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헌원고담(獻元苦談) 외전
여름내 짙은 녹음을 뽐내던 나무들은 슬슬 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원한 실내에서 글을 읽거나 글을 써 보던 백아는 주변을 물들이는 다채로운 색채에 눈을 돌렸다. 백아는 이르게 따스한 빛깔로 물든 나뭇잎을 따 와 헌원의 서책 갈피에 숨겨 놓았다. 아직 생기가 가득한 나뭇잎에서 배어 나온 수액이 책장을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였다.
백아는 헌원이 단풍 물이 든 책장과 나뭇잎을 햇살이 들지 않는 그늘에 놓아 말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다음 날부터 창가에서 먼 침소의 문갑이나 서랍장 위에는 단풍들이 열을 지었다. 헌원이 적당히 마른 나뭇잎을 하나씩 들어 읽던 서책 갈피에 끼우는 모습을 보며 백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근심 걱정 없이 유유자적한 나날이었다.
음양의 이치를 깨우치면서 백아가 이르게 쾌감을 배운 일을 원망할까 염려했던 헌원은 제가 좋은데 무엇이 문제냐는 백아의 태도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괜한 걱정이었다. 헌원이 해야 할 일은 백아를 마음껏 아끼고 귀애하는 것뿐이었다. 그 이외에 헌원이 근심하고 염려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헌원이 백아를 은애하고 애정하는 눈길로 바라보면 백아는 빛을 가득 머금은 밝은 미소로 답해 주었다. 젖살이 빠진 볼에 자리한 보조개가 어여뻤다. 종종 행복이 지나쳐 두렵기까지 하였으나 서로를 향한 각인은 굳건한 성벽이요 단단한 지반이었다.
백아가 헌원을 닮은 첫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것만 빼면 둘은 의견이 다른 일도 없었다.
“사내아이를 낳을 테니 헌원처럼 건강해 보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내아이라도 백아처럼 흰 편이 좋습니다.”
서원 누님이 다녀간 이후 백아는 꽤 진지하게 첫 아이에 관해 고민했다. 성격을 넘어 생김새까지 생각이 뻗은 백아는 저와 헌원의 장점을 나열해 보다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던지 울상이었다. 어느 날은 초상화를 그리자길래 연유를 물었더니 백아는 헌원이 예상도 하지 못한 답을 했다.
“헌원의 눈에 내 코나 입술이 어울리는지 볼 거예요.”
초상화를 조각조각 잘라 붙이겠다는 말에 이번엔 헌원이 울상을 지었다. 떠올려 본 모양새가 꽤 해괴했던 탓이다. 또 승상가까지 모셔 온 화가가 그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더운 낮 동안 옷을 모두 갖춰 입고 가만히 계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적잖이 당황했던 헌원은 가까스로 다른 이유를 들어 백아의 초상화를 유예했다.
그렇게 평범한 날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일이 많아진 헌원의 귀가가 늦어졌음에도 침소에 들어설 때까지 백아가 보이지 않았다. 근래 들어 꽤 잦아진 일이었다. 동화나 연애담을 넘어 헌원이 풀이해 주는 시나 부에도 재미를 붙인 백아가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책을 들여다보기 일쑤인 이유였다.
헌원은 문득 이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며 서운해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 작게 웃음 지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던가. 백아의 행동은 같은데 제 마음이 그를 전과 다르게 받아들였다. 백아와의 사이가 견고해진 연유이리라. 헌원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제게 줄 서책을 필사하는 헌원의 옆에서 책을 읽던 백아가 슬쩍 벼루 위에 놓인 붓을 집어 보기에 헌원은 서랍장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백아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지필묵을 꺼냈다.
모란 문양으로 빚어낸 백자 연적과 흑요석을 깎아 만든 벼루, 동방의 소국에서 진상한 송연묵, 지금은 돌아가신 유명한 붓장이 만든 당황모 무심필 등 그 어린 날에도 헌원이 심사숙고하여 구한 선물이었다. 몇 년이나 고이 간직했던 물건들을 백아는 전과 다르게 화사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백아는 그것으로 좋은 구절은 따로 적어 두기도 하고 예쁜 글씨를 연습한다며 헌원의 필사를 다시 필사하기도 했다.
헌원은 글쓰기가 좀 익숙해진 백아에게 한 가지를 권했다.
“일기를 써 보시는 건 어떠한가요, 백아.”
“……일기?”
“서책에서 읽은 문장도 좋고 백아의 감상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날그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 보세요. 도움이 되실 겁니다. 도움이 아니어도 추억이 될 테고요.”
전과 달리 솔깃해하는 백아의 모습이 헌원은 뿌듯했다. 그러나 그 권유로 백아가 색사의 감상을 적으려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기를 권한 저녁에, 헌원은 그날도 역시 상을 핑계로 백아와 몸을 섞었다. 헌원이 백아가 옮겨 적은 구절을 감상하는 사이 백아는 헌원의 앞에 낮 동안 필사한 종이를 잔뜩 쌓아 두고는 그를 보고 감탄할 헌원을 고대하고 있었다. 글씨가 가득한 당지 너머 백아의 눈에 가득한 사심이 헌원의 사심과 일치해 헌원 역시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백아를 안았다.
침상으로 자리를 옮길 여유도 없이 교의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헌원의 단단한 허벅다리 위에 올라앉은 백아는 한 차례 절정에 오른 후 헌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아래에는 사정 후에도 여전히 기세가 흉흉한 헌원의 하초를 품은 채였다.
“헌원, 잠시만…….”
색색거리며 헌원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던 백아가 갑자기 몸을 탁자 쪽으로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헌원은 당황한 와중에도 손을 뻗어 백아의 허리를 받쳤다. 백아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안을 휘젓는 헌원의 양물에 비음을 흘리며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다시 손을 뻗어 붓을 쥐었다.
“백아?”
“가만, 아흣, 가만있어 봐요.”
붙든 팔을 찰싹 내리치는 손길에 헌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백아를 지탱했다. 탁자 저편에서 새 당지를 끌어온 백아는 먹을 듬뿍 적신 붓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크기는 천 년 ……묵은 거북의 머리에 비견할 만하고…… 기둥을 따라 돋은 ……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 천할 때 하늘을 수놓는 천둥처럼 뻗고…… 기세는…… 범이 사냥감을…… 치고 빠지는 모양…… 새는 날랜 수리의 그것이며…….”
제 하초를 품은 채로 글쓰기에 여념이 없는 백아를 헌원은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공을 들여 쓰는 글을 방해할 수도 없어 가만히 지켜보다가 백아가 문장 끝의 방점 후에 긴 숨을 내쉬는 사이 헌원이 입을 열었다.
“……백아, 무얼 하시는 겁니까?”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 두려고요.”
“무엇…… 을요?”
이해할 수 없는 백아의 행동에 헌원은 어눌하게 되물었다. 아마도 정 부인의 배 속에서 난 이래 가장 아둔한 행동이었으리라.
“헌원이요.”
헌원은 백아의 대답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뜻을 파악하느라 가만히 백아를 보는 헌원에게 백아가 붓을 놓고 다시 안겼다. 헌원의 목에 양팔을 감은 백아의 허리가 조금 들렸다. 백아는 스스로 허리를 내려 제 몸에서 빠져나간 헌원의 양물을 품으며 헌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거요, 이 즐거움은 무엇에 비유해야 할지 모르겠어.”
백아의 대답에 헌원은 답지 않게 입만 벙긋대었다. 그러니까, 저 갖은 신수나 영물을 들어 한 비유의 대상은 헌원의 양물이었다. 사실을 안 순간 목덜미가 걷잡을 수 없이 홧홧해졌다. 백아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헌원의 뺨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오늘 가장 기억하고 싶은 건 이것인걸…….”
눈을 맞추며 하시는 정인의 말씀에 헌원은 그저 초야를 치르는 어린 신랑처럼 낯을 붉힐 뿐이었다. 헌원은 그 밤 쓰지 않아도 내내 기억할 만한 밤을 백아에게 선사했다.
표현이 어렵다며 울상을 짓는 백아에게 묘사가 아름다운 시나 글을 추천한 건 이후의 일이었다. 헌원의 독려가 더해지자 백아는 기분이 고양될 때면 정사 중에도 종종 붓을 들었다. 묘사로 시작한 일기는 미려한 어휘를 곁들인 감상으로 변했다.
침상에서 후희를 즐기다가도 백아가 글을 쓰고 싶다 하면 헌원은 백아와 결합한 채로 침소 안을 누볐다. 탁자 위에는 백아의 감상을 바로 적을 수 있는 지필묵이 항상 놓여 있었다.
가끔 백아는 지난 일기들을 뒤적이며 헌원의 말대로 추억하기도 했다. 품 안에서 혹은 바로 귓가에서 이루어지는 정사의 낭독에 헌원은 낯을 붉히며 난감해하면서도 즐거워하는 백아를 만류하지 못했다.
백아가 글을 배운다는 소식에 진원 다음으로 기뻐한 사람은 정 부인이었다. 정 부인은 헌원이 없는 낮 동안엔 백아를 불러 전부터 벼르던 장부 정리를 함께 했다. 규모가 큰 데다 상단도 겸하는 이 승상 댁 가계를 운영할 준비를 이제라도 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미 익숙한 수와 비슷한 단어 몇 개가 반복되는 기본적인 셈을 백아는 꽤 재미있어했다.
백아가 영 관심을 보이지 않아 상단은 진원이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승상가의 다음 안주인은 엄연히 백아였다. 백아가 이어받고자 한다면 진원이 보필하는 형식으로 운영해도 될 터였다.
각이 지고 반듯한 헌원의 서체에 비하면 백아의 서체는 강약이 적고 둥글게 흘리는 편이었다. 백아는 자신이 쓴 글씨를 반듯한 헌원이나 유려한 정 부인의 글씨와 비교하며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곤 했다. 헌원은 아직 붓 잡는 법이 익숙하지 않아 그런다며 백아를 달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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