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헌원은 침소에 들어서며 백아의 집중을 흩트리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였다. 문 앞에 드리운 주렴과 휘장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걷은 헌원은 탁자 앞에 선 백아를 보았다. 서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으리라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백아는 탁자 위의 서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백아, 다녀왔습니다.”
“헌원? 왔어요?”
백아는 여전히 서책을 헤집으며 헌원을 맞았다. 잠시 눈을 들어 헌원에게 미소를 지은 백아의 시선은 다시 탁자를 향했다. 탁자 위엔 헌원의 서재에서 꺼내 온 서책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헌원은 조금 전의 생각을 조금, 아주 조금 철회하기로 했다. 아직 제 마음이 완벽하게 단단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백아의 시선을 받는 저 서책들이 얄미우니 말이다.
헌원은 백아에게 다가가 등 뒤에 섰다. 한 손으로 백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헌원은 빈손을 뻗어 백아가 뒤적이는 책들을 받아 들어 한편에 차곡차곡 쌓았다. 헌원은 저도 모르게 뾰족해진 목소리를 애써 다스렸다.
“무엇을 그리 ……찾고 계십니까?”
“내가 필사하던 것, 먼저 쓴 종이는 있는데 옮겨 적던 서책이 보이지 않아요. 분명 여기 두었는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양이 야속했다. 백아의 허리를 감쌌던 헌원의 손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헌원의 손은 능청스럽게 백아의 맨살을 타고 올라 꽃잎 부근을 지긋이 쓰다듬었다.
예민한 곳을 매만지는 손길에 백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백아는 옷 위로 헌원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가 헌원의 손이 가슴을 덮자 제풀에 움찔 몸을 굳혔다. 갈무리하고 있던 백아의 향이 갑자기 피어올라 둘의 주변을 감쌌다. 백아의 반응이 마음에 든 헌원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서재에 둔 것은 아니고요?”
백아가 감상을 적은 낱장의 한지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헌원은 정리하여 적기를 권했다. 백아가 헌원이 필사하는 양을 유심히 보기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빈 서책도 마련해 주었더니 백아는 단순히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엮어 이야기를 하나 만들고 있었다.
시나 부에 관한 서적들은 헌원의 서가에도 있었고 쓰기에 재미를 붙이니 세책방에 가는 빈도가 줄었다. 그래서 헌원은 내심 안도했다. 개화 전, 백아에게 세책방을 권하면서도 한편에 불안이 가시지 않았는데 개화 후의 백아가 저자를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초조하고 불안하여 좌불안석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백아 생각에 골몰하면 손이 움직이지 않는 헌원을 유 관원을 비롯한 동료들이 일깨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
마음에 관한 불안은 아니었다. 저자를 오가며 백아와 마주칠 모든 이들에 대한 불안이었다. 헌원의 심정으론 그 모두가 위험 요인이었다. 음심이나 악심을 품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욕이나 호기심으로 백아에게 호의를 보일 사람들이 헌원은 달갑지 않았다.
여하간, 두어 달쯤 전 빈 서책의 반 정도를 채운 이야기를 훑어보았던 헌원은 내심 적잖이 놀랐다.
백아가 만든 이야기는 가난한 음인인 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한 양인이 갖은 이유를 대며 금은보화를 안겨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금은보화의 산지나 세공, 색이나 자태의 묘사, 감정 평이나 보관 방법 등이 꽤 자세하고 정확했다.
백아는 글씨가 엉망이라며 부끄러워했지만 서체야 계속 쓰면 늘 테니 신경 쓸 것이 못 되었고, 헌원이 감탄한 부분은 제법 매끄러운 이야기의 이음새와 보석이나 세공품에 대한 의외로 해박한 백아의 지식이었다.
“이런 걸 다 어찌 아셨습니까?”
“이상해요?”
한참이나 가만히 제가 쓴 글을 읽는 헌원을 보던 백아가 물었다. 헌원의 평이 박할까 긴장하였는지 헌원의 소매를 꼭 말아 쥐고 있었다. 헌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 주었다.
“아니요. 감탄하여 그럽니다. 필체도 제법 반듯해지셨고.”
서책의 뒤쪽 빈 책장 사이에 끼워 놓은 한 장의 선지에는 후반부의 내용도 간략하게 있었다.
양인은 순진한 음인을 구슬려 금은보화 하나를 건넬 때마다 그 답례로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애정 표현을 요구했다. 백아답게 거침없이 써 내린 애정 행각 끝에 몸 정이 먼저 든 둘은 뒤늦게 마음을 확인한다.
“필명은 거기 적은 흑아 말고 다른 거로 할 거예요.”
“흑아도 나쁘지 않은데요.”
“헌원이 싫어하잖아. 다른 거로 할래.”
어쩌면 하시는 말마다 이리 헌원을 행복에 물들게 하시는지. 헌원은 저를 위하는 백아의 말을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정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인장을 만들어 드릴 테니.”
번듯하게 날인까지 한다면 헌원의 서가에 한 자리를 마련해 주어도 좋으리라.
비록 정사의 감상을 적던 것의 연장이라 음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백아가 즐거워하며 쓴 것이니 내용이 저속한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선지의 끝자락에 썼다가 줄은 그은 ‘흑아’라는 글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 보여 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지식은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헌원의 기억에 제 서가에 이런 내용을 다룬 서책은 없었다. 헌원은 일찍부터 관직을 목표로 했던지라 가문의 상단엔 크게 관여하지 않은 탓이었다. 최근에 어머님과 함께 장부를 정리한다지만 이 승상가의 상단이 주로 취급하는 물건은 곡식이나 약재였다. 배운다고는 하나 사흘에 한 번꼴인지라 따로 가르침을 내릴 만한 시간은 없었을 텐데…….
헌원의 궁리가 무색하게 백아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님이 선물을 주실 때마다 말씀하시던 것들 하고…… 어머님은 전국의 솜씨 좋은 이들을 다 알고 계시던걸요. 아, 몇 개는 노리개를 사며 들은 것. 장안에서 옻칠을 가장 잘하는 칠장이나, 색실을 잘 꼬는 이, 목각에 재능이 있는 조각사는 방물상이 이야기해 주었어요.”
헌원은 백아의 대답에 다시 놀랐다.
그걸 다 기억하셨습니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니 그전에 들은 이야기나 설명은 죄 기억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저자에 지필묵을 들고 가는 것도 아니니 그도 기억이 다일 테고.
백아가 선물 받은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어 놀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글로 적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억이 오래되면 섞이기 마련인데 백아는 그 특징들을 제법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헌원은 백아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런 이를 모자라다 소리를 듣게 하였으니 제 과오가 컸다.
“이야기를 나눠 볼 걸 그랬습니다. 그럼 이렇게 박식한 걸 일찍 알았을 텐데.”
“헌원의 공부는 방해하면 안 된다 해서.”
생각해 보면 백아의 말 상대는 올해 들어서야 여유가 생겨 늘었지 전에는 그리 많이 하지 못했던 듯했다. 어렸을 때엔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무예 수련에 매진했고, 무과를 포기하기로 다짐한 이후엔 결과를 먼저 보여 드리려 둘을 병행했으니 말이다. 관원이 된 후엔 관청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고.
그래서 저 대신 진원에게 그리 심술을 부리시고 골을 낸 겐가. 헌원은 산사에 가 있는 진원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백아에게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백아에게,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백아의 흥미를 돋게 할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면 방법은 많았을 터였다. 자신의 수련이나 공부를 조금 미뤄 두더라도 백아의 눈에 띄게 본을 보였다면 백아도 쉬이 흥미를 느꼈을 텐데. 진원과 놀며 셈을 쉽게 익힌 것처럼 말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지난 일을 되짚는 헌원의 미간에 백아가 손을 올렸다. 백아는 헌원의 미간에 생긴 옅은 내 천 자를 문지르며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배우지 않은 거예요, 헌원.”
“…….”
제 표정을 보고 생각을 헤아려 주시기까지 하는 백아가 어찌나 감사했던지. 금세 표정이 바뀐 헌원의 눈빛이 겸연쩍어진 백아가 괜스레 딴청을 피웠다. 그날은 그렇게 침상으로 향했던 것 같다.
지난 일을 생각하던 헌원은 다시금 백아를 당겨 안았다. 깊이 끌어안는 팔을 백아가 잡았다. 백아는 여전히 서책을 찾고 있었다.
“단이가 치웠나?”
“단이는 글을 잘 모르니 그럴 수도요.”
단이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아이지만 글은 익히지 못했다. 백아가 글공부를 즐겨 했다면 곁눈질로라도 배웠을 테지만, 백아를 쫓아다니느라 바쁘니 시간이 없었을 터였다. 헌원과의 공부는 주로 단둘이 하니 단이는 영 기회가 없었다. 글 선생을 하나 붙여야 할까, 나중에 백아의 일을 도우려면 글을 배워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옷깃을 파고든 헌원의 손은 이번엔 백아의 유실을 건드렸다. 헌원은 손끝으로 돌기가 오돌도돌 돋은 여린 살갗을 덧그렸다. 백아의 목덜미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정리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헌원의 보챔이 통한 모양이었다. 백아가 서책을 뒤적이던 것을 멈추고 어지러운 탁자 위를 정리했다. 헌원은 얼른 백아의 정리를 도왔다. 백아는 서책을 대충 한데 그러모으며 얼마 전부터 입에 붙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使我?亡。나는 망했어요-.”
백아의 흥얼거림에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던 헌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헌원은 백아의 어깨에 콧등을 얹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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