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세책방에 들르느라 조금 늦게 귀가한 헌원을 백아가 반겼다. 대문 안마당에 선 백아를 발견한 헌원이 백아에게 다가갔다. 백아도 냉큼 다가와 헌원의 앞에 섰다.
“기다리셨습니까?”
“늦길래요.”
여름에 비해 제법 짧아진 해를 가늠하니 평소보다 한 식경 정도 늦은 귀가였다. 저자까지 거리가 있는 터라 걸음을 바삐 하여 서둘렀는데도 기다리게 한 시간이 길었다.
내미는 백아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헌원은 둘의 공간인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보폭이 컸던지 백아가 종종걸음을 하기에 백아의 보폭에 맞추어 속도를 늦추었다. 백아가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 백아에게 마주 웃어 준 헌원은 다시 백아의 수기를 떠올렸다. 귀가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자신도 의아했다.
“작일 찾던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단이가 어디에 꽂아 두었는지 영 기억하지 못해요. 내가 찾으려 해도 서재에 책이 너무 많아서…….”
백아의 말에 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헌원이 모은 서책이 상당량이었다. 거기에 최근엔 백아가 읽을 만한 것을 고른다고 서재 구석구석에서 빼낸 것들을 쌓아 두었는데 헌원이 없는 사이 백아와 단이가 정리한답시고 두서없이 꽂아 놓았다. 하여 지금은 헌원도 서책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헌원.”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헤집어 서재가 엉망이에요.”
조만간 정리하기는 해야 했다. 그러면 그 어딘가에 있을 백아의 수기도 나올 터다.
“먼지를 한번 털어 낼 생각이었는데 미루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게 되었으니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헌원의 대답에 백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별채로 들어선 참이라 헌원은 무언가 말하려는 백아의 허리에 손을 감아 끌어당겼다.
“하여 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거절은 않으시겠지요?”
순식간에 헌원의 품에 안겨 마주 보는 모양이 된 백아가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엔 헌원이 입을 막았다. 달아오른 뺨으로 눈썹 끝을 내린 백아의 입술은 여전히 달고 부드러웠다. 입이 막힌 채로도 무언가 웅얼거리던 백아는 이내 입 안을 휘젓는 헌원에게 혀를 감았다. 헌원은 백아를 안아 든 채 천천히 걸어 침소 앞에 다다라서야 입술을 떼었다.
“감언이설만 하는 이는 좋은 벗이 아니랬는데.”
잠시의 입맞춤으로 숨이 가빠진 백아가 색색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헌원은 그저 듣기만 했다. 백아가 세상의 이치를 배워 가니 제 궤변이 통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제게 백아는 연인이자 정인이며 반려입니다, 백아.”
헌원은 잔뜩 서운한 낯으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웃으며 아첨하는 것만이 교언영색이 아니었다. 전과 다르게 실망을 한껏 드러내는 헌원의 태도에 백아가 당황했다.
“어…… 내게도 헌원은 정인이에요.”
눈을 도르르 굴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어여뻐 헌원은 다시 입술을 마주했다. 헌원의 눈치를 살피던 백아도 안심하여 다시 미소 지었다.
침소에 들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헌원은 어제와는 달리 제법 정리한 탁자 위를 훑어보았다.
“세책방에는 다닌 지 오래되셨지요?”
“저번에 단이가 책을 돌려주곤 가지 않았어요. 읽을 서책이 너무 많아.”
백아가 글을 읽는 것에 신이 난 헌원이 골라 건넨 책이 많았다. 탁자 위에 대여섯씩 쌓여 있는 서책도, 유일하게 펴져 있는 서책도 모두 헌원의 서책이었다.
“오늘은 무엇을 읽으셨습니까?”
“사마씨가 ‘자허부’란 것도 지었다길래 읽고 있는데, 온통 자랑만 하는 것 같아서 지루해요.”
“그는 ‘상림부’와 함께 읽으시면 이해가 좀 더 쉬우실 겁니다. 무제가 ‘자허부’를 흡족해하자 사마상여가 부족하다며 이어 지은 것입니다. 한 쌍이나 마찬가지지요.”
읽을 것이 더욱 늘어나자 백아는 시무룩해졌다. 갖은 보석이나 세공품의 자태 묘사를 좋아하기에 각자의 나라를 자랑하는 ‘자허부’도 좋아할 줄 알았더니 그는 또 아닌 모양이었다. 헌원은 백아를 무작정 달래는 대신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상림부’에서 ‘色授魂與, 心愉於側.’라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아름다움에 넋을 주니 마음이 그에 기울어 즐깁니다……. 어렸을 적에 이 구절을 읽고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천자는 사치를 경계하지만 그런 것은 당시의 헌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아는 헌원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헌원은 백아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머금었다.
“백아에게 반한 제 모습을 이보다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있을까요? 억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마상여가 이 구절을 써 제가 백아께 아름다운 문구를 드릴 기회를 앗아 갔다고요. 일천한 실력으로 감히 샘을 내었지요.”
‘자허부’와 ‘상림부’는 지도층의 사치를 풍자하는 내용이었지만 구절의 아름다움만은 유명했다. 헌원 또한 그에 반해 내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허부’ 하면…… 아버님께서 그에 빗대어 꾸중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이요?”
“예, 제가 욕심을 부려 큰돈을 써 사람을 부린 탓에요.”
욕탕을 지을 때의 이야기였다. 저 멀리 천축에서까지 사람을 불러오고 갖은 석재와 목재, 심지어 실내를 늘 밝게 하겠다며 야명주까지 사들이자 승상은 헌원을 불러 헤픈 씀씀이를 타일렀다. 그때 이 승상이 헌원의 태도에 빗댄 것이 ‘자허부’와 ‘상림부’의 교훈이었다. 그러나 헌원은 승상의 타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허부’는 위정자가 백성을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진 것을 풍자하는 것이온데 황제께서는 사냥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기는커녕 훌륭히 돌보시어 태평성대를 이루시었고 승상이신 아버님은 폐하를 잘 보필하고 계십니다. 저 또한 폐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으니 그 비유는 맞지 않습니다.”
초시에 합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두려울 것이 없었던 헌원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이 승상은 백아에 한해서는 양보가 없는 헌원의 태도를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헌원이 말을 잇도록 내버려 두었다.
“거기에 ‘자허부’를 지은 사마상여를 보면 그 자신도 부인인 탁문군의 마음을 살 때엔 가장 궁핍할 때임에도 친우에게 빌리기까지 하여 좋은 가마를 타고 임공을 향하였고 탁문군을 위해 금을 탔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궁핍하지 않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님께서는 어이해 정인을 위하는 마음을 사치라 하시는지요?”
헌원은 당돌했던 제 대답을 떠올렸다. 이제는 사치를 경계하신 이 승상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때의 대답이 부끄러운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정인께 무언들 못 드리이까. 오히려 더 드리지 못함이 늘 아쉬울 뿐인데.
헌원은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백아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쓸었다. 지금도 그 구절처럼, 가장 아름다운 이가 헌원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헌원은 부끄러움이 없어요?”
헌원으로서는 뜬금없는 백아의 핀잔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백아가 낯을 붉히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아신 걸까. 그런 건 영영 모르셔도 될 터인데. 그러나 배움과 무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아름답다, 예쁘다는 사내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아.”
퉁명스러운 백아의 말에 헌원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만 자리했던 미소가 온 얼굴로 번졌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백아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럼 저는 이제 백아의 눈에 어여쁘지 않습니까?”
헌원의 물음에 백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다르게 묻겠습니다. 백아는 저보다 어여쁜 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헌원보다 어여쁜 이…… 백아는 자신을 기루로 데리고 갔던 무화를 떠올렸으나 고개를 흔들어 무화를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그이는 나쁜 이였다. 헌원은 그이가 헌원과 백아에게 도움을 준 거라고 말해 주었지만 백아는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백아의 뇌리엔 무화가 자신을 궁지로 몰고 어두운 곳에 가두어 헌원과 떼어 놓으려 한 기억만 선명했다.
요사한 나쁜 이는 제외하고, 다른 이가 있던가? 꽤 진지한 고민에도 백아는 헌원의 질문에 헌원 이외의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외에 저자에서 헌원보다 어여쁜 이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예쁜 거로 치면 헌원이 제일이었다.
“어…… 아니요.”
백아의 대답에 헌원이 살풋 웃었으나 곧 표정을 다잡았다. 헌원은 다시 물었다.
“랑이는 어여쁩니까?”
랑이는 이제 제법 어린 티를 벗었다. 성견에 가까워진 랑이의 날렵한 눈매와 매끈한 몸은 절로 감탄이 날 정도였다. 북쪽 늑대의 피를 이었다는 서원 누님의 말을 자랄수록 실감했다. 짐승은 수컷이 더 화려하므로 랑이는 자태가 어여쁘다 할 만했다.
“랑이도…… 어여뻐요.”
“랑이와 저 중에는요?”
이건 고민할 것이 없다. 어찌 사람과 짐승을 비교한단 말인가. 답은 당연했다.
“헌원.”
백아의 대답에 헌원에 다시 물었다.
“저는 어여쁘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헌원의 낯짝 두께를 궁금해할 문답이었지만 백아와 단둘이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사실 다른 이가 있었대도 헌원은 뻔뻔스레 묻고 백아의 대답을 들었을 터다. 일례로 여름내 이런 모습을 질리도록 본 단이와 천희는 헌원이 이런 작태를 벌여도 이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 어여뻐요.”
억지 대답인 듯했지만 백아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떨떠름한 백아의 대답에 헌원이 눈가를 휘었다.
“다행입니다.”
“뭐가요?”
“백아의 눈에 더는 어여쁘지 않으면 어찌하나 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걱정하였답니다.”
헌원의 대답에 백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그랬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백아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헌원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무엇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백아는 그 답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헌원은 백아의 손을 잡아 매듭을 푼 다음 스스로 제 앞섶을 헤쳤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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