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51화 (51/66)

외전 7화.

옷깃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에 백아는 뒤늦게 헌원의 말을 이해하여 헌원의 꽃잎을 보았다. 그러나 헌원의 꽃잎 색은 전에 보았던 것처럼 예쁘고 짙은 붉은색이었다.

“그대로인데요, 헌원.”

“백아가 어여쁘다는 대답을 주셔서 금세 회복하였나 봅니다. 그러나 흔적이 남지 않았습니까. 평소엔 붉은빛이 이리 진하지 않습니다.”

헌원의 말에 백아는 눈앞에 드러난 꽃잎을 유심히 살폈다. 앞섶을 헤친 헌원의 가슴에서 색이 가장 진한 건 꽃잎인 데다 기억에 의존해 비교해야 해서 가늠이 어려웠다. 보면 색이 좀 더 탁한 것도 같고.

한참 헌원의 가슴을 살피던 백아는 어느새 주변이 색향으로 가득 찬 걸 알아챘다. 꽃잎 위편에 자리한 헌원의 옅은 색 돌기도 백아의 시선에 바짝 서 성을 내었다. 백아는 변화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꽃잎 색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헌원의 말이 옳아요.”

헌원이 걱정하였다면 위로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꽃잎의 색도 선명하게 붉어질 터였다. 백아는 타는 눈길로 자신을 보는 헌원에게 몸을 겹쳤다.

장가는 헌원이 부탁한 닷새보다 빠르게 헌원에게 기별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시랑께 보낼 선물입니다. 지난번에 주문한 것이 도착했다는군요.”

의아해하는 백아에게 헌원은 관의 일이라는 핑계로 둘러대었다. 의심 없이 물러나는 순진한 낯에 가책이 와 미리 언질을 할까 싶었지만 모르는 채 받는 선물에 기뻐할 백아가 보고 싶었던 헌원은 입을 닫았다.

다음 날 헌원은 퇴청하자마자 저자로 향했다. 장가는 막 도착했다며 서랍을 뒤적이면서 보를 찾았다.

“웃돈으로 먼저 빼 온 것이라…… 순서를 당긴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구하려는 사람이 많아 그럽니다. 평소에 젠체하던 이들도 소문을 듣고 찾는지라.”

장가는 보를 가져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에서 장가를 기다리던 헌원은 장가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이향애록’을 발견했다. 유 관원의 말대로 얇게 분권한 세 권이었는데 하권에 책갈피가 끼어 있었다. 장가가 읽던 것인 듯했다.

밑에 깔려 있던 상권을 들어 책장을 가볍게 넘겨 보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낯익은 표현에 고개를 갸웃하던 헌원의 뇌리에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헌원은 책을 덮어 표지를 보았다가 맨 앞 장부터 정독하기 시작했다.

“꽤 적나라하지요? 공자님 건 자 여기, ……대인?”

그사이 장가는 보를 찾아 꾸러미를 다시 감쌌다. 티가 나지 않게 무명보로 재차 감싼 꾸러미를 건네려던 장가는 헌원이 제가 읽던 것을 집중하여 읽는 모습을 보고 들고 있던 꾸러미를 헌원 옆의 서탁에 내려놓았다. 다른 이라면 무전취독이라 쫓아낼 터였지만 헌원은 경우가 달라 두었다. 선물을 하고 나면 한동안은 읽을 수 없을 거라 여긴 장가의 배려였다.

얇은 서책을 빠르게 훑은 헌원은 상권을 내려놓고 중권이 아닌 하권을 펼쳤다. 여전히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던 헌원은 책갈피가 끼어 있는 하권 중간 즈음을 열고 움직임이 멎었다. 이어 책을 들고 있는 헌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기시감은 헌원의 착각이 아니었다. 헌원은 이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백아의 수기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바꾸고 다른 설정을 넣어 그에 따라 이리저리 가필하였지만 백아의 글임이 틀림없었다. 특히 백아가 쓰지 않았던 하권의 내용은 많은 부분이 달랐으나 희락이 온 주인공이 하는 정사의 묘사만은 백아가 했던 말과 꼭 같았다. 분명 백아의 글이었다.

헌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꽤 놀란 듯한 헌원의 반응에 장가는 내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점잖은 이가 보기엔 저속한 내용이었다. 책갈피를 끼워 둔 곳은 그중에서도 향인들에게 온다는 희락에 취해 정사를 나누는 부분이라 헌원이 놀라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마땅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찾아 양도를 하셔도…….”

“아니오, 주십시오.”

장가야 지난번처럼 구하는 다른 이를 찾으면 그만이라 권하였지만 헌원은 고개를 젓고 장가가 건네는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늘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자 꽤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장가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대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꾸러미를 받아 들고 세책방을 나서려는 헌원을 장가가 불러 세웠다. 헌원이 뒤돌아 장가를 보자 장가는 서가 아래의 서랍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거참, 분명히 여기 두었는데.”

“무슨 일입니까?”

“지난번엔 급작스럽게 찾아오셔서 깜빡 잊었는데 공자께서 사람을 시켜 반납한 것 중에 잘못 딸려 온 것이 있었습니다. 돌려 드린다고 따로 두었는데 이후로 영 오시질 않아서…… 이자도 늙었나 봅니다. 기억이 전 같지 않습니다그려.”

내내 수기에 마음이 쓰였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본의 아니게 찾아 낸 백아의 수기와 ‘이향애록’ 간의 연결점이 매우 달갑지 않았다. 아니 불쾌했으며 분노가 일었다. 차라리 파기를 할 것이지 어떤 파렴치한 이가 그를 각색까지 하였단 말인가.

헌원은 다시 장가가 읽던 서책을 뒤적였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겉장에는 제목만이 적혀 있었고 내지에 저자의 서명이나 인장이 있을 만한 곳을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까?”

“아, 서책에 표기가 없지요? 저도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밝히길 원치 않는다 하던데……. 사람들이 하도 물어 ‘흑아’라고만 했답니다.”

“…….”

기가 막힌 헌원은 대답도 벅차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수기를 찾는 데 열중인 장가는 서랍을 하나하나 열며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어디 귀부인이 아닌가 짐작한답니다. 내용도 그러하고……. 여기도 없고, 밝히지 않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요.”

수납함마저 뒤적이던 장가는 영 찾지 못하겠던지 헌원에게 미안한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서책을 정리하며 안에 같이 꽂아 둔 듯싶습니다. 표제가 없는 것이 빌리신 서책은 아닌 듯하여 안은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헌원은 장가의 표정을 살폈으나 평소와 별다르지 않았다. 장가가 읽던 책에 꽂힌 책갈피를 보면 하권까지 읽은 듯한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헌원이 보기에 거짓은 아닌 듯했다.

이야기를 터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나을까? 헌원은 잠시 고민했으나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장가가 헌원과 백아에게 호의적이기는 하나 그는 그저 배경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장가는 장사치였다. 교류가 오래된 것도 아니라 이런 일을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믿을 만한 이도 아니었다. 정 도움이 필요하면 나중에 도움을 청하여도 될 터다. 지금은 사태 파악이 우선이었다.

누군가 가져갔다. 이미 책으로 나왔으니 세책방의 서가에서 발견되진 않을 것이다. 돌려놓을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 돌려놓았을 것이나 내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돌려놓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실마리는 세책방이라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장가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기억을 더듬는 척하던 헌원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잖아도 안사람이 찾던 것을 보았는데 그것인가 봅니다.”

“역시 모르셨군요. 찾으러 오시지 않는 걸 보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승상가 장부의 일부일 겁니다. 누가 본다 해도 크게 곤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꺼림칙한 건…….”

백치로 소문이 났다 하여도 직접 본 장가라면 그게 아님을 알 것이다. 글을 읽는다며 세책방을 오간 지도 꽤 되었으니 백아가 장부 쓰는 법을 배운대도 어색하지 않았다. 헌원이 말을 흐리자 장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고, 장부라니, 찾아보겠습니다.”

“몰래 돌려놓고 싶으니 혹여 안사람이나 안사람이 부리는 아이가 찾아와도 모른다 해 주십시오. 부주의했던 것을 알면 크게 상심할 터라. 거짓말을 못하는 이라 모친께서 하문하시면 그대로 답해 꾸중도 들을 테고…….”

세세한 헌원의 염려에 장가가 웃었다. 손수 읽어 줄 서책을 골라 주러 다니는 이다웠다.

“알겠습니다. 이번처럼 기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부탁합니다.”

빠르게 세책방을 나선 헌원은 거리에 나와서는 보폭을 늦추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백아에게 알려야 할까?

골목 모퉁이에서 나타난 사내가 헌원에게 다가왔다. 다른 서점의 사환인지 서책을 잔뜩 안은 채라 앞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헌원은 그를 피해 잠시 옆으로 비켜섰다.

헌원은 장가와는 다른 이유로 백아와 의논하는 일은 보류했다.

수기를 찾을 백아를 생각하면 행방을 알려야 하겠지만 지난밤 백아가 부끄러움을 입에 올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향애록’까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수기를 보았다는 생각에 백아가 수치스러워할까 염려했다. 그로 인해 상심하여 재미를 붙였던 글도 다시 멀리하게 될까 그 또한 걱정이었다.

차라리 모두 사들일까? 사들일 수야 있지만 내놓으려 할지가 문제였다. 거액을 걸고 사들이면 파는 사람이 있겠지만 오히려 널리 회자될 것이 염려되었다. 이미 필사본이 널리 퍼져 있으니 한계도 없을 터라 자칫하면 밑 빠진 독이 될 터였다.

헌원은 다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하나하나 점검했다.

가장 중요한 건 백아였다. 혹시, 만에 하나 백아가 보게 된다면……. 헌원은 조금 전 읽었던 내용을 되짚었다. 가필한 곳이 많아 완전히 백아의 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뒤편엔 백아가 익히지 못한 글자의 비중이 높아 쉬이 읽지는 못할 터다. 백아가 사용한 어휘나 표현은 단순한 편이니 겹치는 부분은 신기한 일이라 하면 백아는 미심쩍음이 남아도 헌원의 말이 옳다 여길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전제가 있었다. 백아가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기려면 우선 원본을 찾아야 했다. 찾던 수기가 서재에 고이 놓여 있었음을 확인한다면 백아가 의문을 가질 일이 없을 터다. 의아해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니 헌원의 말이 옳다 여기게 할 수 있었다.

운우지락의 묘사가 큰일이긴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건 헌원뿐이었다. 백아도 보면 알게 되겠지만 헌원이 조처해 두면 한동안은 백아가 문제의 서책을 접할 길은 없었다. 당분간 세책방에도 뜸할 테고 들른다고 해도 장가가 서책을 구해 주었으니 함구할 것이다.

그동안은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으나 언제까지 백아가 이 일을 모르리라 장담하진 못하니 그 전에, 최대한 빠르게 해결을 보아야 했다.

장가에겐 장부라 해 두었으니 그쪽에서 말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을 테고, 장가 몰래 가져가 가필을 한 파렴치한은 어디에 자랑할 수는 없는 물건이니 숨겨 두고 있을 터였다. 찾아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혹여 여의치 않으면 수기만 조용히 가져와도 된다. 괘씸하긴 하지만 백아가 모르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헌원은 세책방에 흘긋 눈길을 주었다. 책을 옮기던 이가 서가 아래를 뒤적이며 장가의 정리를 돕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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