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57화 (57/66)

외전 13화.

천희가 계속 얼쩡대는 사내를 쫓아 보내지 않는 건 천희를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자에서 만나는 한량들은 천희가 여자인 것을 만만히 보고 덤비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사내는 제 실력을 아는지 천희를 업신여기지 않고 자신보다 실력자인 천희가 상대가 안 된다 하니 바로 꼬리를 말았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어?”

백아는 천희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천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예, 그런데.”

“그런데?”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셔도 보시기는 어렵습니다.”

“앞장서.”

천희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백아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단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천희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거 앞장서라면 서게. 예까지 나왔는데 가서 직접 봐야 마음을 정하실 것 아닌가?”

그때까지 옆에서 엄살을 피우던 사내가 백아를 거들었다. 사내는 천희가 노려보자 다시 얻어맞은 팔을 문질렀다.

백아의 표정이 여전히 단호해 천희는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거리는 오가는 이가 많을 뿐 그리 길지는 않았다. 천희가 가는 방향에 있는 건물을 본 백아는 우뚝 멈춰 섰다.

백아의 기억에도 있는 곳. 겨우 지난 초여름의 일이었다.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따라가던 길은 무화를 보느라 기억하지 않았지만 건물에 들어서기 전 높고 화려한 외양에 감탄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은 있었다. 백아의 눈앞엔 단화각이 있었다.

상단의 일을 돌아보고 각으로 돌아온 무화가 겉옷을 막 벗어 건넨 참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시동이 무화의 눈짓에 입을 열었다.

“오늘도 또 왔어요, 각주.”

요사이 단화각을 들뜨게 하는 흥밋거리가 생겼다. 열흘 전부터 단화각 이 층 한편에 자리 잡아 정확히 한 시진을 기다리다가 자리를 뜨는 이 관원 덕분이었다.

부러 사방이 탁 트인 자리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기루에서 풍류를 즐기기보단 무언가 청을 하러 왔다는 것이 역력한 태도였다.

헌원은 단화각에서 낼 수 있는 술 중 가장 값진, 다섯 번을 발효한 백주를 주문했으나 정작 내온 술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부르는 것도 아니요, 일 층의 가무를 즐기는 것도 아닌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고지식하긴. 저이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리 애지중지하는 정인을 이유라 짐작할 테고, 아마 실제로도 그러할 터다.

열흘 전, 무화각에 갑자기 나타난 헌원은 평범한 차림에도 귀티 나는 용모에 모시겠다 앞다투어 나서는 이들을 죄 물리고 무화를 찾았다.

“지난번 치르지 않은 대금을 갚고자 하오.”

이 관원의 등장을 제법 흥미롭게 보던 이들은 큰 소리로 외치는 이 관원의 말에 이내 흥미를 잃었다. 지난번 이 관원이 그 정인을 위해 단화각을 통째로 빌린 일은 단화각을 드나드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이야기였다. 무화의 기분에 따라 단화각에서 청구하는 대금이 다른 것 또한 제법 유명했다.

객들은 이 관원이 무화의 요구대로 대금을 치렀다가 뒤늦게 단화각의 매출을 알고 나머지를 갚으러 온 것이라 짐작했다. 이 관원이 융통성이 모자란 것 또한 알려진 이야기라 금에 밝은 자들은 이 관원을 보며 혀를 차고 명분에 밝은 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모두는 승상의 자제가 금전에 연연하는 것보단 제 성에 차는 대금을 치르려는 태도는 높이 샀다. 다만 색다른 흥밋거리가 아니라 지루할 뿐이었다. 일련의 일에 이 관원에게 모인 단화각의 시선이 흩어진 것 또한 당연한 순서였다.

무화의 짐작도 단화각의 객들과 다르지 않아 무화는 이 관원을 돌려보내려 했다. 대금이야 큰손께 톡톡히 받아 내었으니 이 관원은 어찌 생각하든 무화는 끝난 계산이었다. 무화의 셈은 제법 공정한 편이었다.

다만 이 관원의 귀가를 기다릴 그의 정인을 염려했다. 그 순진한 음인은 정인이 이 무서운 곳에 드나드는 걸 싫어할 테니까.

무화는 주연이 한창일 때에 회장으로 나섰다. 일 층의 단에서 벌어지는 가무에 다들 시선을 빼앗긴 참이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대금은 큰손께서 이미 치르셨답니다. 대인께는 받지 않아도 되어요.”

할 이야기가 뻔하여서 무화는 이 관원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의뢰의 대금을 치르는 건 어떻소?”

“예?”

그러나 이 관원은 무화에게 이상한 청을 해 왔다.

“진진이란 이의 행방을 알고 싶소.”

진진은 얼마 전 제 정인과 함께 단화각을 나선 아이였다.

사실 장안에 도는 ‘이향애록’은 그 아이의 작품이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알리고 싶지 않은지 진진은 무화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라 무화는 놀라며 축하해 주었다. 글씨는 제법 쓰지만 시를 짓는 재주는 영 없는 진진이라 매번 속상해하는 것만 보았는데 시보다는 좀 더 풀어 쓰는 쪽에 재능이 있던 모양이었다. 무화는 부끄러워하는 진진에게 뒤늦게라도 적성을 찾았으니 되었다 하고 넘겼다.

아무튼 진진은 글값으로 제법 큰 돈을 마련했는지 단화각을 나서 정인과 함께 살고 싶다 청을 했다. 진진의 정인은 무화의 상단에서 표사 일을 하던 양인이었다.

그 정인도 표사 일을 몇 년은 하였으니 모은 돈이 있을 테고, 제 살 궁리는 하겠지 싶어 무화는 흔쾌히 허락했다. 단화각은 어디까지나 갈 곳 없는 음인들의 거처였으니까. 같은 필명으로 새 작품이 나오면 잘 있다 여기겠다는 농을 하며 배웅한 것이 보름쯤 전이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이 관원이 진진을 찾는 걸까? 짐작 가는 이유라곤 ‘이향애록’뿐이었다. 지난번 어린 음인을 만났을 때에 저자 소설을 읽고 기루를 꿈꾸었다 하였으니 이번엔 이향애록인 걸까. 필명을 썼다지만 알아보고자 하면 어려울 것도 없으니.

원작자의 필치라도 감상하고 싶다 한 걸까, 저이의 정인은?

“제게 묻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미 행방을 아시는 듯한데 어이하여 떠난 아이를 찾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는 곤란하오.”

순순히 대답하리라 여긴 무화의 예상과 달리 이 관원은 고개를 저었다. 무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무료한 일이 흥미로워질 것 같았다.

“대인께서 연유를 말씀하시어야 이 몸이 판단을 할 수가 있답니다. 금전에 웃음을 팔며 살지언정 의리는 있지요. 요구를 하시려거든 그 의리를 저버릴 수 있을 만한 연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관원은 난데없이 진진을 찾는 이유를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까지 말하지 않아 무화도 입을 닫았다. 다만 무화는 이 일 또한 그의 정인과 연관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 관원이 단화각을 드나드는 열흘간 무화는 연유를 짐작이라도 해 볼 수 있을까 싶어 따로 알아보았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이 관원의 정인은 지난번 단화각에서의 일 이후로 저자의 소설에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다니던 세책방에도 들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보고에 무화의 짐작도 모호해졌다. 무화는 그 음인이 승상가 안주인의 가르침을 받다가 장부의 일부를 잃어버렸다는 쓸모없는 정보만 알아냈다.

그나저나 그 어린 음인을 홀로 두는 건 괜찮으시려나. 들리는 이야기에 이 관원은 퇴청 후엔 집에 둔 꿀단지를 맛보느라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던데. 없는 사이 그 꿀단지가 또 담을 넘으면 어쩌시려고. 물론 그 꿀단지는 백아를 지칭함이었다.

지난번 호되게 혼이 나 단화각을 싫어할 게 분명한 그 어린 음인은 저이가 단화각에 드는 것조차 못마땅할 터다. 정인이 언짢아할 일을 무릅쓰고 진진을 찾는 이유가 무얼까. 걸음처럼 입도 무거우니 답답할 따름이나 한편으론 지난번과 같은 재미를 기대했다.

말 없는 방문이 열흘째가 되자 무화는 정인을 속상하게 할 저이의 방문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궁금한 것보다 따분함이 앞섰다. 따로 알아보는 것도 별 소득이 없었으니 남은 해법은 대면만 남았다.

“뜸을 들이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하니 이쯤 해 둘까.”

“예?”

“이 관원을 삼 층으로 모시렴.”

무화의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던 시동은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무화는 천천히 삼 층의 귀빈석으로 향했다.

“아직도.”

무화가 들어서자마자 헌원과 무화가 동시에 내놓은 말이 같아 무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평한 척했지만 기다림이 꽤 길었던 모양이었다. 진중한 이가 인사보다 용건을 먼저 꺼낼 정도니 말이다.

“연유를 말씀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의뢰를 수락할 마음은 없는 거요?”

무화의 질문에도 헌원은 여전히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아니면 사정이라도 있든가. 그러나 무화는 궁금하고 흥미로울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런 일은 아쉬운 사람이 지기 마련이었다.

무화는 신경전이라고 생각한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헌원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화는 미소를 띠며 경청할 준비를 했다. 연유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답하지 않겠다는 무화의 이야기를 드디어 받아들이신 모양이었다.

“……사실은 수기를 찾고 있소. 진진이란 이가 가지고 있을 거요. 그 수기만 찾으면 진진에겐 다른 책임을 묻진 않을 거라 전하기라도 해 주시오.”

헌원의 말에 무화의 뇌리에 쓸모없다 여겼던 이야기가 스쳤다. 듣기에 잃어버린 것은 장부라 했는데 이 관원은 수기라 말했다. 내실에서 작성하던 수기나 장부가 밖으로 나올 경로가 두 가지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