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백아의 중얼거림에 헌원이 이마를 짚어 열을 재었다.
“열은 없는데…… 한기가 듭니까? 몸이 떨립니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요, 백아.”
백아는 대답 없이 헌원의 품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헌원은 백아를 안아 들고 침소로 들었다. 유난히 찬 기운이 도는 침소에 화로의 불씨를 키우고 단이를 시켜 침상에 두꺼운 포단을 한 겹 더 깔았다.
백아를 침상에 앉히고 옷을 갈아입은 헌원은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백아를 꼭 끌어안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백아는 헌원을 마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을 미행한 일은 비밀이니 머릿속의 고민은 늘어놓을 수 없었다. 이제 단이가 단속을 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았다. 괜한 미안함과 서러움에 헌원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등과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했다.
“으응, 늦길래요. 헌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들까 봐.”
무화를 회유하느라 그간 백아와 보낸 시간이 짧았다. 관의 일이라는 헌원의 변명에 참고 참으시다가 더 견디지 못하고 터지신 모양이었다. 배움으로 길어진 인내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기다리도록 한 게 미안했다. 백아가 저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 없게 하여야 했는데.
그나마 금일로 담판을 짓고 온 터라 백아에게 조금이나마 낯이 섰다.
“내일부턴 귀가가 이를 듯합니다.”
“정말?”
“예, 일이 일단락되어 이제 소식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금세 환해지는 백아의 표정이 안타까웠다. 헌원은 백아를 감쌌던 손을 들어 제 품에 비비적대어 엉망이 된 백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겼다. 유난히 애틋한 손짓이었다.
“상을 줘요.”
“예?”
“기다렸으니 상을 줘.”
사실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백아는 그만큼 헌원이 고팠다. 헌원을 머금거나 품고 싶었다. 기다린 건 사실이니 상을 받는 것이 옳다.
조금은 뻔뻔한 백아의 표정에 헌원은 짙게 미소 지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좋은 것’을 청하던 때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당당히 상을 요구했다. 그때의 수줍은 모습도 좋았지만 지금의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헌원은 백아의 요구에 섞인 초조함을 그간의 소홀함 때문이라 받아들였다. 그를 해소하는 방법은 언제나 같다. 백아를 더 아끼고 더 사랑해 드리면 된다. 복잡한 일만 해결되면 절대 서운하실 일 없도록 함께하리라.
“응? 헌원.”
이어지는 백아의 보챔에 헌원이 지체 없이 입술을 덮었다. 헌원의 입술이 닿으니 울적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분이 좋아진 백아의 색향이 급격하게 피어올라 헌원을 감쌌다.
오랜만에 맡는 정인의 색향에 헌원 또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한껏 달아올랐다. 그간 걱정이 앞서 잠시 잊고 있던 색향은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인의 색향은 흥분제이자 각성제지만 모든 근심의 안정제요 치료제이기도 했다.
백아의 상의를 벗긴 헌원은 색이 탁해져 있는 꽃잎을 보았다. 그에 비해 헌원의 꽃잎은 큰 근심을 하나 내려놓아서인지 색이 붉었다. 그간 백아의 꽃잎을 확인할 수 없었던 건 걱정으로 가득 찬 헌원의 꽃잎 색이 지금 백아의 색과 꼭 같아서였다.
서로의 꽃잎을 확인하는 것이 일종의 절차가 되었기에 헌원은 백아의 꽃잎을 보며 위로받고 싶어도 백아가 걱정할까 제 꽃잎을 드러낼 수 없었다. 스스로 다짐한 일임에도 백아의 꽃잎 색에 가슴이 아팠다.
“제가 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벌?”
“백아가 이리 마음을 졸이셨을 줄은…….”
헌원이 말을 흐리며 백아의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주위를 가득 채운 색향에 헐떡이던 백아는 바짝 서 있는 돌기를 저 스스로 헌원에게 문질렀다. 헌원이 매만질수록 기다리느라 짙어진 백아의 꽃잎 색은 서서히 탁한 기가 물러가고 맑고 진한 홍색이 자리를 채웠다.
그 모습을 본 헌원은 오늘은 백아를 마음껏 위로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헌원은 한껏 어우러지는 색향을 느끼며 백아에게 몸을 실었다.
다음 날부터 헌원은 백아에게 한 말을 지켜 칼같이 귀가했다. 전일 새벽녘까지 몸을 섞고 느지막하게 일어난 백아는 오늘은 미행을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는 단이의 걱정에 미소를 지어 주었다.
“오늘은 일찍 온댔어.”
백아는 제시간에 오는 헌원을 반기며 문득 사내를 떠올렸다. 사내를 다시 보고 싶진 않았지만 그가 했던 말이 틀렸다고 쏘아붙여 주고는 싶었다. 백아의 헌원은 사내와는 달라- 하고 말이다.
전과 다름없는 날이 며칠째 이어지자 백아는 근심했던 일을 거의 잊었다. 퇴청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 헌원이 더 좋아져서이리라. 백아는 기다리지 못하고 대문까지 헌원을 마중 나갔다. 때마침 오는 헌원을 맞이하고 함께 별채로 걸음을 옮긴 찰나, 밖에서 누군가 헌원을 찾았다.
“이 관원을 뵙길 청합니다.”
담 넘어 안까지 들리는 쩌렁쩌렁한 소리에 헌원과 백아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대문을 보았다. 오래지 않아 문지기가 달려와 아뢰었다.
“작은 주인께서 보셔야 할 듯합니다. 웬 서간을 가져온 심부름꾼인데 작은 주인께 직접 전하겠다 합니다.”
“들라 하…… 아니 내 직접 나가지. 백아,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헌원은 백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문으로 향했다. 백아가 성큼성큼 걸어 대문을 나서는 헌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아직 헌원을 따라가지 않은 문지기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저 사람이 무슨 일로…….”
“아는 자야?”
“왜 그 있잖습니까, 별채 마님께서 가출하셨을 때 거 기루에 계신다 행방을 전했던……. 또 무슨 사고라도 치셨습니까?”
백아의 물음에 농담을 던지던 문지기는 대문 너머로 사라졌던 헌원이 다시 나타나자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헌원은 손에 서신을 들고 있었다. 백아는 그것에 눈길을 주었다.
“뭐예요, 헌원?”
“전에 말씀드렸던 기다리던 소식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헌원의 대답이 거슬렸다. 문지기의 말대로라면 헌원의 손에 들린 서신은 단화각의 무화가 보낸 것이었다. 그걸 기다렸다고? 다가오는 헌원을 보던 백아는 헌원이 이상해하기 전에 몸을 돌렸다.
백아가 돌아서자 성큼 보폭을 넓혀 한걸음에 백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 헌원은 백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전혀 달라지지 않은 태도였다. 무언가 속이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당당하진 않을 텐데. 그럼 정말로 관의 일일 텐데. 백아는 사내가 엉뚱한 소리를 하여 저까지 공연히 의심하는 것 같다 생각했다.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백아와 함께 별채로 들어선 헌원은 평소와 달리 백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확인하고 침소로 가겠습니다.”
백아는 잠시 망설이다 서신을 확인하러 간 헌원을 쫓아 서재로 향했다. 백아는 서재의 주렴 너머로 헌원이 서신을 등불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 서신을 다 태운 헌원은 서신을 담았던 봉투까지 태워 꼼꼼하게 흔적마저 없앴다. 그 모습을 보며 헌원에게 다가간 백아가 물었다.
“태워도 돼요?”
“……예, 그리해야 하는 서신입니다.”
헌원의 대답이 맞을 텐데 백아는 이상하게 탐탁지 않았다.
단화각에서 온 서신을 왜 태울까? 관의 일에 장계를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 한 건 헌원이었는데. 저렇게 태워 버리면 증거가 남지 않는다.
내게 보여 주면 안 되어서? 얼토당토않은 것 같았지만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백아는 여름밤 헌원이 해 주었던 이야기 중에 제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떠올렸다. 이래서 의심암귀라 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고개를 든 의심은 자꾸 생각을 나쁜 쪽으로 몰았다. 이럼 안 되는데. 백아가 기루에 갔을 때도 헌원은 한눈에 백아에게 아무 일이 없다 확신했는데.
“어디 좋지 않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백아는 다정한 눈으로 기분이 저조한 자신을 살피는 헌원에게 미안했다. 백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헌원은 단이를 불러 따스한 꿀물을 가져와 백아에게 먹이고 이른 시간임에도 침상에 누워 품에 안고 다독였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백아는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나 헌원은 백아가 잠든 걸 확인하고 슬그머니 침상에서 일어났다. 얕은 잠이 들었던 백아는 서늘해지는 잠자리에 잠이 깨어 헌원이 침소를 나서는 걸 보았다. 헌원의 그림자는 침소의 벽을 타고 돌아 서재로 이어졌다.
뜬 눈으로 어두운 침소 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난 백아는 헌원을 따라 서재로 향했다. 등잔을 켠 서재에 가까이 가자 서탁에 앉아 무엇을 적는 헌원의 그림자가 보였다. 백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헌원은 쓰던 걸 멈추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헌원이 없어서.”
헌원은 백아가 다가서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반쯤 접은 선지의 뒷면에 붉은 인주 자국이 비쳐 백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날인까지 하였으면 작성 후의 정리라는 걸 백아도 알고 있음에도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여 왠지 서운했다.
어설프게 잠이 깬 멍한 머리로 헌원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데 다가오던 헌원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 백아의 발등에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신도 신지 않으시고……. 시리지 않았습니까?”
“……몰랐어요.”
“잠시 쓸 것이 있어 나왔는데 제 불찰입니다. 들어가 쉬어요, 백아.”
헌원은 걸친 직거포를 벗어 백아에게 둘러 주었다. 헌원의 체온이 옮아 따스한 포는 백아의 발등까지 덮었다. 헌원은 백아의 오금에 손을 넣어 백아를 들어 안았다.
“무얼 썼어요?”
헌원이 글을 쓰는 것엔 의아해하지 않던 백아의 물음이라 갑작스러웠다. 헌원이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백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관의 일이에요?”
“……예.”
“또 늦게 와요?”
“아닙니다, 그저…….”
“그럼 됐어.”
무언가 헌원의 대답이 듣고 싶었는데 듣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도 백아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서운한데 서운하다 말하기도 싫었다. 대신 헌원의 목에 팔을 감았다. 헌원이 걸쳐 주었던 포가 흘러내려 팔에 찬 공기가 닿았다. 헌원은 백아를 고쳐 안으며 다시 포를 둘러 주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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