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63화 (63/66)

외전 19화.

거리가 먼 데다 자리에 울려 퍼지는 궁중악 때문에 대화 내용은 들을 수 없으나 온화한 분위기만은 눈에 보였다. 늘 자신을 달래고 어르는 헌원은 백아가 자주 보지 못한 표정으로 무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려운 책을 읽거나 부모님과 대화할 때처럼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는 헌원은 조금 낯설고…… 멋있었다. 그 앞에 눈을 휘며 헌원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는 무화는 백아의 눈에 간살맞아 보였다.

“저이는…….”

“무화 말이니?”

의미 없는 중얼거림에 희원이 답했다. 온통 헌원에게 신경이 가 있는 백아의 시선을 따라 헌원과 무화를 보던 참이었다. 감히 황후의 질문을 한 귀로 흘리는 백아의 태도는 무엄했으나 어쩌랴, 육 척이 넘는 장신의 헌원도 희원에겐 한참은 어린 아우이고 아우의 목숨인 백아는 더 어린 것을. 어른인 희원이 넓게 포용할 수밖에.

그런데 보아 하니 이 둘이 애정 다툼을 할 기미가 보였다. 가라앉은 백아와 달리 희원은 즐거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눈을 깜빡였다.

“예, 영리한가요?”

“영리한 이지, 한계를 알고, 들 때와 날 때도 잘 알고.”

“글도 잘 쓰겠죠?”

“무화가 어렸을 적에 당시 천자이신 선황 폐하께 올린 상소는 유명하단다. 그건 왜?”

당시 태자였던 홍윤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황궁에 적을 올리느니 목을 쳐 달라는 담대 무쌍한 내용이었던 터라 유명한 상소였다. 명문인가 하면 의문이지만 희원은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희원의 입궁 전, 홍윤과의 일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다만 황궁과 선을 긋고 자신의 일을 하는 무화의 태도로 인해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마음을 열었더랬다.

백아의 대답을 기다리던 희원은 슬며시 웃으며 다시 백아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았다. 오랜 시간 알아 온 무화와 제 형제인 헌원의 성정을 알기에 지금의 상황은 희원에게 흥밋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헌원을 보는 백아의 표정엔 불안이 가득했다. 무화가 된통 골렸다고 했던가. 거기에 자신의 일이 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홍윤마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계속 지켜보는 와중에 가만히 대화하던 헌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화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헌원의 팔을 잡았다. 헌원은 무화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무화가 다시 헌원의 소매를 잡았다. 백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의하시는 편이 좋아요. 독단으로라도 아뢸 거랍니다.”

헌원은 폐하께 아뢰어 해결하자는 무화의 제안을 뿌리쳤다. 이향애록은 그 진진이란 자가 백아의 수기를 베껴 쓴 것이 맞았다. 다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무화는 백아의 수기만을 돌려 달라는 헌원의 의뢰 대신 그 책을 전부 회수하여 없애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헌원도 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려면 큰돈이 있거나 황명이 있어야 했다. 둘 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헌원이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이미 널리 유행한 서책을 누군가 모조리 사들이거나 황명으로 금지한다면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될 터인데 그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일을 원치 않았다.

“소란한 처리는 바라지 않아.”

“후환을 없애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편이 공자께도 나을 테고요.”

그러나 두 번째엔 백아를 입에 올린 무화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무화의 말은 일을 백아 모르게 처리하려던 헌원에겐 재고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었다. 자신이야 뒷말이 더해진다 한들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백아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어려운 길을 택한 건 온전히 백아를 위함이었다.

이자를 죽이는 것이 나을까. 백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헌원은 살인멸구를 떠올렸다. 알고 있는 이는 이자와 진진 단둘이라니 둘만 없애면 되었다. 그러면 헌원 이외에 알고 있는 자는 모두 사라질 터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백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을 나눌 걸 그랬다. 내내 불안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연회장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 헌원의 행동을 막았다.

“잠시, 시간이 필요하오.”

제 마음을 다스리려 기다리는 백아를 돌아본 헌원은 자리가 텅 빈 것을 발견했다. 백아와 대화를 나누던 희원만 놀란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희원의 시선을 따라가자 백아가 보였다. 백아는 연회장을 빙글 돌아 헌원에게 오고 있었다. 헌원만큼은 아니지만 다리가 꽤 긴 백아가 성큼성큼 걸으니 제법 멀었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백아……?”

손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지자 백아가 헌원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헌원이 드물게 휘청이며 백아의 품에 안겼다. 헌원에 비해선 좁지만 헌원의 머리를 제 품에 가둘 정도는 되는 어깨와 가슴팍이었다. 갑작스러운 백아의 행동에 놀란 헌원이 시야를 온통 가린 백아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백아가 헌원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외쳤다.

“싫어! 다른 이에겐 눈길도 주지 마요, 호감도 품지 마! 아니 생각도 하지 마요! 헌원은 나만, 나만 은애해요!”

헌원을 끌어안고 하는 외침과 함께 백아의 향이 헌원을 듬뿍 적셨다. 명백한 소유욕이 헌원을 덮쳤다. 주변을 가득 채운 백아의 향을 고스란히 맞은 헌원의 몸이 들끓었다.

난데없는 소란에 이미 지켜보고 있던 황제 내외는 물론 모시던 궁인들과 무희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아는 눈을 꼭 감은 채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백아에게 시야가 막혀 버린 헌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헌원은 이 자리가 황제 부처 앞의 연회 자리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 백아, 잠시, 흡.”

헌원이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향을 내는 백아를 만류하려 했으나 백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백아를 떼어 내려 할수록 백아가 내는 소유욕이 더 짙어져 헌원이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온 힘을 다해 쏟아붓는 향에 가쁜 숨을 고르기도 벅찼다. 들이켜는 숨이 온통 백아의 향이었다.

향인으로 살아온 근 이십 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몸이 들끓고 몸을 가눌 수 없게 현기증이 일기는 처음이었다. 헌원은 어떤 예감을 했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백아의 향으로 숨이 거칠어진 헌원은 백아를 붙잡지도 떼어 내지도 못했다. 헌원은 갑작스레 끓어오른 몸을 추스르는 데 정신력을 모두 쏟고 있었다. 헌원을 붙든 백아의 손가락이 헌원의 머리카락과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헌원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때 무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공자.”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백아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무화를 쏘아보았다.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무화는 내심 놀랐다. 무화를 적대하는 향의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제 몸에서 향이 나는 줄도 모르고 폴폴 풍기고 다니던 어린 음인이 이젠 제법 갈무리를 할 줄 아는 데다 향을 다루는 게 제법 능숙하기까지 했다. 대견할 정도였다.

“이 대인과 저는 폐하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수사를 하고 있었답니다. 황명이니 공자께도 함구를 하실 수밖에요.”

어느새 무화는 물론 홍윤과 희원까지 헌원을 끌어안은 백아의 근처에 와 있었다. 제법 달던 향이 가시를 세우니 인상을 찌푸릴 만큼 고역이었다. 아무리 향인이 본능에 앞서는 자들이라지만 황제의 면전에서 가시를 세우는 건 큰 불경이었다. 그러나 홍윤은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 중이었다. 어디, 무화가 또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선보이려나 보군. 홍윤의 솔직한 속내였다.

백아의 시선이 황제를 향하자 무화가 홍윤에게 눈짓을 주었다. 불경은 불경이고, 재미는 재미렷다. 일단 눈앞의 재미를 즐길 생각으로 홍윤이 무화에게 동참했다.

“그래, 내 걸리는 것이 있어 황명을 내렸는데 그에 불만이 있느냐?”

홍윤의 긍정에 백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관의 일인가? 황제까지 긍정하니 믿어야 했다. 백아의 시선이 자신의 품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헌원을 향했다. 헌원의 일을 방해했다. 헌원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헌원을 의심했다. 헌원이 백아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백아의 하얀 낯이 파랗게 질렸다.

“그보다…….”

“예?”

황제의 말에 대답한 건 거의 본능이었다. 지난번 황궁에서 홍윤이 헌원에게 호령하던 기세가 백아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덕이었다. 백아가 불충을 저지르면 헌원에게도 해가 갈 테니까.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백아가 말을 듣는 듯하자 황제가 헌원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네 옆에 선 이가 위험한 듯한데.”

백아가 다시 헌원을 보았다. 품이 뜨거웠다. 달아오르고 숨이 거칠고 향이, 향이…….

“지금은 상황이 아닌 듯하니 희락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물러가거라.”

태자에게도 한 적 없는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백아는 홍윤의 말을 곱씹었다. 희락…… 희락?

황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백아의 소맷자락을 구겨 쥐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 헌원의 이상한 모습에 백아는 이번엔 스르르 팔을 풀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백아에게 안겨 있던 헌원이 휘청이며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헌원은 백아의 어깨를 짚었다. 애써 손아귀의 힘을 조절하려는 듯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 듯 어깨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헌원의 숨은 여전히 거칠었다.

“헌원?”

헌원은 황제의 앞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를 안아 들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당기는 힘이 거세어 백아의 숨이 턱 막혔다. 백아의 목덜미에 코를 대어 깊게 숨을 들이쉰 헌원은 휘청거리며 건물 쪽으로 향했다.

놀란 백아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홍윤은 드물게 인자한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웃는 무화와 놀란 희원을 눈에 담은 백아가 다시금 헌원을 끌어안자 헌원의 걸음이 빨라졌다. 폭풍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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