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고사나 시를 듣던 백아가 유독 귀를 기울여 들은 이야기는 역시 사랑 이야기였다. 그중에 가장 눈을 빛낸 때는 서상기(西??)를 읽어 줄 때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극 중 남주인공인 장생이 여주인공인 앵앵을 위해 봉구황(鳳求凰)의 곡조를 탈 때 가장 흥미로워했다.
헌원은 여름내 집 안에서 더위를 식히는 백아를 위해 제궁조(諸宮調:대사가 섞인 가곡) 명인을 불렀다. 금을 타는 명인에게 백아가 흥미를 보이던 봉구황을 노래하게 하였다.
“이 곡, 헌원이 불러 주었던 노래잖아!”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백아를 앓을 때의 제 처지와 맞물린 가사가 감명 깊어 헌원이 기억한 곡이었다. 백아가 어렸을 적 명인을 두어 번 부르기도 하였으나 악단이나 기예단에 비해 홀로 금을 타는 연주는 어린 백아가 영 지루해했다. 헌원이 멋쩍게 흥얼거린 것만 기억하는 걸 보니 역시 연주할 때에는 깊은 잠이 드셨던 모양이었다.
이후로 백아는 그 가락을 기억해 종종 저렇게 흥얼거리곤 했다.
헌원은 그 마지막 구절을 ‘날 수가 없어 그대에게 가지 못하니, 나는 죽어 갑니다.’ 정도로 해석해 주었으나 백아는 한자를 멋대로 읽은 것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헌원은 애틋해야 할 곡조를 들으며 자주 웃음이 터졌다.
“전에 드렸던 다른 시도 읽어 보셨습니까?”
헌원은 백아에게 제목이 같은 다른 시도 알려 주었다. 전한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시였는데 그리워하는 모습이 큰 금곡에 비해 꼬리를 비비며 같이 살자고 하는 등 좀 더 적극적인 데가 있었다.
“응, 그것도 좋았어요.”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습니까?”
헌원은 조금은 노골적인 구절을 떠올리며 백아에게 하체를 가까이 했다. 이 시를 언급한 제 의도를 이해하셨을까?
“봉과 황에게도 꽃잎이 있었을 거예요.”
백아의 감상은 헌원은 생각해 보지 않은 이야기였다. 헌원이야 세간에 향인이 꽤 적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하여 체화했지만 백아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과 헌원의 형제들, 따르는 단이까지 주변이 다 향인이니 저리 오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백아의 감상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헌원은 백아의 말을 긍정으로 받았다. 정정은 나중에 해도 될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백아가 옳을지도 모른다. 봉황은 상상 속의 새이니 그 찬란한 오색의 깃털 안에 붉은 꽃잎이 제 자리를 점하고 있다 한들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백아가 있다 여기면 그것이 옳다. 백 년쯤 후엔 꽃잎이 봉황의 상징이 되어 문인들이 그를 노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름마저 하나로 불리는 새이니 영원토록 붉을 겁니다.”
헌원의 대답에 백아가 집었던 마지막 서책을 내려놓았다. 헌원의 품 안에서 빙글 돌아 마주선 백아는 눈꼬리에 웃음을 달았다.
“흐음, ……우리처럼?”
헌원의 허리에 팔을 감은 백아의 손가락이 헌원의 미추(尾椎:꼬리뼈)를 향했다. 헌원의 뜻을 알아듣고도 모른 체를 하셨던 모양이었다. 헌원은 빙그레 웃으며 백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처럼.”
“잘 있나 볼래요.”
말과 함께 한 백아의 손길에 헌원은 진즉부터 달아 있던 흥분을 여과 없이 내보였다. 오겹 매듭을 풀고 옷깃을 연 백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헌원의 색향을 맡은 백아가 입가에 볼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보석상이 곡옥을 평가하듯 지긋한 눈길로 헌원의 가슴을 보았다.
“어디 보자…… 잘 있네요. 색도 어여뻐.”
헌원의 꽃잎 색을 품평하던 백아는 손을 뻗어 헌원의 단단한 가슴을 격려하듯 톡톡 두드렸다. 백아의 손이 등잔의 빛을 받아 굴곡이 뚜렷한 헌원의 가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백아의 하얀 손가락이 건강한 헌원의 살갗을 어루만졌다.
두어 번 남짓한 백아의 손길에 헌원의 색이 옅은 유실이 바짝 성이 났다. 백아가 헌원의 유실을 괴롭히는 데에 흥미가 생기려는 찰나 헌원이 물었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확인은 마치셨습니까?”
“응! 마음에 들…… 흡!”
헌원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낮게 웃으며 백아의 입술을 훔쳤다. 색향을 맡을 수 있게 된 백아는 주변을 가득 채운 색향과 직접적인 타액의 접촉에 낯을 발갛게 붉히고 녹아내렸다.
종일 별채 안에서 글을 읽었는지 능라로 지은 홑겹의 포만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던 백아는 헌원의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반라가 되었다. 헌원은 백아를 번쩍 안아 들어 다리속곳마저 모두 벗겨 내었다. 백아의 턱을 들고 헌원이 고개 숙여 했던 입맞춤은 어느새 위치가 전복되어 백아가 고개를 숙인 채 헌원에게 축복을 내리듯 입 맞추고 있었다.
전라가 된 백아는 자연스럽게 헌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헌원은 백아를 안아 든 채로 천천히 침상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끈 일어선 헌원의 양물이 천 하나를 사이에 둔 백아의 아래를 쿡쿡 찔렀다. 사이의 천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액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침상에 다다른 헌원이 입술을 떼자 백아가 찰나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목을 감았던 손을 풀고 헌원의 양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다시 한 번 긴 입맞춤을 한 후, 헌원은 고개를 틀어 달려드는 백아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색향이 가득한 타액이 아쉬운 백아는 헌원의 콧잔등을 핥았다.
“으응…….”
“이번엔 제 차례인데, 안부를 묻지 말까요?”
백아가 제게 각인한 게 꿈만 같았던 헌원은 여름 내내 백아의 꽃잎을 확인하고자 했다. 처음 각인을 말했던 단 한 번 이후로 백아의 꽃잎은 헌원이 확인할 때마다 늘 생기 있는 붉은빛이었다.
꽃잎은 막 탈의를 하였을 때엔 발랄한 다홍빛이었다가 절정에 이르러 교성을 뱉을 때엔 선명한 진홍빛을 띠었다. 그 변화는 사계의 모든 붉은 꽃의 색을 다 품은 듯 다채로웠으나 항상 눈이 시리도록 고운 빛깔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게 신기하고 감사하여 백아 가슴의 꽃잎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헌원에게 백아가 칭얼대었다.
“헌원은…… 정인인 나보다 꽃잎의 안부가 더 궁금한가 봐.”
비록 상대가 자신이었지만, 자신을 향한 백아의 질투가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헌원은 뾰로통한 표정의 백아에게 입맞춤했다. 타액과 함께 섞인 백아의 색향이 짜릿하게 스쳤다. 제천대성이 탐을 내었다는 반도원 복숭아의 맛이 이러했을까. 달콤함에 머리마저 아찔했다.
“백아의 손끝이 너무 어여뻐 달을 잊는 우를 범했습니다. 어찌 사죄해야 할까요?”
상제께 진상한다는 반도보다 더 말캉하고 부드러운 백아에게서 간신히 입술을 뗀 헌원은 아쉬움에 다시 입술 끝을 마주하고 백아에게 속삭였다.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음인지 몽롱한 백아의 표정에 의아함이 섞였다.
“손끝?”
“예, 제게 백아의 이 꽃잎이 달을 가리키는 손과 같았습니다.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였지요.”
“다른 길로 가진 말아요, 헌원.”
“꽃잎이 곧 백아이니 길을 잃은 적은 없어요. 저는 그저 지나치게 아름다워 가는 이의 발길을 붙드는 관문을 거쳤습니다, 백아.”
“그러면 언제 달에 닿나요?”
“걸음을 서두르겠습니다, 백아.”
그날 밤 헌원은 백아에게 새벽 일출을 보여 주는 것으로 용서를 구했다.
“달에 닿으니 사위가 환하여 이제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습니다.”
헌원은 청명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절정에 오른 백아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이었기에 백아는 헌원의 말을 들으며 그대로 품에서 잠들었다.
“온통 하얘도 이것만은 붉으니까요.”
헌원은 백아를 침상에 고이 눕히고 백아의 꽃잎을 어루만졌다. 하얀 피부 위에 자리한 진홍빛 꽃잎은 눈밭에 핀 해홍 같았다. 붉은 물감을 덜어 내듯 계속해서 매만지자 어느새 고른 숨을 뱉는 백아의 꽃잎은 두견화의 색을 띠었다. 헌원은 그제야 백아의 꽃잎과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추고 잠을 청했다.
하루를 꼬박 기절하여 다음 날 일출 때에 정신이 든 백아는 사죄를 청하는 헌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실은 목이 쉬어 못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자진해서 앞섶을 열고 꽃잎을 보여 주었다.
그날 이후 헌원은 백아가 서운해할까 백아의 꽃잎 색을 지나치게 오래 살피는 일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이 썩 마음 같게는 되지 않았다. 흰 피부 위에 유난히 붉게 도드라진 백아의 꽃잎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꽃잎이 헌원에겐 난관인가 봐.”
“시련이 가득한 난관보다는 붉은 융단 위 꽃잎이 휘날리며 개선장군을 환대하는 성문에 가깝습니다.”
매번 꽃잎에 넋을 빼앗기는 헌원에게 핀잔을 주던 백아는 헌원의 말에 꽃잎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헌원처럼 내내 꽃잎을 살피는 자신을 발견했다.
절정의 순간에 깊은 용암처럼 타오르는 꽃잎은 정염이 깃든 헌원의 낯만큼 시선을 빼앗길 만한 것이었다. 그저 각인의 상징이었던 것이 왜 이리 어여쁜지. 그동안 헌원을 보느라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후로 백아도 헌원의 꽃잎을 확인하니 이는 매일의 안부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백아는 꽃잎의 어여쁨을 안 후에도 여전히 헌원이 안아 주는 것이 더 좋았다. 헌원은 어느 쪽이나 다 좋은 듯했지만 백아는 보기만 하며 지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좀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꽃잎의 색은 헌원을 품은 채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꽃잎의 안부를 청하는 헌원의 질문에 백아는 헌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염이 타오르는 안달한 눈이 백아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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