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황국의 태자 홍제희는 이번 행궁행에 억지로 끌려가는 터라 가교 위에서도 표정이 부루퉁했다. 부황이나 모친이 정한 짝이 아닌 제가 고른 제 짝과 인연이 닿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급작스러운 황가의 행차에 도모하던 일이 모두 틀어지게 생긴 탓이었다.
일은 스무 날쯤 전, 내년에 성년이 되어 성년식과 함께 가례를 치를 터인데 제희는 그때까지 음인이라고는 모후인 황후 폐하와 그 시중을 드는 나이 든 궁인밖에 본 적이 없었다.
발현은 하였다지만 희락도 오지 않았고, 엄한 황궁의 규율 안에서 색향을 드러내거나 맡을 일도 없어 향인이 궁금했던 제희는 호위하는 금위의 눈을 벗어나 황궁의 담을 넘었다. 달라붙은 내관마저 떼어 낸 제희는 사전 조사를 해 둔 덕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곧장 음인들이 모여 있다는 단화각으로 향했다.
단화각이 있다는 남쪽 대로에 들어선 제희는 웬 객잔 앞에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유난히 흰 피부 위의 까만 눈에 시선이 자꾸 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사내를 흘깃거렸다.
‘사내를 보고 웬 주책이람.’
이상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사내를 지켜보는데 호위로 보이는 인형이 나타났다. 제희는 문득 느낀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복을 입은 자는 체격을 보아 하니 어디로 보나 여자였다. 사내에 여자 호위라……. 특이한 조합에 호기심이 생겨 객잔으로 들어가는 둘을 홀린 듯이 쫓았다. 객잔은 처음인 듯 뻣뻣하게 앉아 있기에 들어가 뻔뻔스레 술까지 얻어 마셨다.
객잔 안을 밝히는 건 벽에 걸어 둔 등잔 정도였지만 바깥보단 밝았다. 자세히 살피니 여실했다. 곱상한 사내는 무명 장포를 걸쳤지만 머리 끈이나 신의 재질이 비단이었고 장포도 빳빳한 것이 새 옷임이 분명했다. 저처럼 몰래 빠져나온 어디 귀한 댁의 곱게 자란 음인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달구경이나 단풍 구경도 할 수 없는 객잔에 온 걸까? 하여 말을 섞어 보았더니 점입가경이었다. 그리고 제희는 사흘 만에 곱상한 사내에게 제대로 퇴짜 맞았다.
‘첫 만남은 틀어졌으니 어찌한다…….’
감히 자신을 퇴짜 놓는 이가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제희의 마음의 상처는 컸다. 이만하면 준수하고, 이만하면 훤칠하고, 어려서부터 온갖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학식도 훌륭하고, 돈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지위가 더할 나위 없다.
‘역시 신분을 밝혀야 하나…….’
태자 제희는 솔직히 인정했다. 음인 사내에게 반한 것 같다. 사내란 걸 아시면 반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반했다 하면 어쩌시겠나 하는 마음이 컸다. 여차하면 외숙이 하셨던 것처럼 각인이란 패도 있고. 정 아니 된다 하시면 후궁도 있다. 대면도 하기 전에 정해진 혼처에 대한 약간의 반항이었다. 제희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리고 원통하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웬 놈팡이에게 푹 빠진 사내는 제희의 말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터다. 바로 품계를 내려야 할까? 신분이 안 된다면 후궁도 나쁘지 않겠지.
다만 세 번째 만남 이후로 음인 사내의 터럭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정인은 정말로 다음 날부터 기루를 들락거리는 짓을 관두기라도 한 건가? 제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단 미행을 들킨 거겠지. 그 눈에 눈물이 가득할 걸 떠올리면 제희의 가슴이 울렁였다.
아무튼 내관도 따돌리고 홀로 다니던 제희는 그날 이후로 호위를 데리고 객잔을 지켰다. 호위를 시켜 미행하여 음인의 출신이나 본가를 알아낼 참이었다. 그래야 다른 만남을 해 볼 수 있을 터다. 단풍놀이도 좋고 뱃놀이도 좋았다. 다만 그것은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였다.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를 구경하거나 언 물에 배를 띄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데 이 중요한 시기에 행궁에 끌려가고 있다니 원통할 따름이었다.
반나절 정도의 길지 않은 행차 후에 도착한 동북쪽의 행궁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다만 제희는 가교에서 내려온 후에도 여전히 음인 사내를 생각 중이었다.
정 여의치 않으면 바로 혼담을 넣어야지. 그이의 배경이 어떠한지 모르나 태자비 후보로 올리는 일이니 집안에서도 환영할 터다. 그러면 그 놈팡이 따윈 쉽게 물리쳐질 테고. 지위를 이용하여 겁박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음인의 눈에 끼인 콩깍지를 보아 하니 그 정도는 해도 될 성싶었다. 음인 사내인데 모후께 명단이 있으려나? 다시 만나지 못하면 모후를 통해서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어, 제가?”
한창 혼례 계획에 빠져 있던 제희를 일깨운 건 그리던 음인의 목소리였다. 번쩍 정신이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희의 친애하는 외숙과 조금 전까지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던 음인이 나란히 서서 제희를 보고 있었다.
제희의 시선이 닿자 헌원이 배례했다. 옆에 섰던 백아도 헌원을 따라 예를 올렸다.
“아시는 사이입니까?”
“어…… 그게…….”
헌원의 질문에 백아는 곤란한 표정을 했다. 제가를 만난 경위를 밝히려면 헌원을 미행했던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말할 수 없던 탓이었다.
‘외숙이 존대를 하는 걸 보니 신분이 높군, 태자비로도 괜찮겠어.’
그에 비해 아직 제 생각에 빠져 있던 제희는 곤란해하는 백아를 뒤늦게 눈치챘다. 그때와 지금의 옷차림이 확연히 다른 걸 보니 확실히 그때는 몰래 빠져나온 것이렷다. 제희는 이번이 점수를 딸 기회라 여겼다. 비밀일 테니 숨겨 줘야겠지?
“잠행을 나갔을 때 마주친 적이 있어요, 외숙.”
“그렇습니까? 백아가 호명하는 이름을 보니 또 이름자를 성으로 쓰셨군요. 폐하께 그리 꾸지람을 들으시고선…….”
“하하, 비밀로 해 주세요, 외숙.”
그런데 왜 외숙과? 헌원과 담소를 주고받던 제희에게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헌원이 다시 예를 올렸다.
“인사드립니다, 전하. 내자와 함께는 처음인 듯합니다.”
“전하?”
“예, 백아. 이 나라의 기둥이신 태자 전하십니다. 황후이신 희원 누님의 맏아드님이시고요.”
헌원의 소개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제희와 백아 대신 뒤에 섰던 천희와 단이가 움찔했다. 제희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쪽은.”
“이야기는 들으셨을 거로 압니다. 제 내자입니다.”
그제야 제희의 눈에 관심을 두었던 음인이 외숙과 손을 꼭 맞잡은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란히 서 있는 모양새도 어디로 보나 부부나 연인의 그것이었는데 제희 저 혼자 다르게 보고 있던 듯했다. 콩깍지는 제희 자신이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제희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 상황을 정리했다.
제가 그리 깎아내렸던 음인의 정인이 외숙이었다. 외숙이라면 진즉에 각인으로 유명했고…… 그런 외숙이 기루를 드나들었다면 정말 말씀하신 대로 일일 테다. 각인은 다른 이를 보지 않으니 말이다.
“인사드립니다. 태자 전하.”
사감 없는 인사에 이미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제희의 기대가 무너져 내렸다. 아니, 사감이 섞이긴 했다. 제희가 지난 만남을 언급해 헌원에게 외출을 들키면 어쩌나 하는 사감이었다. 제희 자신에 대한 감정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외숙의 정인은 이름도 아명도 아닌 가명을 제희에게 알려 주었다.
“흑아라 하지 않았습니까?”
쇳소리가 섞인 제희의 물음에 백아가 움찔했다. 헌원이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 이름을 말씀하셨습니까?”
“으응…….”
“한때의 재미로 지었던 이름입니다. 저자에서 만나 그 이름을 쓰셨나 봅니다.”
역시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게 패인인 걸까? 아니, 외숙의 정인이면 제희 자신이 모후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각인했다 들었는데……. 초여름쯤에 쌍방 각인이란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애초에 제희에겐 승산이 없던 이야기였다.
잘난 게 아니라 먼저 났어야 했나.
태자 제희는 망연히 다정한 부부를 바라보았다.
* * *
행궁에 오는 동안 내내 밝았던 백아의 표정이 어두워진 건 태자를 마주한 이후였다. 백아는 아닌 척하려는 듯했지만 애써 짓는 미소가 확연히 달라 헌원의 눈에 빤히 보였다. 헌원은 백아의 얼굴에 근심이 서린 이유를 짐작했다.
“태자 전하께 거짓 이름을 말씀하신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헌원의 질문에 바닥에 시선을 두고 걷던 백아가 슬쩍 헌원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보는 헌원의 눈치를 살피던 백아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은 백아를 달랬다.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노한 기색도 아니셨고…….”
그러나 헌원의 위로에도 백아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근심이 큰 모양이었다. 헌원은 성큼 발을 내디뎌 백아를 마주 보고 섰다. 백아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들어 올리기 전에 헌원이 허리를 숙여 백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무예를 가르친 적이 있어 제 말씀은 귀담아들으십니다. 제 배필인 백아 또한 태자 전하의 외척이니 분명 호의를 베푸실 겁니다.”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달래는 말에도 백아의 표정은 영 나아지질 않았다. 백아는 오히려 헌원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마요.”
“노여움을 살까 그러십니까?”
“아…… 으응.”
백아는 헌원의 물음에 입으로만 긍정하고 눈은 그러하지 않았다. 헌원이 계속 바라보자 눈을 피한 백아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아 헌원은 잠시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물러났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평소처럼 진득하게 백아를 달래며 긴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치 않았다. 이후로는 계속 연회에 함께 참석해야 하니 석찬 이후 행궁에 마련된 침소에서나 긴 대화가 가능할 성싶었다.
그때까지 백아의 기분을 어찌 풀어 주어야 하나 고민을 하며 걷는데 백아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 저들이 와 있어요?”
백아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곱게 성장을 한 한 무리의 무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앞장선 건 헌원도 아는 인물, 무화였다.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