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뛰어난 무희들이 기예를 선보이며 흥을 돋우는 건 당연하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단화각의 인물들이라는 게 헌원도 조금 뜻밖이었다. 멈춰 선 백아의 옆에 헌원도 서자 단화각의 무희 무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무화는 헌원과 백아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인, 공자.”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황명을 받았으니 굼뜨고 무거운 몸이라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할 말씀도 있고요.”
겨우 며칠 전에 서신을 주고받은 헌원과 무화가 그런 일이 없다는 양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는 백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화는 인사를 받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백아에게 몸을 돌렸다
“공자께서 이 몸을 달가워하지 않으실 건 압니다. 하나 인사 정도는 받아 주시어요.”
살짝 눈을 흘기며 하는 말에 백아가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뒤늦게 인사를 받았다. 무화는 그 정도로 만족한 듯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행궁의 경흥전 앞에선 연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헌원과 백아는 준비된 자리에서 잠시 기다렸다. 행궁 안과 밖에 흐드러진 단풍이 절경이었으나 여전히 백아의 안중에 없는 듯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헌원과 백아가 있는 맞은편에 태자가 서고 이어 황제와 황후가 도착했다. 황제의 손짓에 연회가 시작했다. 참석한 모두는 붉고 노란 긴 소매를 드리운 무희들의 무용을 감상하며 짧은 여독을 풀었다.
헌원과 백아는 황제 부부 옆의 상석에서 관람했는데 반대쪽에 앉은 태자와는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태자는 다른 의미로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황궁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행궁행이 싫은 기색이었기에 황제와 황후는 태자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황후 희원의 흥미는 백아를 향했다.
백아는 그때까지도 영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재미가 없니?”
살가운 물음이었지만 갑작스러웠던 탓에 백아가 놀라 희원을 마주 보았다. 웃는 모양으로 살짝 주름이 진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백아가 고개를 숙였다. 백아가 다시 고개를 들자 여전히 백아를 보고 있던 희원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옆에 있던 헌원이 희원의 질문을 받았다.
“어렸을 적부터 즐기진 않아 보다 보면 잠들어 있기 일쑤였습니다, 황후 폐하.”
“누가 너한테 물었니?”
희원은 백아의 대답을 가로챈 헌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홍윤이 일러둔 것이 있어 좀 친해져 보려는데 헌원이 또 방해였다.
“헌원의 말이 옳아요…… 옳습니다.”
희원의 핀잔에 백아가 헌원을 비호했다. 헌원이 슬쩍 웃는 것을 보고 희원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제 낭군이라 이거로구나.”
희원이 눈을 흘기며 하는 말에 백아가 뒤늦게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옆에 앉은 헌원은 오히려 당당한 표정이었다. 얄미운지고.
희원은 백아에게 좀 더 가까이 앉아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희원의 관심에 백아는 곤란한 표정이었으나 예전처럼 안아 보려다 떨어트릴 것도 아니니 헌원이 옆에서 눈을 부라려도 어쩔 수 없으리라. 자고로 친분의 시작은 대화와 호오의 파악 아니겠는가. 아우의 짝이니 황후의 체면 따윈 개의치 않았다.
“좋아하는 건 있니?”
“헌원…… 이요?”
시선을 먼 데 두며 대답하는 백아의 뒤로 웃음을 삼키는 헌원이 있었다. 희원이 초승달 모양의 고운 눈썹을 까딱였다. 부창부수로다. 헌원이 그리 백아 외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더니 백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거 말고, 잘하는 것 말이다. 재미를 느끼거나 재능을 보이는 곳이 있니?”
“…….”
희원의 질문에 백아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어찌하면 헌원이 떠나지 않을 뛰어난 사람이 될까 내내 고민하던 것이 질문으로 던져져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백아는 천자문도 다 깨우치지 못했고 검도 목검 한두 번 잡아 본 것이 다였다. 문무를 비롯하여 노래도 기예도 정인의 마음을 한 번에 돌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 백아의 우울감 한 축을 차지했던 것도 저것이었다. 백아는 헌원의 얼굴을 슬쩍 한번 보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은 어떠하냐?”
황제와 황후의 관심이 한 몸에 쏟아지자 백아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어지는 홍윤의 물음에 백아는 고개를 더욱 숙이기만 했다. 헌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있는 백아의 손을 탁자 아래로 꼭 잡아 주고 대신 입을 열었다.
“근래에 천자문을 익히고 있습니다. 배움이 늦었지만 영민하여 익히는 속도는 빠른 편입니다.”
“호오, 그러하느냐?”
백아가 글을 배운다는 말에 홍윤이 큰 관심을 보였다. 백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헌원을 보자 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겠지. 헌원의 말은 옳다.
“예, 폐하…….”
하지만 자신이 없어 말꼬리를 흐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헌원이 미소 지었다.
“더하여, 저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보물이나 세공품을 보는 눈썰미가 뛰어나 한눈에 진품과 가품을 구별함은 물론 세공이나 칠의 형태를 보고 장인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그 지식이 제법 깊어 조금만 갈고닦으면 상단에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어머님께서도 한시름 놓으셨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짚어 주는 헌원의 말에 놀란 백아가 헌원을 돌아볼 새도 없이 무언가 백아의 시야를 가렸다. 알이 큰 가락지 몇 개와 팔찌를 걸친 희원의 손이었다.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내밀어진 탓에 백아가 움찔 몸을 물렸다.
“어머, 그러니? 이건? 알아볼 수 있니?”
놀라 몸을 젖혔던 백아는 호기심 어린 희원의 눈길을 받으며 찬찬히 장신구를 살폈다. 오래지 않아 대답이 나왔다.
“……도화옥입니다. 산지는 많으나 착용하신 건 무늬를 살피면 청해산으로 보여요…… 보입니다.”
“맞아, 그럼 이건?”
“귀걸이의 장식은 황가의 천산에서 난 벽옥이고, 머리의 장식은 은사의 세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절강 출신의 점취 장인의 솜씨입니다.”
이어 가리키는 귀걸이나 머리 장식에 대해서도 백아가 어렵지 않게 대답하자 희원이 즐거워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냥 백치인 줄 알았던 백아에게 기대가 없던 탓이었다.
“다음에 또 황궁에 놀러 오지 않으련? 그땐 헌원 저 녀석 없이 우리 둘이 보자꾸나. 내 가진 장신구를 보여 주마. 맘에 들면 몇 개 줄 수도 있고.”
살살 꼬드기는 희원의 말에 백아가 헌원을 보았다. 희원이야 괜찮지만 옆에 홍윤이 자리하고 있으니 헌원 없이 홀로 황궁에 가기는 내키지 않았다. 부담스러워하는 백아의 태도에 헌원이 대신 대답하려 했으나 이번엔 희원이 먼저 눈을 흘겼다.
“네 흉은 반드시 볼 테니 염려는 놓으려무나.”
“누, 황후 폐하.”
격의 없이 구는 희원의 태도에 태자의 자리를 제외한 상석은 화기애애했다. 그러던 중 행궁의 궁인 하나가 헌원에게 다가왔다.
“단화각의 무화가 뵙기를 청한답니다.”
작게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무화라는 이름만은 백아의 귀에 꽂히는 것처럼 들렸다. 백아의 기대와 달리 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궁인을 물렸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듯합니다.”
백아에게 먼저 작게 속삭인 헌원은 홍윤과 희원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그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백아가 일어서려는 헌원을 잡았다.
“가지 마요.”
“백아.”
백아가 소맷자락을 꼭 붙드는 바람에 헌원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멈추었다. 무화가 헌원에게 대면을 청할 일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백아와 함께 듣기엔 곤란한 일이었다. 무화의 일 처리로 보건대 어쩌면 여기에 부름을 받은 무희 중에 그 진진이란 이가 있는지도 모르니 가서 확인은 해 보아야 했다.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일이 성도로 돌아가기 전에 해결이 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럼 같이 가요.”
백아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간절했으나 데려갈 수 없는 헌원은 백아를 달래었다.
“멀리 가지 않을 겁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나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자꾸나. 태자께선 억지로 끌고 와 그러한지 내내 시무룩하니…… 말벗이 없단다.”
태자의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백아가 움츠러들었다. 황후의 말까지 더해지니 함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어 움직이지 못했다. 여전히 헌원의 소맷자락을 꼭 쥔 채라 헌원은 백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그제야 백아의 아귀힘이 느슨해졌다.
헌원은 쥐고 있던 백아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일어났다. 드문, 그러나 최근엔 빈번해진 헌원의 거절에 불안이 더해진 백아의 시선이 헌원의 걸음과 함께 움직였다. 헌원은 백아 따윈 안중에 없는 듯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 가장자리로 빠져나가 담장 안쪽 나란히 서 있는 은행나무 근처로 걸었다. 헌원이 향하는 방향에서 무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희들에 시선이 모여 인적이 드문 자리였다.
저이는 왜 여기 온 걸까? 황명을 받았다지만 변명처럼 들렸다. 소설에선 그리 변명들을 하던데. 헌원을 쫓아온 건 아닐까? 헌원이 백아를 재우고 몰래 서재에 가 적던 서신이 떠올랐다. 헌원이 부른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다행이라 해야 할까? 헌원은 연회장을 나서지 않고 백아의 눈에 보이는 곳에서 무화와 대화를 나누었다. 옆에서 희원이 무어라 하는 듯했지만 백아의 신경은 온통 헌원에게 가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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