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유난히 긴 시간이 걸려 다시 침소로 돌아왔다. 백아는 헌원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며 왜 제가 서운한지 고민했다. 사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듯싶었다.
사내를 만나기 전, 미행을 나설 때부터 백아는 불안했다. 미행을 나섰던 건 늦는 헌원을 기다리다 그런 거였고, 마음이 불안해진 결정적인 계기는…….
아, 기억났다.
불안의 기저에 지난번 읽은 서책이 있었다. 백두음과 앵앵전. 사마상여와 장생. 사마상여는 두 마음을 품었고 장생은 다른 이를 품었다. 백아는 헌원을 다른 이와 나누기도 싫고 헤어지기도 싫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지……? 매달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앵앵은 장안에 있는 장생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장생은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둘은 헤어져 서로 다른 짝을 만났다. 그렇다고 백아가 탁문군처럼 글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라 시를 지어 마음을 돌릴 재주도 없었다. 노래를 잘하여 즐겁게 할 재주도 없었고 무예를 잘하여 헌원을 지켜 줄 수도 없었다.
백아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헌원을 기다리는 것. 기쁘게 하는 것. 그 외엔 아무 재주도 없었다.
“잠이 안 오십니까?”
“……응.”
“제가 괜히 욕심을 내어 잠을 깨웠나 봅니다.”
“아니에요.”
백아가 헌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자 헌원이 백아를 다독였다. 백아는 계속 이야기를 되뇌었다. 헌원을 기쁘게 하지는 못할망정 괜히 걱정하게 하면 아니 될 것 같았다. 백아는 복잡한 머리를 추스르고 잠을 청하려 애썼다.
며칠간 좋았던 기분은 서신을 본 이후 날아갔다. 백아는 헌원이 없는 낮 시간엔 부쩍 울적해했다. 다시 미행을 해 보자던 단이는 헌원이 매일 일찍 귀가하자 입을 닫았다. 천희는 홀로 미행을 해 본 모양인지 안심해도 된다 했다. 단이와 천희에게 그런 위로를 받아도 백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헌원이 귀가해야 백아는 밝은 얼굴을 되찾았다. 이전엔 그렇지 않았던 터라 단이는 그것이 더 걱정되었다. 이번엔 원인이 헌원인지라 이전처럼 헌원에게 고할 수도 없었다. 단이는 천희와 머리를 맞대고 백아의 기분을 낫게 할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작은 마님, 이거 읽어 보실래요? 방물장수가 그러는데 근래에 인기 있는 소설이라지 뭐예요. 한동안 세책방에 안 갔더니 소식도 늦었어.”
오전에 저자에 간다 허락을 맡았던 단이가 웬 꾸러미를 들고 귀가했다. 지난번 진원의 선물과 비슷한 꾸러미였다. 안에는 서책이 있음이 분명한 모양새라 최근 서책엔 흥미를 잃어버린 백아는 단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가던 세책방에선 구할 수 없다 하여 다른 곳에서 빌렸어요.”
백아가 받아 들지 않자 단이는 직접 꾸러미를 펼쳤다.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겉장이 보였다. 단이가 설명을 붙였다.
“향인들의 이야기라니 보시는 게 어때요?”
내용에 귀가 솔깃했다기보단 제 기분을 낫게 하려 저자까지 다녀온 단이에게 미안하여 서책을 폈다. 한동안 습자와 서책을 멀리했더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옆에서 제 기분을 북돋우는 단이의 기대를 무시할 수 없어 책장을 넘겼다. 더듬더듬 넘기다 보니 중간권인 듯했지만 시늉만 할 생각인 백아는 개의치 않았다.
건성으로 서책을 훑던 백아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발품을 판 보람이 있자 덩달아 즐거워진 단이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재미있어요? 제게도 읽어 주세요.”
“네가 읽기엔…… 놀랄 내용이 많은데.”
“그래도요.”
단이의 재촉에도 백아는 조금 망설였다. 백아는 편 부분을 다시 읽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백아는 단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작은가 봐.”
“예?”
“백 년 묵은 거북이라 써 두었어. 나는 천 년 묵은 거북이라 써 두었는데.”
“천 년 묵은 거북이를 본 적이 있으세요?”
“진원의 정원에 있는 거북 말이야. 십 년 묵은 놈이라는데 머리가 엄지 하나만 하잖아. 백 년은 묵어야 손가락 두 개만 해진다는데 그럼 천 년은 묵어야 헌원에 댈 만하지.”
헌원의 이야기에 신이 난 백아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백아의 설명을 듣다가 뒤늦게 천 년 묵은 거북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한 단이가 꺄악 소리를 질렀다.
“저는 팔뚝이나! 등을 말하는 줄 알았잖아요! 어쩜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셔!”
백아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높은 단이의 목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도 단이의 말엔 꼬박꼬박 대답하여 단이의 비명이 멎지 않았다.
“팔뚝은 너무 두껍잖아. 헌원의 팔뚝은 내 허벅지만 한데.”
“큰 거북은 백 년 묵은 것이 그만한 크기도 있…… 아니야! 그만하세요! 더 말씀 안 드릴 거야!”
“아, 그런 거북은 백 년 묵은 것도 크겠구나.”
백아가 이어 소설에 나온 표현을 언급하여 단이는 낯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말을 할 때마다 비명을 질러 대니 백아는 곧 단이를 골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히며 단이는 백아의 기분을 살폈다. 그러나 소설로도 백아의 기분은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즐거움을 찾아 반짝이던 눈빛엔 구름이 드리운 듯 흐렸고 늘 앞이나 위를 바라보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단이를 골리던 입은 금세 한일자로 다물려 볼우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과라도 드실래요? 무화과 말린 것이 아주 달아요.”
“어…… 아니.”
입에 달고 살아 적게 드시라 만류해야 했던 주전부리마저도 거절하는 터라 단이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럼 국화차는 어떠세요? 저는 실컷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말라요.”
“그러자, 그럼.”
단이는 과장되게 가슴을 쳐 가며 애써 백아의 대답을 받아 내었다. 백아가 대답을 번복할까 급히 일어선 단이는 침소를 나선 후에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저녁 귀가한 헌원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황가의 나들이에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행궁이요?”
“예, 입동이 오기 전 마지막 단풍을 즐기고자 하신답니다. 그에 참석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백아의 기억에 황제인 홍윤은 진노한 목소리로 헌원을 질타하던 모습만 남아 있었다. 그 불호령에 헌원을 잃는 줄 알았다. 황후께서는 인자하셨는데. 어렸을 적 황후께 안긴 적도 있다 들었지만 백아의 기억에 말을 나누어 본 건 황궁에 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든든한 큰누님 같은 서원 누님에 비해 황후 폐하는 인자한 모친 같았다.
“태자 전하도 함께하신다 하고요. 태자 전하는 뵌 적 없으시지요?”
그리고 황제 폐하는 백아를 태자비로 준다며 헌원을 겁박하였는데. 그때의 서러움이 생각나 백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싫으십니까?”
“싫은 건 아닌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하고 백아는 말을 골랐다.
“폐하가 두려워요.”
“폐하는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하늘의 적자이시니 두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헌원은 뜸을 들이며 백아를 보다가 빙긋이 웃었다.
“그때는 농을 하신 것이니 근심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백아.”
“농을 그리 무섭게 하는 이가 어디 있어.”
“폐하시니까요.”
헌원은 소과에 이어 대과까지 급제를 하였지만 황제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말단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진노하신 건 아니었던 듯 헌원에게 종종 과제를 내리거나 하며 헌원을 시험했다. 헌원은 황제가 내린 과제나 임무에 누구보다 훌륭한 답안과 결과를 내며 성실히 이행했다. 황제를 위한 칼날을 꾸준히 갈고닦아 늘 예리하게 벼려 놓는 것, 그것이 헌원이 바치는 충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헌원을 말단에 두고 있었는데 지난번의 일도 그렇고 슬슬 마음을 돌려 중용하시려는 모양이었다.
황제 부처가 함께하는 행궁행에 부르는 것이 그 증거였다. 황가의 나들이에 황실의 일원도 아닌 외척을 부르는 게 겉보기만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헌원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백아를 보았다. 헌원의 눈엔 언제나 어여쁜 백아였다. 지난번 백아를 보시고 누그러지신 걸까. 누구라도 백아를 보면 그러할 것이다. 백아는 헌원에게 복덩이였다.
“정 싫으시면 어렵겠다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폐하의 화를 누그러트릴 좋은 기회긴 했지만 백아가 싫다 하니 어쩔 수 없다. 헌원에겐 늘 백아가 우선이었다.
백아는 헌원을 살폈다. 헌원의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헌원이 아쉬워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헌원이 곁에 있을 거잖아. 괜찮아요.”
순간 스친 생각이었다. 행궁에 같이 가 있는 동안엔 무화와 연락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백아는 헌원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못 될지언정 헌원을 방해하진 말아야 했다. 황제 폐하와 함께하는 나들이라면 분명 헌원에게 좋은 일인데 백아가 싫다 하여 가지 않으면…… 천자께 미움을 사면 날벼락이 떨어진다 했다. 저 때문에 헌원이 고생을 겪게 하기는 싫었다.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