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56화 (56/66)

외전 12화.

이해할 수 없는 사내의 대답에 백아가 사내를 훑어보았다.

신장은 육 척을 조금 넘을까, 눈높이가 백아보단 높지만 헌원보다는 한참 낮았고, 어깨도 헌원만 보던 백아의 눈에는 좁아 보였다. 생긴 건…… 멀끔하니 봐 줄 만하지만, 까지 생각하던 백아는 제게 어여쁘냐 묻던 헌원을 떠올렸다. 백아는 평을 바꾸었다. 아니 못났다.

백아가 사내를 품평하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노골적으로 보고 있음에도 사내는 계속 웃는 낯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다만 백아는 그것이 연인이 될 주인공들의 만남 장면이라는 건 인지하지 못했다. 백아의 핀잔을 들은 사내는 이상하게 허둥거렸다. 백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더 사내를 품평했다.

목소리도 헌원보다 높은음이라 가볍게 들려 별로고, 행동도 헌원처럼 진중하지 못하고 동작이 커 경망스럽고……. 헌원은 팔다리가 길어 동작이 큰데도 저이처럼 가벼운 느낌은 없었는데. 헌원은 움직임은 날래지만 동작 하나하나가 무거워 진중한 편이었다. 검무라도 출 때면 가볍게 뛰어올라 빠르게 휘두르는데도 그 검 끝은 천 근 추가 달린 듯 무거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호…… 아니 제가요.”

“제갈?”

수상쩍은 사내의 소개에 백아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제갈이면 기억에 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아 어디의 군사라고 했다! 백아는 읽었던 소설이나 들었던 이야기에서 대부분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지만 헌원이 똑똑하다거나 현명하다고 이야기한 몇 명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제, 제가요.”

적어도 백아가 기억하는 현명한 인물의 이름 중에 제가는 없었다. 총명한 이라면 도움을 구해 볼 법도 하건만, 사내의 행실을 보나 무얼 보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실망한 백아가 다시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가 다시 백아에게 기웃거리며 입을 열려는데 마침 헌원을 쫓으러 나섰던 천희가 돌아왔다. 기대하는 백아에게 천희는 고개를 숙였다.

“놓쳤어?”

“죄송합니다.”

헌원은 분명 장안에서 가장 좋은 실력을 가진 이라고 했었는데. 헌원의 안목이 못 미더운 건 아니지만 천희에게 조금은 섭섭했다. 무예가 뛰어난 헌원이라지만 쫓는 것 하나가 어려운가? 혹여 부러 쫓지 않는 건 아니겠지?

“뭐요, 누굴 따라다니는 거요?”

가라앉은 분위기에 사내가 또 끼어들었다. 참 눈치가 없다.

“정인.”

무어라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던 백아는 짧게 대답했다. ‘부부’라는 말도 떠올랐지만 왠지 부부는 사이에 아이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어떤 아이를 낳을지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부부라 하는 건 조금 미뤄 둘 테다.

백아의 대답을 들은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사내가 백아의 행색을 훑었다.

“홀로 좋아하는 건 아니고?”

“…….”

“무례하오.”

아무렇게나 뱉는 듯한 사내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 백아가 입을 열려 했으나 천희가 대신 대답하며 백아를 잡아당겼다. 백아에게 보이도록 고개를 가로젓는 천희의 행동에 백아는 다시 사내를 외면했다. 몰래 나온 참이기도 하고 낯선 이와 굳이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못 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사내는 제멋대로 지껄였다.

“이 시간에 여기를 들락이는 이가 제대로 된 정인일 리가. 달도 밝은데 같이 달을 감상하거나 뜨거운 밤…… 아니 이건 말고, 서신이라도 쓰든가, 여하간 좋아하는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가슴을 콕콕 찌르는 사내의 말은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귀에 박혔다. 백아는 참지 못하고 사내의 말에 대꾸했다.

“……일이 바빠 그래.”

시무룩한 백아의 대답은 자신이 들어도 변명같이 들렸다. 퇴청 후에 해시까지 기루와 객잔 거리를 거니는 관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헌원은 관원이지 관졸이나 관군은 아니었다. 무과는 오래전에 포기했다 했으니까.

자신이 없는 백아의 말에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나 보네. 거 보게, 이런 데 드나드는 이는 좋아하는 게 아니야.”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사내의 말에 백아는 아예 등을 돌렸다. 헌원도 놓쳐 거리를 서성일 이유도 없던 터라 백아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급히 백아를 쫓았지만 검을 빼 드는 천희의 행동에 사내는 양손을 올린 채 뒤로 물러섰다.

인적이 드문 길은 달이 밝아 아주 어둡진 않았다. 남쪽 대로에서 멀어지자 기운이 빠진 백아가 터벅터벅 걸었다.

“내일도 나오실 겁니까?”

“응.”

“그럼 ……내일은 별채에서 기다리심이 어떠합니까?”

“왜?”

“저 홀로 미행한다면 오십 보까지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하실 겁니다. 오십 보 거리면 놓치지 않을 테고요.”

천희의 말에 백아가 우뚝 멈춰 섰다. 제가 방해된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데 틀린 말은 아니라 화를 내기도 수긍을 하기도 어려웠다.

글을 배우지 않을 거면 무예라도 배워 둘걸. 지난번과는 다른 아쉬움이 스쳤다.

“내가 볼래.”

고집인 건 알고 있었지만 백아는 헌원이 무얼 하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금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천희라도 저와 헌원의 사이에 누가 끼어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매번 헌원을 놓칠 테니 미행이 소용없었다.

다음 날, 백아는 객잔에서 기다리고 천희가 홀로 헌원을 쫓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단이는 지난 이틀간 천희가 잠시지만 백아를 두고 혼자 헌원을 쫓았다는 말에 기겁했다. 백아를 홀로 둘 수 없다며 발을 동동 구르던 단이는 결국 백아와 같이 담을 넘었다.

이틀간 헌원을 쫓은 길을 이번엔 먼저 지나쳐 백아는 단이와 함께 매번 헌원을 놓친 부근의 객잔에 자리 잡았다. 대로를 지나칠 헌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들어선 객잔은 사람이 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한적했다. 백아가 대로가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얼어붙어 따라오던 단이는 신기해하며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어릴 때부터 백아를 모시며 저자를 들락였지만 객잔은 처음인 탓이었다. 백아는 이번엔 제법 능숙하게 식사만을 주문했다.

“혹시나 하여 나왔는데 역시나로군.”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밖을 살피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백아는 못 들은 척하며 사내를 무시했다.

사내는 여전히 넉살 좋게 빈 의자를 끌어왔다. 사내를 처음 보는 단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했다. 의자를 끌어온 사내가 정말 합석하자 그를 지켜보던 단이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뉘신데 감히.”

“주인께선 아무렇지 않은 듯하니 가만히 있게.”

백아는 사내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이었지만 백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사내의 말이 맞아 보였다. 단이는 씩씩대다가 백아와 사내의 거리를 넓히고 백아의 옆에 찰싹 붙었다. 사내와 단이가 그러든 말든, 백아는 계속 밖을 살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백아를 보기만 했다. 흘끔 던진 시선에 사내와 눈이 마주쳤으나 백아는 다시 밖을 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어 무시하여 그런가 보다 하던 찰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여기서 보기만 하는 거야?”

“정인이 여기를 드나들어서.”

사내를 계속 무시하려던 백아는 아차 했지만 이미 대답한 후였다. 단이가 옆에서 소매를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정인이면 관두시게. 기다리는 이를 두고 매일같이 객잔이나 기루를 드나든다면 빤하지. 도박이거나 정분이 난 거야. 그런 인사는 못써.”

사내의 말에 백아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럴 사람 아니야. 모두 그럴 사람 아니라고…….”

“주인마님은 그럴 분 아니세요!”

백아와 사내의 대화를 듣던 단이가 참지 못하겠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내는 단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제 할 말만을 했다.

“물어보았다는 게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우리가 여기서 몇 번째 만났는지 기억해? 사흘째 매일이야. 사흘을 내리 쫓아 나설 정도였다면 이전부터 낌새가 있었겠지. 내 말이 틀려?”

“…….”

“내일도 올 테고 모레도 올 테고.”

빈정거리는 사내의 말이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르는 듯 아팠다. 백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내가 되레 머쓱했는지 말을 돌렸다.

“흠, 그런데 왜 매번 여기서 멈춰? 확인하기 무서워서 그래?”

“사람이 많아서 자꾸 놓쳐. 무예를 배운 이라 더 가까이서 미행하면 알아챌 거래.”

“내가 혼을 내 줄까? 은인의 일이니 내 도울 수 있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팔을 걷어붙이는 사내에게 단이가 빈정대었다.

“왜, 이래 봬도 내 어릴 적 외숙께 무술을 배워 한 가락 한다고. 누군지만 알려 주면…… 아야!”

소매를 걷어 제 팔뚝을 과시하려는 사내의 팔을 누가 쳤다. 헌원을 쫓기로 했던 천희였다. 팔을 맞은 사내가 엄살을 피우며 팔을 문질렀으나 자리에 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백아와 단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천희만이 제 할 말을 했다.

“상대도 안 되오.”

천희는 단이의 맞은편, 백아와 사내 사이에 자리를 잡아 사내가 백아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사내는 여전히 팔을 문지르며 슬슬 눈치를 보았다.

“쳇, 그…… 그 정도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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