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수놓은 손수건도 주고 싶었는데 그건 포기했다. 잠시라도 헌원 생각만 하면 자꾸 손을 찔려 손끝에 구멍이 나서였다. 헌원에게 줄 자수를 놓으며 헌원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건 어불…… 말이 안 됐다. 백아의 머리털이 상한 것까지 먼저 알아채는 헌원은 다시 생긴 손의 붉은 점을 보더니 매우 슬퍼했다. 도무지 헌원 몰래 수를 놓을 수가 없었다.
백아는 책장을 넘겨 탁문군의 이야기가 쓰인 책장을 펼쳤다. 자랑만 하는 것은 도무지 재미가 없어 다음에 읽기로 했다. 헌원이 그리해도 된다고 했으니 괜찮다.
백아가 읽던 것은 사마상여의 열전이었는데 백아가 읽으려는 탁문군의 백두음(白頭吟)은 뒤쪽에 짤막하게 사족처럼 붙어 있었다.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해가 쉽다는 헌원의 말에 따라 백아는 그 앞의 설명부터 읽었다.
‘후에 첩을 들이려 했던 사마상여는 그를 안 탁문군이 지은 이 시를 읽고 첩을 들이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쓰여 있는 내용이 이상했다. 백아는 제가 잘못 보았나 하여 다시 설명을 읽었다. 글자를 짚어 가며 다시 읽어 보아도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남의 해설보단 백아의 감상이 중요하다. 그것 또한 헌원이 한 말이었다. 백아는 기분이 나쁜 설명을 제치고 시를 읽어 보았으나 시의 내용도 설명과 같이 다른 마음을 가진 님에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뭐야, 그런 시를 지어 놓고.”
괜히 화가 난 백아는 책장을 덮어 버렸다. 사마상여가 ‘백두음’을 읽고 마음을 돌렸다곤 하지만 다른 이를 보았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에서 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탁문군에 대한 갖은 미사여구도 보았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재능도 겸비하였다고.
그런 정인을 두고 다른 이를 생각하다니. 막연히 사마상여가 헌원과 같았을까 내심 견주어 본 것이 무안해졌다. 헌원이 백 배, 천 배 나았다.
기분이 나빠진 백아는 읽던 책을 덮고 탁자 끝으로 밀어 버렸다. 그러고도 상한 기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니 옆에서 침소를 정리하던 단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첩을 들이려 했다잖아.”
“누가요?”
“사마상여가.”
“사내들이 그렇지요 뭘.”
백아의 손이 가리키는 책을 본 단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백아는 그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원은 안 그래.”
퉁명스런 대답에 백아의 기분을 눈치챈 단이가 뒤늦게 백아의 기분을 맞추었다.
“그건 그래요.”
“그렇지?”
“예, 다른 이는 몰라도 주인마님은 안 그러실 거예요. 작은 마님이 없으면 앓아누울 분이시잖아요. 각인도 하셨고.”
사실 백아는 각인에 큰 감흥이 없었다. 백아도 각인하였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각인을 하기 전이나 후나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헌원이 좋았고, 헌원과 하는 ‘좋은 것’도 여전히 좋았다. 날로 더 좋아지긴 하였지만 그것은 각인을 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특별히 나은 부분이나 새로운 부분이 없어 아리송하기만 했다.
백아는 그저 헌원이 꽃잎 보는 걸 좋아하고 각인이 좋은 거라 하니 그렇구나, 할 따름이었다. 헌원이 좋아하면 백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헌원 생각에 기분이 나아진 백아는 헌원이 읽어 주었던 ‘서상기’를 펼쳤다. 좋아하는 구절을 읽으며 기분을 풀 생각이었다.
앞의 구절은 대충 넘기고 장생이 시를 읊는 장면을 편 백아는 곡조를 흥얼거렸다.
“나를 망하게 해요-.”
백아가 생각하기엔 전의 해석도 나쁘지 않았는데 헌원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백아가 흥얼거릴 때마다 자꾸 웃음보를 터트려 백아는 조금 무안했다. 백아는 타협을 보아 가사를 조금 고쳤다.
“참, 그 곡 말이에요. 작은 마님.”
“응?”
“원래는 헤어지는 이야기였대요.”
“뭐?”
단이의 말에 백아가 비명에 가깝게 목소리를 높였다. 첩을 들이는 이야기를 보고 기분이 상해 이걸 펼쳤는데 헤어지는 이야기라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아이고, 놀라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르세요. 간 떨어질 뻔했네.”
“다시 말해 봐. 헤어지는 이야기라니?”
“그냥 그거예요. 거기 나오는 앵앵이 ‘앵앵전’의 앵앵이라지 않겠어요. 요전에 저자에서 이야기꾼이 ‘앵앵전’을 낭송하는 것을 들었는데, 장생 고놈이 그렇게 꾀어 놓고 정작 혼인을 하자니까 어마 뜨거워라 하고 도망을 갔잖아요.”
“도망가서 어떻게 되었어?”
“장생은 장생대로 혼인하고 앵앵도 다른 이와 혼인하고.”
“뭐어?”
“마지막까지 장생 고놈이 제가 잘했다고 헛소리를 하여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몰라요.”
단이의 말에 백아는 시무룩해졌다. 좀 전의 백두음도 그러하고, 좋아하던 시 두 개 모두 뒷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줄 알았는데.
“헌원은 그런 말 없었는데.”
“헤어지는 이야기 싫어하시잖아요. 그러니 말씀하지 않으셨겠죠.”
그런 걸 좋아하는 이가 어디 있어. 백아는 좀 전의 단이처럼 입술을 비죽였다.
“전에 하남에서 온 극단, 그때도 주무셨죠? 그 극단이 한 공연이 연인이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는 내용이라 보시고 역정을 내셨는데.”
단이의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헌원은 백아가 잠들어 보지 못한 공연은 몇 번이고 다시 불러 주었는데 딱 하나는 잘되었다며 보지 말자 했다. 조금 딱딱한 표정이었던 헌원은 백아의 수락에 금세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살벌했던지 마침 작은 마님이 일어나시지 않았으면 시체를 치울 뻔했다니까요.”
단이의 과장에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헌원이 화를 내면 무섭기야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엄한 표정으로 설명을 하다가도 백아가 이해하면 금세 웃어 주는 이인데, 무슨 소리람.
“에이, 과장도.”
“과장은요, 참말인데.”
단이가 말하는 헌원은 백아가 잘 모르는 헌원이었다. 헌원이 역정을 내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헌원도 백아처럼 헤어지는 이야기는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백아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 의문이 남았다.
헌원은 계속 늦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돌아오는 시간도 매우 늦어 날이 저물고도 한참 지난 해시(21~23시)에서야 들어왔다. 돌아오면 늘 같은 얼굴로 백아를 안아 주었지만 피곤한 얼굴이었다. 백아를 안아 주는 헌원의 옷에선 밤 수련을 할 때의 냄새가 났다.
헌원은 원래 늦을 때면 무엇을 하고 왔다 어디를 들렀다 백아에게 아뢰듯 다 이야기해 주었지만 근래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미안한 얼굴로 관의 일이라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관의 일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운함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헌원은 그 시간까지 무얼 하는 걸까? 헌원의 귀가가 늦은 지 칠 일째가 되자 백아는 견딜 수 없어졌다.
“단이야, 옷 좀 빌려줄래?”
“옷이요?”
“응.”
“어디에다 쓰시게요?”
“입고 나가려고. 혼자는 안 나가. 천희와 함께 갈 거야.”
단이가 백아의 안색을 살피더니 혀를 쯧 찼다. 매일 늦는 헌원을 기다리는 백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지사라 단이도 눈치를 보던 참이었다.
“주인마님 때문에 그러세요?”
“응.”
단이는 백아가 들으란 듯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지 않으려나. 백아는 단이의 눈치를 보았지만 제 뜻을 굽히진 않았다.
“매일 안겨 다니시더니 정말 작은 줄 아시나 봐. 체격을 생각하세요!”
갑작스러운 단이의 호통에 백아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육 척에 가까운 분이 오 척을 갓 넘는 제 옷을 입으시면 우스꽝스러워 몸을 숨기기는커녕 한눈에 알아보실 거예요!”
단이의 말에 백아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이보다…… 팔도 길고 다리도 길고 일어서면 눈높이도 훨씬 높았다. 소맷자락이나 바짓자락이 접어 올린 것처럼 팔꿈치와 종아리에 걸칠 거였다. 맨살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은 헌원이 싫어하니 안 된다.
백아는 대안으로 집 안의 저와 눈높이가 비슷한 다른 이를 떠올렸다.
“그럼 진원의 옷을 입으면…….”
“무명옷이 필요하신 게 아니셨어요?”
“아, 맞다.”
“하루만 기다리세요, 내일 저자에 가 구해 올 터이니.”
단이는 말한 대로 다음 날 일찍 저자로 나가 무명옷을 구해 왔다. 백아는 검은색의 장포로 몸을 감쌌다. 풀을 먹인 무명은 목에 닿는 옷깃이 조금 까슬했다.
헌원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집안사람들에게도 비밀이어야 하기에 단이는 집에 남았다. 단이는 담을 넘으려는 백아를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천희를 떼 놓으시면 안 됩니다. 향도 꼭, 꼭 갈무리하시고요. 평인처럼 다니셔야 해요!”
“응. 응.”
“주인마님이 해시쯤에 오시니 그 전엔 오셔야 하고요!”
단의의 당부를 뒤로 한 백아와 천희는 일단은 헌원이 일하는 관청으로 향했다. 퇴청하는 헌원을 미행할 생각이었다. 골목에 숨어 서성인 지 오래지 않아 헌원이 나왔다.
“이백 보 이상은 떨어지셔야 합니다. 작은 마님은 무술을 배우지 않아 그보다 가까우면 눈치채실 거예요.”
백아는 천희의 지시를 따르며 헌원을 쫓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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