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나도 이만 가오.”
“가십시오. 자네는 이것만 옮겨 주고 가게.”
헌원은 사환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세책방을 나섰다. 밖은 어느덧 날이 저물어 어두웠다. 세책방이 있는 골목을 나온 헌원은 근처 가게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지붕 위에서 세책방 쪽을 살피자 문을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는 사환이 보였다. 헌원은 지붕 위로 이동하며 사환의 뒤를 밟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면 추궁해 볼 요량이었으나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렸다. 세책방을 나선 사환은 주위를 경계하더니 잰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목적지가 분명한 걸음걸이기에 따르던 헌원은 사환이 누군가를 불러내는 모습을 보았다. 등을 든 다른 이가 나타나자 사환은 대뜸 그를 인적 없는 골목으로 끌고 갔다.
“자네지? 자네가 그걸 쓴 거지? 내가 준 책이니 내게도 몫을 떼 주어야지.”
“무슨 소리야.”
“나한테 사간 수기 말이야.”
세책방에서의 행동이 자꾸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역시 사환이 장가 몰래 수기를 가져간 모양이었다.
“그게 뭐? 나는 낯부끄러워 다른 이에게 팔았네.”
“정말이야?”
“정말이지 그럼! 그리고 팔았으면 그만이지 뭘 또 물어?”
“사 간 놈은 누구야?”
“몰라! 몇 장 훑어보고 잘못 샀다 투덜대었더니 넘기라 해서 팔았어.”
“누군지 몰라?”
“장안에 사람이 몇인데 내 어찌 알아?”
사환의 물음에 상대방이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사환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버럭 소리부터 질러 대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커지자 사환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제엔장, 운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자네 장안에 도는 서책 안 봤어? 쯧, 입에 풀칠하긴 글렀구먼, 필사쟁이가 돈 되는 서책도 모르고.”
“어허, 날 뭐로 보고. 내 아무리 남의 글을 베껴 먹고 살아도 그런 건.”
“카악, 퉤. 고상한 체하고는. 그러니 돈 될 것도 못 알아보지. 그거 자네가 내게서 산 서책이잖나. 나도 어제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뭐?”
“내가 본 것과 다른 부분도 있는 걸 보니 가필을 하여 넘겼나 본데, 하여 나는 자네인 줄 알았지.”
사환의 말에 필사꾼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낯이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색이 바뀌던 필사꾼이 욕설을 내뱉었다.
“……에이 젠장, 알려 주지나 말지.”
“정말 몰라?”
사환의 채근에 필사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면 내가 이러고 있어? 당장 멱살 잡으러 갔겠지!”
되레 성을 내는 필사꾼을 사환이 말리는 형국이었다. 그리 밝지 않은 등불로도 벌게진 필사꾼의 낯빛은 잘 보였다. 사환은 핏대가 벌겋게 오른 필사꾼을 말리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사환이 사라졌음에도 헌원은 자리를 지켰다. 그쯤 해서는 사환보다는 필사꾼을 미행하는 편이 나으리란 판단이었다.
헌원의 판단이 옳아 사환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필사꾼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필사꾼은 골목의 모퉁이를 돌더니 주변을 살피고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헌원은 여전히 지붕 위에서 거리를 두고 뒤쫓았다. 필사꾼은 금세 지쳤는지 잰걸음임에도 속도가 느렸다.
필사꾼이 대로에 접어들며 쫓아가기 어려워져 헌원은 지붕에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육척 반 장신의 헌원은 헌앙하여 눈에 띄는 편이었으나 이를 대비해 걸친 짙은 남색의 장포가 체구를 조금이나마 가려 주었다. 남쪽의 대로에는 유흥을 즐기러 온 이들뿐 아니라 큰 짐을 진 객들도 많아 가벼운 차림의 헌원은 크게 시선을 끌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헌원의 용모를 본 이들만 지나치며 감탄할 따름이었다.
헌원은 필사꾼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장안의 기루와 객잔이 모여 있는 남쪽 대로였다. 거기엔 지난번 백아의 일이 있었던 단화각도 있었다. 필사꾼의 목적지였다.
단화각으로 들어가려는 필사꾼을 단화각의 문지기들이 막았다. 사환에게 급히 불려 나오느라 허름한 차림이었던 탓이었다.
“진진을 만나러 왔소. 불러 주시오.”
“진진? 진진은 관뒀어.”
“뭐요? 언제?”
“보름쯤 되었지 아마?”
“어디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오?”
“그건 모르지.”
필사꾼과 함께 필사꾼을 미행하던 헌원도 난감해졌다. 백아의 수기를 가진 이가 장안을 떠났다면 헌원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지게 된다.
“아는 사람이 없소?”
“기루에서 일하던 이가 알리고 갔겠어? 각주님이야 아실 테지만 말씀하실 분은 아니지.”
필사꾼은 조금 더 문지기에게 사정을 해 보는 듯했으나 문지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래지 않아 필사꾼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한 걸음걸이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화라.
어째 일이 터지면 그가 얽히는지.
지난번 도움을 받은 일은 감사하나 기루와 자꾸 얽히는 건 달갑지 않았다. 필사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헌원은 단화각으로 다가갔다. 필사꾼을 대할 때와는 달리 문지기는 헌원을 공손하게 맞이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연회가 벌어지는 일 층, 그를 내려다보며 유유자적할 수 있는 이 층, 기밀을 나누기 위한 밀실이 있는 삼 층, 어디를 이용하려는지 묻는 문지기에게 헌원은 네 번째의 대답을 했다.
“각주를 뵙고자 하네.”
헌원이 대뜸 무화를 찾자 문지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문지기는 헌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 소란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이 대인. 기별을 올리겠습니다. 너, 이 대인을 모시거라.”
헌원은 문지기의 부름에 다가온 사동의 안내를 따라 단화각에 들어섰다.
헌원은 오늘도 늦었다. 백아는 단이가 호롱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달에는 일이 많은가? 근래에는 늦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한동안 늦을 거라 언질을 듣긴 하였지만 막상 늦으니 온통 헌원만 기다리게 되었다.
상념을 떨치려 애써 붓을 들었으나 소용없었다. 헌원이 귀가할 시간이 지나자 머릿속엔 온통 헌원 생각뿐이었다. 빈 종이에 붓으로 먹점을 찍고 나니 잃어버린 서책이 떠올랐다. 겉장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쉽게 눈에 띌 법한데도 영 보이지 않았다.
전 같지 않게 자꾸 헌원이 물어보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헌원은 백아가 자신이 준 서책을 잃어버린 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헌원은 잃어버린 게 아니니 괜찮다고 하였으나 백아가 괜찮지 않았다. 손에 없는 물건이 자꾸 눈에 밟혔다. 백아는 다시 단이를 채근했다.
“아직 못 찾았어?”
“어디 다른 데 두신 것 아니에요?”
“세책방은?”
“다녀왔는데 그런 일 없다 하였어요.”
서재에도 없고, 침소에도 없고.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백아는 점만 찍은 붓을 내려놓았다. 근심이 서리니 만사가 다 귀찮았다.
헌원의 희락은 언제 오지?
잃어버린 서책을 제외하면 근래 백아의 가장 큰 근심은 그것이었다. 각인을 하면 희락이 없던 양인도 온다 하던데. 헌원은 도통 기색이 없었다.
그도 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백아는 괜히 불안했다. 헌원은 어릴 적에 각인을 하였다는데 백아의 각인은 최근이었다. 제 각인이 늦어 기다리는 동안 헌원의 희락이 도망가 버린 건 아닐까? 제 짝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남이 너무 늦으면 석인이 되는 일도 있다 했다. 향인을 설명하는 서책에 나와 있던 온갖 사례들이 백아의 불안을 키웠다.
백아를 안아 줄 때의 헌원의 뜨거움을 보면 그렇지 않을 테지만……. 백아는 누군가 둘의 정사를 본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근심에 골몰했다.
“오지 않을까?”
혼잣말에 가까운 뜬금없는 물음에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단이가 되물었다.
“예?”
“희락 말이야.”
“두 번이나 오셨잖아요.”
“아니, 나 말고.”
백아보다 조금 영특한 단이는 한숨을 폭 쉬었다. 음인은 대부분 희락이 오지만 양인은 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백아가 직접 읽어 준 서책에 있는 내용이었다.
“거 주인마님께선 희락이 오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
“올 거야!”
“거 욕심도 많으셔라.”
바른말을 하다 괜히 큰 소리를 들은 단이가 입을 비죽였다. 백아는 씩씩대며 단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단이 저것은 내가 모르는 게 많다고 자꾸 핀잔을 준단 말이야. 가끔 밉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의 벗, 그래 벗이었다. 헌원처럼 감언이설을 하지 않으니 벗이라 할 만했다.
감언이설, 감언이설. 배운 것을 되새기는 일은 헌원의 말처럼 즐거웠다. 감언이설을 하는 정인, 감언이설을 하지 않는 벗. 백아에겐 둘 다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헌원을 생각하며 근심을 한편에 밀어 둔 백아는 다시 기운차게 서책을 폈다. 그러나 또 잡념이 이어졌다.
헌원은 제가 무식한 것이 가르치지 않아 그런다 미안한 모양이지만 백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헌원은 해 볼 만큼 다 하지 않았나? 백아가 도망 다니느라 쫓아낸 선생만 스물을 훌쩍 넘었다. 헌원이 같이 하자는 것도 듣지 않았고 진원의 글공부도 방해했고……. 한창 글공부를 할 때에 놀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난처하게 웃던 헌원이 생각났다.
서재에 가면 책이 한가득인데, 모두 헌원이 공부한 흔적이 가득했다. 잃어버린 서책을 찾으려 집어 본 모든 서책이 그러했다. 어릴 적을 돌아보면 저는 놀다 잠을 잔 기억밖에 없는데 헌원은 저와 놀아 주면서도 언제 그렇게 읽은 건지.
헌원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부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헌원은 조급해하지 말라 하였지만 하나를 말하면 열 가지 이야기를 해 주는 헌원이라 백아는 제가 부끄러웠다. 백아도 그동안 읽은 이야기 속 연인들처럼 헌원에게 멋들어진 서간도 보내고 싶고 금을 타며 시를 읊어 주고 싶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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