는 숨도 쉬지 못하고 온몸을 굳혔다. 숨은 한참 뒤에나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헌원이 다시 백아의 안을 거칠고 깊게 침범했다. 두려울 정도로 흉폭한 움직임이었다.
백아는 저도 모르게 헌원의 팔뚝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헌원이 다시 쳐들어와 백아의 손톱이 헌원의 팔뚝에 꽂혔다. 핏방울은 조금 늦게 스며 나왔다.
“허, 헌원!”
두려움에 헌원을 불렀지만 늘 돌아오던 다정한 대답은 없었다. 깊고 거친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올려다본 헌원의 눈은 총기가 없이 흐렸다. 그 안에 가득한 건 욕정뿐이었다.
팔뚝에 꽂히다시피 한 백아의 손을 떼어 낸 헌원이 허리를 숙였다. 백아는 팔 대신 헌원의 어깨에 매달렸다. 조금 전보단 부드럽지만 여전히 난폭하게 침범하는 혀에 백아는 몇 번이고 입술을 열었다.
자신의 희락도 이렇게 거칠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백아가 기억하는 건 백아의 희락을 온전히 위로해 주던 헌원이었다. 백아는 헌원에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기고 극락과 무릉도원을 오갔다.
헌원도 마찬가지였다. 백아를 다치게 할까 걱정해 애써 희락의 충동을 참아 내던 헌원은 백아의 외침에 마음을 놓았다. 그러니 헌원의 희락도 백아가 받아 주어야 한다. 받아 줄 뿐 아니라…… 백아가 그러했듯 헌원도 백아와 보낸 희락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으면 했다.
그것이…… 그것이 부부라 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정신을 잃어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이. 헌원은 백아에게 늘 그러했지만 백아는 이제야 헌원에게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백아는 어쩌면 아이가 부부의 요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온전히 강하게만 들이치는 헌원에 입이 막힌 백아는 신음도 내뱉지 못했다. 그저 더 세게 헌원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백아에게 희락에 일렁이는 헌원의 향이 쏟아졌다.
“하…… 흐읏, 아흑!”
어느 순간부터 백아는 몸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이미 두 번이나 겪어 익숙한 감각, 희락이었다. 헌원은 다음 달 즈음일 거라 예상했는데 한 달이나 당겨졌다. 백아는 눈을 떠 헌원과 눈을 맞추었다. 원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우리가 부부라 그러한 거다. 그래야 서로의 희락을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을 테니까.
백아의 몸에서도 색향이 피어올랐다. 무화의 앞에서 터트렸던 소유욕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상대방을 포용하는 향이었다. 백아의 향에 헌원의 거칠던 향이 섞여 들었다. 색향이 어우러지고 난폭하기만 하던 헌원의 허릿짓에서 쾌감이 커진 순간 백아도 기억을 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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