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49화 (49/66)

외전 5화.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희락 때의 꿈결 같은 황홀함을 헌원도 겪어 봤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오지 않은 희락. 헌원은 백아의 감상으로만 접해 본 희락의 감각을 상상해 보았다. 백아가 유독 봉황이 나오는 시를 좋아한 것은 희락의 감각이 그와 닮았다 여겨서일 것이다. 백아는 감상을 처음 적던 순간부터 절정의 순간을 날개나 비상에 비유하곤 했다.

백아는 희락 때를 봉황의 비상에 비유했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햇살을 가득 받은 하얀 구름이 꽃이 가득 핀 들판처럼 넓게 펼쳐지고 잘게 부순 금강석 같은 물방울들이 만들어 낸 칠색의 홍예가 폭포처럼 흐르는 사이를 봉황 중의 하나가 되어 날갯짓하는 감각이라 했다.

“그러면 청량한 바람이 오색의 깃털 사이로 스며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요.”

눈을 깜빡이면 연옥의 뜨거운 용암이 깃을 스치기도 하고 숨을 들이켜면 무거운 압력이 깃을 모두 적시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이가 있어 두렵지 않고 환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고.

백아의 감상이 그러하니 헌원은 그와 몸을 겹친 채 이승과 저승을 노니는 기분일까? 희락을 겪어 보지 않은 헌원의 감상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백아와 몸을 섞다 보면 그 감각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백아만을 감각 하는 정도는 헌원도 매번 겪는 일이었다.

“아…… 흐읏!”

“읏.”

헌원을 깊숙이 품은 채 천천히 허리를 둥글리던 백아의 신음이 높이 튀었다. 그와 함께 백아의 안이 빠듯해져 헌원도 신음을 뱉었다. 잠시 숨을 삼켰던 헌원은 내심 안도했다. 방금은 위험할 뻔했다. 절정의 감각을 상상하던 중 진득한 마찰에 쾌감이 배가되어 가라앉힌 양물이 다시 부풀 뻔했다. 헌원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대신 백아의 허리를 잡아 쾌락점을 자극했다. 이 앙큼한 정인이 만족하셔야 헌원의 위기도 사라질 것이다.

헌원이 걱정하는 것은 희락이 아주 오지 않아 백아가 실망할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헌원은 해답이 나지 않는 고민을 하는 대신 백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쪽에 온 힘을 쏟기로 했다.

다음 날 등청하는 길에 헌원을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묘했다. 헌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의 시선마저도 평소의 흘기는 눈초리가 아니라 은근슬쩍 위아래를 훑는 양이라 헌원의 신경을 거슬렀다.

문득 지난밤의 정사가 떠올라 헌원은 괜스레 옷깃을 바로 세웠다. 백아가 남긴 흔적이 보이는 건가? 슬쩍 만져 본 자리는 목보다는 어깨에 가까운 위치라 옷깃 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옷깃을 만진 김에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으나 그러고도 시선들은 여전해 찜찜해하던 차에 유 관원이 보였다.

“아, 자네 왔는가?”

씨익 웃으며 헌원을 반기는 유 관원의 눈초리도 평소와 달랐다. 관청에 들어서는 동안 무수히 받은 눈길들과 비슷한 종류로 가늘게 접히는 눈은 비슷하고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것만이 달랐다. 유 관원의 반응까지 그러하니 다시 찜찜해진 헌원은 재차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옷태를 바로잡았다.

“저 뭐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뭐? 아, 아닐세! 아니야, 아무것도.”

이번엔 헌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는 모양이 전혀 아니지 않은가.

헌원은 자리를 피하며 몸을 돌리는 유 관원을 따라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두회 형님.”

“아, 그것이, 듣지 않는 편이 나을 터인데…….”

평소처럼 관심을 두지 않을 줄 알았던 헌원이 관청에서의 호칭 대신 자와 호칭으로 부르자 유 관원은 곤란해했다. 언젠가 유 관원이 동생 삼겠다 하며 부르라 일렀던 것이라 유 관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제 표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장안에 보름쯤 전부터 크게 입소문이 난 ‘이향애록(異香愛錄)’이란 서책이 있는데 드물게 양인과 음인이 주인공이라…….”

이어지는 유 관원의 말은 이러했다.

수위가 높다는 소문 덕에 찾는 이가 많아 구하기가 영 어려웠던 탓에 여럿이 힘을 합했다. 장사치들이 상술을 더해 두껍지도 않은 한 권을 세 권으로 나누어 세책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관원 중 두엇이 어렵게 어렵게 상권과 중권을 구해 왔는데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라 다툼이 일 뻔하였다. 궁리하여 낸 방법은 다 같이 술자리에서 낭독회를 하는 것이었다. 평소 술자리에 동석하지 않는 헌원은 퇴청한 후의 일이라 알지 못하는 일이었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야 늘 그렇겠지만 책에선 매번 황홀경이지 않겠어. 거기에 얼마나 정력적인지 사흘 밤낮을 하기도 하고. 자네가 칼같이 귀가를 하니 향인들의 생활은 그리 좋은가 하는 이야기로 흘러…… 헛.”

그 서적에서 표현한 음인과 양인의 정사 묘사가 제법 적나라한지라 모두들 자리에 없는 향인의 밤 생활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듣기에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라 헌원이 검미를 찌푸리자 유 관원이 제 실례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내 점잖지 못하게 그에 휩쓸리고 말았네. 미안하이.”

“아닙니다. 제가 괜히 여쭈었습니다.”

아주 드물지는 않은 일이었다. 점잔을 빼던 이들이 노골적인 눈초리를 해 예민해졌지만 향인들은 흔히들 겪는 일이라 했다. 희락 때에 이성을 놓은 양인이 대로에서 음인을 겁탈한다는 풍문도 가끔 들리니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은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바였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터다. 그것을 문제 삼아 봐야 우습게 되는 것은 자신이기도 했고. 소란을 일으켜 백아에게 괜한 눈초리가 가거나 뒷말이 오가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당분간은 백아에게 일러 저자에 가는 일도 만류해야 할 터다.

헌원은 그리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유 관원의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저자가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대놓고 놀리려는지 ‘흑아’라는 필명을 쓴다지 뭔가.”

헌원은 퇴청한 후 저자로 향했다. 유 관원의 마지막 말에 호기심이 인 탓이었다. 근자에야 백아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둬 외출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세책방에 들르면 백아에게 권유할 수도 있고 하여 먼저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헌원이야 첫인상이 나빴지만 관원들마저 찾아볼 정도로 인기가 있는 데다 주인공이 향인이라니 나쁘지 않다면 헌원이 선물하여도 좋고, 아니라면 먼저 언질을 주어 조처해 두는 편이 좋을 터다.

백아와 함께했던 길을 걷다 보니 불쾌했던 기분도 나아졌다. 헌원은 내심 서책이 읽을 만한 것이기를 바랐다. 백아가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으니 그를 함께 읽으며 여흥을 돋워도 좋을 것이고 백아가 쓰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여름내 두어 번 간 것이 다이니 오랜만이었는데도 세책방은 어제 다녀간 듯 그대로였다.

“오랜만입니다.”

세책방과 마찬가지로 변한 것이 없는 장가가 헌원을 맞았다.

“근래엔 들르지 않으셔서 바쁘신가 했습니다. 공자께서도 뜸하십니다.”

백아의 안부를 묻는 장가에게 헌원은 짤막하게 근황을 전했다.

“고시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고시라, 학문이 많이 느신 모양입니다. 고시라면 서가에 많으실 테니 예까지 들르실 연유가 없겠습니다.”

여전히 눈치가 좋은 장가는 대화를 편하게 이끌었다. 헌원은 그쯤 하고 본론을 꺼냈다.

“근자에 호평인 서책이 있다 하여 들렀습니다.”

“근자에 호평이라면…… 혹 ‘이향애록’ 말씀이십니까?”

그동안 백아가 빌린 서책의 목록을 꿰고 있는 장가는 의외인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일전에 빌려 간 책들도 연애담이긴 하였으나 세가 규방에 드는 물건들이라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헌원이 찾는 것은 육담이 꽤 적나라하여 이전에 빌렸던 서책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었다.

“공자의 독습용으로는 난잡할 터인데…….”

“성년이니 그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 구했던 책을 주지 못한 일이 아쉬워서요.”

백아의 생일을 위해 미리 주문했던 서책 이야기였다. 헌원이 그 서책을 다른 이에게 양보했던 일을 떠올린 장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잖은 이와 순진한 이였지만 한창 궁금해할 나이였다. 지난번의 서책은 아쉬운 정도로만 조운모우를 담고 있었으니 소문을 들었다면 호기심이 일 만도 했다. 장가야 책을 구해다 주면 그만이었다.

“구할 수 있습니까?”

“대인께서도 아시니 여기로 방문하셨겠지만 워낙 찾는 이가 많아 품귀인지라…….”

뜸을 들이는 장가의 말에 헌원은 소맷자락에서 미리 마련해 온 주머니를 꺼냈다. 장가는 헌원이 건네는 주머니를 받아 안을 흘끔 확인했다.

“칠 일 정도, 필사의 순서를 당겨도 그 정도는 걸릴 겁니다.”

“닷새는 어렵겠습니까?”

“노력이야 해 보겠습니다마는…….”

장가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헌원이 다시 소매에 손을 넣었으나 장가가 손사래 쳤다.

“어이쿠, 넣으십시오. 웃돈이 더 있어도 어렵습니다. 대인을 아니 흥정 없이 아뢴 겁니다.”

헌원은 고개를 젓는 장가에게 기어코 은자 한 냥을 더 쥐여 주고 세책방을 나왔다.

헌원은 세책방이 있는 골목을 나서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헌원의 뇌리에 지난밤 백아가 수기를 찾던 모습이 떠올랐다. 장안에 유행한다는 그 ‘이향애록’이 아무리 적나라하다 한들 그보다 더할까. 갑자기 떠오른 수기의 내용에 헌원의 낯이 홧홧했다. 헌원은 가을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제 괜한 상상을 털어 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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