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수기와 장부. 연관이 있나. 헌원을 보는 무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무화의 직감이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이 관원이 그를 알게 될 경로는? 저자에 널리 퍼진 이향애록. 그렇다면 그 수기에 담긴 내용은? 무화는 제법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상기했다. 설마…… 하지만 그 이유라면 이 관원의 행동을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진진인데……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진진은 장안 태생이니 정인과 함께 갈 곳이라곤 정인의 고향뿐이었다. 그도 그리 먼 곳 태생은 아니라 왕복 보름쯤이면 소식이 닿을 거리였다. 사실 이 관원이 찾을 때부터 사람을 보내 두었다. 만일을 대비하려 함이었다. 곧 기별이 올 터다.
“흡족하진 않지만 그동안의 정성도 있으니 이쯤 하여 의뢰를 받겠습니다. 진진과 소식이 닿게 되면 기별을 드릴 터이니 그때까진 정인과 시간을 보내시어요.”
마지막 말에 이 관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화를 보았다. 무화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만을 지었다. 잠시 표정을 굳혔던 이 관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를 저렇게 주살나게 드나드는 이는 포기하는 게 낫지 않아?”
차마 단화각에 들어서지 못하고 등을 돌린 백아에게 예의 그 사내가 빈정대듯 말을 걸어왔다.
“관의 일이라 했어.”
“사내들이 흔히 주워섬기는 변명이 아닌가. 그걸 믿어?”
“…….”
“매일같이 기루를 드나드는 이는 상종도 하지 마.”
이어지는 사내의 주제넘은 충고에 백아가 우뚝 멈추었다. 사내는 백아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천희가 경계했다. 객잔에서 호되게 맞은 기억에 천희가 검집을 올리기 전에 재빠르게 물러난 사내는 피한 것을 자축하며 씨익 웃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음인이지?”
이번엔 단이가 백아와 사내 사이를 몸으로 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향인인 걸 들키지 말라 하던 단이의 신신당부를 떠올린 백아도 움찔했다.
“어, 어떻게.”
“사내에게 여성 호위가 따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 게다가-.”
“게다가?”
“단화각. 호기심에 드나드는 평인도 많다지만 자네나 자네 정인은 그 연유가 아닐 테지.”
사실 사내는 백아가 정인을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부터 확신했다. 보통 여인이 객잔이나 기루를 홀로 드나들진 않을 테니 저이의 정인은 사내일 것이고, 사내가 사내를 정인이라 당당히 밝힌다면 그는 사내와 사내가 혼인이 가능한 향인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눈앞의 음인은 모르는 듯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 곱게 자라 그러한가 짐작했다. 호위뿐 아니라 몸종까지 줄줄이 달린 것도 그러하고, 하기야 곱게 자란 건 곱상한 낯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제가는 양인이야?”
“응.”
사내의 수긍에 그렇지 않아도 사내에게 가시를 세우고 있던 단이가 이제는 완전히 사내를 경계했다. 백아는 순순히 향인임을 밝히는 사내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걸 왜 자네에게 털어놓느냐 하면, 자네에게 관심이 있어 그래. 진지하게 고려해 주게, 나는 어때?”
사내의 말에 백아는 할 말을 잃은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응.”
“매일같이 기루를 드나드는 이는 상종하지 말라며.”
사내가 했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는 백아의 말에 사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찾아 나설 정도로 자신만 바라보는 정인을 두고 기루나 드나드는 이는 눈앞의 음인에게 아까웠다.
“그랬지.”
“그는 제가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번엔 사내가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저자로 나선 첫날부터 정인을 기다리는 음인을 지켜보느라 기루는 문턱도 밟지 않았건만 눈앞의 음인이 보기엔 거리를 지나치는 한량들과 다를 바가 없을 터다.
“하하, 그렇군.”
시작부터 잘못 여민 단추였다. 사내는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지 고민했다.
“그럼 다음엔 다른 곳에서 볼까? 좀 더 일찍 보아도 좋고. 성 밖 산사의 단풍이 예뻐.”
조금은 기가 죽은 사내의 말에 백아보다 먼저 단이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신장이나 더 키우고, 추근거리지 마요.”
육 척이 넘는 신장을 더 키우라는 말에 사내는 황당한 눈으로 그 말을 한 단이와 자신을 훑었다. 눈을 들어 보아도 자신의 신장은 자신에게 빈정대는 몸종은 물론이거니와 구애의 대상이나 그 호위보다 반 뼘은 컸고 지나는 행인들 중에서도 큰 축에 속했다.
“이 정도면 작지는 않은데.”
“작아.”
이번엔 백아의 대답이었다. 사내는 앞의 둘이 자신의 신장을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인이 훤칠하신가 보군.”
단이가 이제야 알아들었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정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주인부터 아랫것들까지 신뢰가 대단했다. 저들을 모두 회유하는 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듯했다. 제 첫인상이 좋지 않은 탓에 앞으로의 험난함을 예상한 사내가 입을 비죽였다.
그래 봐야 매일같이 기루를 드나드는 이가 뭐 그리 잘났다고. 사내는 잘난 걸로 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했다.
대로의 한편에 서서 실랑이하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천희가 귀가를 재촉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한번 봐 주시라니까. 적어도 기루를 드나드는 정인보다 자네에게 성실할 자신은 있네.”
백아는 자꾸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내를 외면했다. 이제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 백아에게 사내가 다시 따라붙었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지? 나는 알려 주었으니 자네 이름이라도 알려 주게.”
백아는 평소 불리는 이름을 말하려다가 망설였다. 헌원을 폄하하는 이에게 이름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흑아, 흑아라 불러.”
백아는 순간 떠오른 다른 이름을 대었다. 헌원이 싫어했던 이름이니 저자의 사내에게 알려 주어도 상관없을 터다.
“이름이 어색한데…… 자네에겐 흑보단 백이 어울려. 아명인가?”
“그래.”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사내의 물음에 백아는 흠칫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땐 남달리 까맸는데 크며 해를 보지 않으시더니 이리 하얘지셨어요.”
백아의 거짓말에 단이가 옆에서 열심히 맞장구쳤다. 사내가 미심쩍어하는 듯해 백아는 애써 머리를 굴린 이유를 덧붙였다.
“제가도 이름은 말하지 않았잖아.”
“영리하네. 그래 뭐, 통성명은 좀 더 안 이후에 해도 되니까. 내일 또 봐!”
사내를 다시 보고 싶진 않았지만 사내의 말대로 헌원은 내일도 단화각으로 향할 것 같았다. 백아가 헌원을 다시 쫓는다면 사내는 또 만나게 될 터다. 시무룩해진 백아는 사내의 배웅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승상가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구름 낀 밤하늘만큼 무거웠다.
시간이 늦어 헌원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서둘렀는데 백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엔 헌원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단이의 도움을 받아 얼른 옷을 갈아입은 백아는 계속 침소에 있었던 것처럼 책을 펴고 자리에 앉았으나 좌불안석이었다.
헌원이 평소보다 더 늦었다. 시간을 확인한 백아는 내내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늦은 귀가를 열흘 만에 평소라 여기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늘은 헌원이 그보다 더 늦어 울적했다.
어여쁘냐 묻는 헌원의 말에 무화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 전에 읽은 소설에서 기생은 시서화에 능하다 했다. 악기도 잘 다루고 춤을 추려면 날랜 몸이 우선이니 무예도 곧잘 할 테고. 어머님께 들으니 무화는 상단도 운영한다 했다. 어여쁘고 영리하고 날래고…… 백아가 갖추지 못한 것은 다 갖추어 어느 모로 보나 백아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 걸까? 헌원은…….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헌원인가 하고 뛰쳐나갔다. 별채의 마당엔 아무도 없고 벽의 모란문 창살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헌원이예요?”
“아닙니다, 아범입니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실망한 백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목소리에 작은 원망이 묻어 나왔다.
“아범은 왜 거기 있어?”
“낮에 낙엽을 쓸다 열쇠를 떨어트렸지 뭡니까. 돌아다니며 찾던 중이었…… 어이쿠, 찾았다.”
“거기 있어?”
“예, 있습니다. 쌀쌀하니 안에서 기다리세요.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범이 사라진 후에도 백아는 침소로 들어가지 않고 가을밤 서늘한 밤공기를 맞으며 마당을 서성였다. 백아가 귀가할 때와는 다르게 구름이 걷혀 달이 밝았다. 헌원이 귀가하는 길이 어둡진 않아 다행이었다.
백아가 별채 앞을 서성인 지 오래지 않아 귀가한 헌원은 백아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백아는 저를 감싸는 옷깃에 묻은 밤공기가 서러웠다.
“날이 쌀쌀한데 침소에 계시지 않고요, 겉옷도 챙기지 않고…….”
품에 안긴 백아가 헌원을 꼭 끌어안는 통에 헌원은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백아는 헌원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추워요, 헌원.”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웠다. 일의 핑계가 흔한 변명이라는 사내의 주제넘은 충고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헌원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단화각에 열흘이나 간 걸 백아에게 말하지 않았다. 전엔 관의 일이라도 관원들과 나눈 이야기나 관청에서의 일과도 종종 이야기해 주었는데. 최근의 헌원은 백아에게 늦은 귀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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