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헌원은 같이 관청을 나서는 이들 중에서도 머리와 어깨가 불쑥 솟아 있었기에 천희가 제한한 이백 보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함께 나온 관원들과 헤어진 헌원은 승상가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다가 사방으로 뻗은 대로에서 방향을 틀었다. 모퉁이를 돈 헌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음이 급해진 백아가 걸음을 떼었다.
“작은 마님, 너무 가깝습니다.”
천희가 의욕이 앞선 백아를 막아섰다. 천희가 앞장서 헌원을 쫓았다. 모퉁이를 돌아 찾아낸 헌원은 대로의 맞은편 벽과 벽이 마주 보는 좁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헌원이……!”
“제가 기색을 살필 수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따라오세요.”
천희가 발을 동동 구르는 백아를 다독였다. 백아는 헌원이 사라진 골목과 천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헌원이 골목에서 다시 나타나 백아는 골목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헌원을 살폈다.
다시 나타난 헌원은 옷이 달라져 있었다. 입고 있던 관복 위에 장포를 걸친 헌원은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단 위에 걸친 짙은 남색의 무명옷은 자세히 보면 위화감이 있었으나 해 질 녘 어두워지는 때에 스치는 정도로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백아는 눈에 익은 뒷모습을 쫓았다. 매일 배웅하며 눈에 새기다시피 한 체격이었다. 시야가 막힌 것만 아니면 백아는 천희보다 빠르게 헌원을 알아보았다.
헌원이 대로를 걷는 터라 조금 여유 있게 쫓던 백아는 천희가 거리를 이백 보나 둔 이유를 이해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백아도 헌원을 알아보는데 이보다 가까운 거리라면 헌원은 곁눈질로도 백아를 알아챌 듯했다.
그러나 그도 인파가 많지 않은 북쪽 대로까지였다. 돌부리에 걸린 백아를 천희가 부축하는 사이에 북적이는 거리로 접어든 헌원을 놓치고 말았다. 놓친 자리에 멈춰 선 백아는 헌원이 사라진 쪽을 살펴보았으나 헌원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로 갔지?”
“여기 계시겠습니까? 잠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객잔 사이 골목에 백아를 세워 둔 천희가 헌원의 행방을 확인하러 간 동안 백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루와 객잔이 대로변을 따라 늘어선 장안 남쪽의 대로였다. 이대로 죽 가면 도성을 나서는 남문이니 헌원의 목적지는 여기인 듯했다.
백아를 두고 멀리 갈 수 없는 천희는 오래지 않아 돌아와 고개를 저었다. 속이 상한 백아의 표정에 천희가 다시 주변을 살폈으나 이미 놓친 이를 다시 찾긴 어려웠다. 그사이 해가 저물어 사위가 어두워졌다.
해가 지면 문을 닫아 어두컴컴한 저자의 다른 거리와는 달리 헌원이 사라진 거리는 오히려 밤이 되자 입구에 하나둘씩 걸기 시작하는 등으로 밝아졌다. 객잔과 기루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었다. 해가 지자 오히려 오가는 사람이 늘어난 듯했다.
백아는 밤을 밝히는 등이 늘어선 거리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은 기루나 객잔에 가는 이들이었다. 한 명씩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밝은 표정으로 맞이하는 이들과 함께 건물로 들었다. 점잖게 걷는 이들도 등 아래 보이는 낯엔 미소가 가득했다.
헌원은 여기에서 무얼 하는 걸까. 멍하니 서 있는데 천희가 백아를 잡아당겼다. 백아가 서 있던 자리로 호탕하게 웃는 일행이 지나갔다. 백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일행은 저들끼리 이야기하느라 앞을 살피지 않아 또 다른 이와 부딪칠 뻔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웃으며 제 갈 길들을 갔다.
그리 좋은가.
백아는 헌원이 사라진 곳에 기루가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 시를 읽으려다 마음이 상했던 일이 떠올랐다. 헌원에겐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매일 늦는 헌원이 돌아와 간단히 소세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헌원은 많이 피곤한지 백아가 시무룩해하는 이유를 전처럼 잘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늦는 것에 서운한 줄 알고 미안해할 뿐이었다. 백아는 그것 또한 서운하였으나 이미 알고 있는 이유를 다시 채근하는 듯해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몇 시쯤 되었지?”
백아의 물음에 천희가 하늘을 보았다. 주변의 등불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제 술시(19~21시)입니다.”
헌원은 늦는다 한 이후엔 틀림없이 해시가 좀 넘어 귀가하니 한 시진 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 전에만 돌아가면 된다. 백아는 과감하게 옆의 객잔으로 몸을 돌렸다.
단이가 따르고 있었다면 기겁하여 만류하고 귀가를 권했을 것이나 오늘은 떼어 두고 온 참이었다. 호위인 천희는 백아의 돌발 행동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객잔에 들어서는 백아의 뒤를 따랐다. 거리의 입구에 가까운 객잔은 자리 여유가 꽤 있었다. 백아와 천희는 출입구에 가까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자리에 앉은 백아와 천희에게 점소이가 다가왔다. 이런 곳은 난생처음인 백아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소설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백아는 금세 태도를 바꾸고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천희의 대답이 빨랐다.
“요기할 거리나 주시오.”
“반주도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래.”
동시에 나온 대답에 점소이가 눈치를 살폈다. 이번엔 백아가 빨랐다.
“죽엽청으로 하나 주게.”
천희가 살짝 고개를 저었지만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길지 않은 점소이 생활이었지만 저 둘 중 누가 상전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달달한 맛에 비해 도수가 센 죽엽청을 마시기엔 여려 보이는 샌님의 감상이 기대되었다. 마시든 뿜든 이쪽은 내오면 그만이었다.
주방을 향해 교자 둘, 죽엽청 하나를 크게 외친 점소이가 멀어진 후에 천희가 입을 열었다.
“몰래 나오신 거잖습니까. 주향이 나면 외출을 알아채실 텐데요.”
“아, 그랬지.”
소설에 나오던 것처럼 한번 마셔 볼까 했는데 그러면 알리지 않고 저자로 나온 걸 헌원이 알게 될 터다. 우울한 기분을 풀어 보려던 백아는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오래지 않아 죽엽청 한 병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만두가 나왔다. 입맛이 뚝 떨어진지라 백아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만두를 보고만 있었다. 백아가 손을 대지 않아서인지 천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미안해진 백아가 천희에게 권하려던 와중에 누군가 백아와 천희 사이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마시지 않을 거면 나 주는 건 어떠오? 술이 고파 객잔에 들긴 하였는데 금전을 들고 오지 않았지 뭔가.”
작은 원형의 식탁은 세 사람이 앉자 비좁아졌다. 경계하는 천희를 무시하고 넉살 좋게 말을 붙이는 사람은 백아의 또래거나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호탕한 인상의 사내는 생김새나 하는 양이나 스스럼이 없어 보였다.
식탁 아래로 검집을 들어 백아의 대답을 막았던 천희는 사내의 양손과 허리춤을 살피고는 경계를 풀었다. 사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싱글거리며 백아를 보고 있었다.
만두는 둘째 치고 죽엽청은 백아나 천희나 마시지 않을 양이라 백아는 허락을 기다리는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백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는 손을 뻗었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르는 사내에게 천희가 만두마저 밀어 주었다. 사내는 기꺼워하며 빈손으로 만두를 집었다.
“뭘 좀 아시는 인사로군. 술에 안주가 빠지면 되나.”
사내는 시장했던지 입으로 가져간 만두를 꿀떡꿀떡 넘겼다.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만두를 동낸 사내는 죽엽청 한 병도 금세 비웠다. 만두와 함께 마신 잔이 꽤 되는 터라 남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내가 먹는 양을 가만히 보던 백아는 사내가 마지막 잔까지 탈탈 털어 마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사라진 헌원이 생각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낯선 이에게 베푸는 친절은 여기까지였다.
천희가 대금을 치르는 사이 사내가 따라 나와 백아를 잡았다.
“이봐, 은인! 내 시장해 통성명도 하지 못하였는데, 감사 인사는 받고 가야지!”
사내의 말에 객잔을 나서던 백아가 울상을 지었다. 감사 인사란 말에서 헌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은 감사를 핑계로 입술을 마주한 적도 없었다.
등을 보이고 가만히 서 있는 백아를 급히 따라온 사내는 백아에게 손을 뻗었다. 뒤따라온 천희가 검집으로 사내의 손을 쳤다.
“아야, 인사는 하는 게 군자의 도리 아니겠는…… 가?”
사내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백아의 앞에 섰다. 제법 살갑게 말을 붙이려 했던 사내는 백아의 표정을 보고는 머쓱하게 물러났다.
그사이 사내와 백아 사이를 막아선 천희가 하늘을 살피고 백아를 재촉했다.
“해시가 가까워 옵니다. 이젠 돌아가셔야 해요.”
“알았어.”
그날은 아무런 소득 없이 귀가했다.
백아는 다음 날도 외출하여 헌원을 쫓았다. 그러나 전일 헌원이 사라진 남쪽의 대로에서 헌원을 또 놓치고 말았다. 대로엔 인파가 더 많아 보였다. 눈에 띄는 헌원이라지만 지나는 객이 많은 어둑한 거리에서 한눈에 구별하긴 쉽지 않았다.
익숙한 뒷모습을 쫓으려 애썼지만 이번에는 헌원이 큰 일행 사이로 섞여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이번엔 천희가 좀 더 빠르게 헌원을 찾아 나섰다. 그제야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니 백아가 멈춰 선 곳은 어제와 같은 객잔 앞이었다.
“다시 만났군. 오늘은 혼자요? 참, 어제는 감사했어.”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제의 그 사내였다. 백아는 사내의 인사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사람이 붐비는 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몸이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은인께 내 대접하고 싶은데. 어떤가?”
“…….”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백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아의 명백한 무시에도 사내는 다시 말을 걸었다.
“이름은 어떻게 되오? 은인의 성함이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술 한 병에 은인이라니 참 쉬운 은인이네.”
자꾸 주변을 알짱거리며 은인, 은인 하는 게 거슬린 백아가 한마디 뱉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임에도 사내가 화색을 띠었다.
“이제야 말을 받아 주시는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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