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헌원은 손에 예의 그 꾸러미를 든 채 귀가했다. 누구에게 맡기기도 그러하고 둘 데도 마땅치 않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 하였으니 오히려 서재에 두는 것이 안전했다. 예상대로 꾸러미를 궁금해하던 백아는 관청에 가지고 갈 것이라는 헌원의 대답에 흥미를 잃었다. 헌원은 꾸러미를 백아가 손을 대지 않는 문갑 안에 넣어 두었다.
헌원이 나오자 침소로 간 줄 알았던 백아가 서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헌원과 나란히 침소로 걷던 백아가 헌원의 눈치를 보았다. 헌원도 할 말이 있던 참이라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백아, 당분간은 계속 늦을 듯합니다.”
“얼마나요?”
“글쎄요…….”
일의 해결이 일찍 난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만 쉬이 찾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헌원은 드물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관청의 일이에요?”
“비슷합니다.”
관청의 일이라는 대답에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눈치를 보기에 이번엔 헌원이 먼저 물었다.
“한데 무슨 할 말이 있으십니까?”
“헌원, 그거 말이에요…….”
“무얼 말씀이십니까?”
“내가 쓰던 것 있잖아, 그것을 잃어버린 듯한데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찾는 모습이 눈에 밟혀 몇 번 언급한 것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때까지도 약간의 망설임이 남아 있던 헌원은 백아의 염려에 입을 닫기로 했다. 이미 누군가가 그를 훔쳐 세간에 돌고 있다고 하면 놀랄 것이 분명했다. 괜한 걱정은 저 혼자로 족했다.
헌원은 여상스럽게 물었다.
“어디에 들고 나간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럼 서재 안에 있을 겁니다. 서책에 발이 달려 제 발로 나갔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미리 서재를 정리했어야 했는데. 제가 분주한 탓에 백아의 한숨이 느는군요.”
“아니, 헌원을 탓하는 게 아니라.”
자책하는 헌원의 말에 백아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어떻게?”
“새 걸 드리겠습니다. 이미 한 번 써 본 것이니 다시 쓰시면 훨씬 수월하실 겁니다. 정리 또한 더 잘될 것이고요. 학문으로 치면 복습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헌원의 기분이 상할까 묻는 것이었다. 백아는 이제 헌원이 준 것은 나누지 않았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헌원이 준 걸 소홀히 한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헌원은 세책방에서 나온 이후로 미미하게 울리던 두통이 사라짐을 느꼈다. 역시 백아는 헌원에게 보약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물건은 새것을 마련하면 나오게 마련입니다. 매번 부주의를 반성하게 하지요.”
“헌원도 그런 적이 있어요?”
“없었다면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런 것은 서책을 읽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헌원의 대답에 백아는 안도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안함은 남아 있었다.
“헌원이 준 건데. 잃어버려서…….”
“서재에 있을 테니 잃어버린 건 아닙니다. 그러니 상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 미안하시면 제게 사죄를 하심은 어떤가요?”
“사죄요?”
“아니면 너그러운 제게 상을 주시거나.”
백아는 상이란 말에야 헌원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백아는 얼른 헌원에게 매달려 입술을 가까이 했다.
헌원은 백아와 입술을 마주하며 제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 작은 것에도 미안해하는 이가 알기엔 너무 큰 일이었다. 모르는 편이 나았다.
헌원이 세책방을 들락이는 사이에 다른 관원들도 하권까지 구해 본 모양이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에 청 한편 작은 연못에 모인 관원들이 왁자지껄했다.
헌원이 가까이 다가서자 시선이 헌원에게 모였다. 개중 목청이 큰 백 관원이 헌원에게 성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 글을 쓴 이가 혹여 자네 안사람이 아닌가?”
자리에 없는 사람을 두고 대화가 어디까지 흘렀는지 알 만했다. 곁에 있던 유 관원이 혀를 쯧, 찼다. 헌원은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낯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왜 거 있잖은가, 자넨 안 봤나?”
헌원이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낯으로 서 있자 백 관원이 혀를 찼다.
“허허, 여전히 샌님이로구먼. 성불이라도 하시려는가? 어지간히 아끼시게.”
도를 넘는 백 관원의 말에 헌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봐야 휩쓸릴 뿐이라 헌원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헌원은 대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예의상 입만이 웃던 낯을 굳히니 가을의 볕 아래인데도 한겨울의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질문을 던진 백 관원을 비롯하여 뒤에 섰던 여럿이 헛기침했다.
“어허, 헌원의 안사람이 몇 년간 글 선생을 죄다 쫓아낸 일은 모두 아는 일이 아닌가!”
옆에 섰던 유 관원이 헌원보다 크게 손사래 쳤다.
“아 그랬지.”
말을 꺼낸 백 관원은 무안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낯을 굳힌 헌원이 자리를 뜨려 하자 그때까지 연못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천 관원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혹여 짐작 가는 사람은 없나? 아무리 보아도 평민이나 평인이 썼다기엔 지나치게 자세해서 말이야. 거 뭐, 향인 가문들은 혼인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낸다면서.”
“저야 성혼을 한 지 오래인데 다른 가문의 음인과 교류할 일이 있겠습니까?”
“맞아, 혼례를 올린 지도 근 십 년이지 않나.”
유 관원이 헌원의 말을 거들었으나 천 관원은 코웃음 쳤다.
“자네가 끝이 아니지 않아? 아우가 있지 않나.”
“아우는 평인입니다. 집안 내력으로 볼 때 아마도 향인이 될 일은 없을 듯합니다.”
“흠, 그런가?”
헌원이 일찌감치 데려와 승상가에 모셔 둔 제 짝만을 본다는 건 헌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마저도 잘 아는 일이었다. 기실 그로 인해 헌원을 못마땅해하는 것이었으니 집요하게 묻던 이도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무어랬더라, 이 관원의 그이 하면 모두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기에 성명이 가물가물했다. 그이를 위해 얼마 전엔 그저 구경을 시켜 주려 단화각을 통째로 빌린 적도 있지 않은가.
단화각의 주인인 무화가 말을 않아 헌원이 지불한 돈을 자세히 알 수 없을 뿐이지 단화각에 드나드는 이들의 수치를 셈해 보면 대략 견적이 나왔다. 이 자리에 있는 웬만한 관원들의 몇 달에서 몇 년 치 녹봉을 하룻밤 기생들을 끼고 노는 것도 아니요, 그저 구경으로 날려 버린 셈이다. 관원 중 수에 밝은 누군가 해 본 셈에서 나온 액수를 듣고 헌원에게 별 사감이 없는 이들도 한숨을 쉬기도, 시기를 하기도 하였다.
헌원은 그쯤 하여 자리를 떴다. 도는 말이 어떠한가 확인을 위해 부러 가 보았던 자리였다. 헌원이 의혹을 모두 날리는 태도를 보였으니 백아를 의심하진 않을 터다.
헌원은 그날도 귀가 전에 세책방으로 향했다. 장가가 영 모르는 눈치였기에 드나드는 이를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연이은 헌원의 방문에 장가가 놀란 눈으로 헌원을 맞았다.
“어인 일이십니까? 아, 장부라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조만간에 어머님께서 검사를 하신답니다. 지난밤에 크게 걱정을 하기에 저도 마음이 급해져서요. 같이 찾아볼까 하여…….”
“상심하시기 전에 빨리 찾아야겠습니다.”
“예, 꾸중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
어린아이를 이야기하는 듯한 헌원의 대답에 장가가 웃었다. 헌원은 장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기를 찾는 척 입구가 잘 보이는 안쪽의 서가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식경쯤 지났을까, 헌원이 안쪽 서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있는데 책을 가득 든 사내가 세책방에 들어섰다. 서가 사이로 살펴보니 어제 헌원과 부딪칠 뻔한 사환이었다. 수기를 가져간 이를 어찌 찾아야 할까 막막하던 헌원에게 실마리를 준 게 저 사환이었다. 서책을 가져다줄 때마다 정리를 도왔다면 수기를 보았을, 혹은 가져갔을 확률이 높았다. 두어 번 다녀간 손님일 수도 있겠으나 장가가 수기를 보관해 두었다며 뒤적이던 자리가 손님이 뒤적이기엔 마땅치 않은 자리였다. 세책방에 들른 이유의 오 할 즈음이 그에 있었던 헌원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 왔나? 책 거기 놓게. 아니, 거기 말고. 안쪽으로 옮겨 주게.”
“내가 장가네 사환이요? 어째 사람을 부려.”
사환은 들고 온 책들을 장가가 손짓하는 곳이 아닌 입구 근처의 서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장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비롯하여 세책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새삼스러운 행동이었다.
“참, 자네 혹시 여기서 쓰다 만 서책 못 보았나?”
“쓰, 쓰다 만 그런 것도 있어?”
“장부라는데 잘못 끼어 왔대서. 어딘가에 있긴 할 텐데 도통 못 찾겠군.”
“아아, 장부? 자네가 알지 내가 아나?”
사환은 장가가 하는 말에 곧잘 대답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찾듯 세책방 안을 자꾸 흘끔거렸다.
“혹시나 보면 말해 주게.”
“알았소.”
뒤돌아선 장가를 살피며 대답하던 사환은 손을 제 바짓단에 슥 문질러 닦았다. 색이 바랜 회색의 무명옷에 손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사환의 행동이 여상하지 않아 지켜보던 헌원은 부러 인기척을 내었다.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나. 이만 가 봐야 하겠습니다.”
평소 사람이 없던 안쪽에서 헌원이 나오자 사환은 놀란 듯했다. 헌원은 모른 체 사환을 지나쳤다. 헌원의 뒤에서 길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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