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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43화 (43/66)

43화.

백아의 질문에 헌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아가 의심하고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백아를 만난 이후부터 헌원의 마음은 지극히 당연하고 온당한 것이었기에 백아가 저런 생각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아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행동이 백아로 하여금 제 사랑을 의심하게 하리라곤 꿈에도, 맹세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것은 아니다.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백아 하나만큼은 저를 보며 믿어 주고 제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헌원이 숨을 쉴 수 있다. 그래야 헌원이 살 수 있다.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제가 할 대답을 깨달은 헌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 그 전에 소신의 목숨부터 거두어 주시옵소서.”

헌원의 대답에 홍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제는 확연하게 볼우물이 진해졌으나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 헌원은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끝내 불충을 하겠다는 말이더냐?”

“아니옵나이다, 폐하. 뜻대로 하신 후에 소신이 살아 있다면 태자 저하께 누가 될 것이옵니다. 어차피 윤하 없이는 오래 이어지지 않을 목숨, 미리 거두시어 후환을 없애시라 청하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소신의 충이옵니다.”

백아와 함께하지 못할 거라면 죽는 것이 낫다. 설령 그것이 불충이라 하여도 헌원으로선 불가항력이다. 백아 없이는 오래 이어지지도 않을 목숨이니 이것이 헌원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안이었다. 폐하라 하더라도 이 이상은 바라실 수 없다.

“못난 놈.”

헌원의 답을 들은 홍윤의 말이었다. 헌원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정인에게 확신 하나 주지 못하는 놈의 충 따윈 필요 없다. 놀아 보려 했더니 흥이 깨졌다. 가 보거라. 갑시다, 황후.”

홍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황후전을 나섰다. 급히 일어선 희원은 다음에 보자는 말만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홍윤의 뒤를 따랐다.

이로써 백아와 친해지기는 요원해진 건가.

희원은 시무룩해졌다. 백아에게 할 말도, 줄 것도 많았는데 일이 이리되었으니 백아가 희원을 보고 두려워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심 기대가 컸는데. 헌원 놀리는 재미도 제법 좋았고 말이다.

희원은 헌원과 백아가 있을 황후전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만큼 왔는지 안은 보이지도 않았다. 친해지지 못할 거면 구경이나 하고 싶은데, 몰래 돌아가 숨어서…… 아니 근데, 황후인 내가 왜 황후전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게야?

뒤를 흘끔거리며 걷던 희원은 홍윤이 멈춰 선 걸 알아채지 못했다. 막아선 무언가에 부딪히고 보니 앞서 걷던 황제의 옥체였다. 놀란 희원이 급히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홍윤이 제지했다.

“무화에게 지급한 금이 아깝지 않을 구경이로고. 아니, 무화는 이런 구경을 해 놓고 금을 청구했단 말인가? 어째 날로 금을 탐하는구먼.”

홍윤의 말에 희원은 웃었다. 역시나, 천둥 같던 호통과 역정은 다 꾸며 낸 행동이었다. 장난을 험하게 치시는 것은 어린 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나이 들면 철든다고 했누?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드릴 따름이옵니다. 폐하.”

“입에 발린 말 치우세요, 황후. 속으로는 저들을 어찌 다시 부르나 이유를 찾고 계시면서. 이봐, 너. 가서 얼른 꺼지라고 전하거라. 그래야 황후께서 황후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이 아니냐. 흠, 그리고 준비도 하라 전하거라.”

백아와 말을 길게 나누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웠던 희원은 합궁을 원한다는 홍윤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백아는 일단 밀어 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가족이고 아랫사람이니 또 기회가 있을 터다.

희원이 다가서자 홍윤은 희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한 팔로도 번쩍 들어 올리는 통에 희원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이이는 나이가 들수록 팔심만 세어지는 것 같아? 희원은 저항 없이 홍윤의 품에 안겼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황제와 황후의 애정 행각이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번복하고 싶어지니.”

“천자께서 한 입으로 두말하실 리 없지요.”

함께 지낸 세월이 너무 길어 놀리는 재미가 없다고 홍윤은 투덜대었다. 거 그래, 헌원처럼 벌벌 떨어야 재미가 있지 않겠냐 이 말이다.

“그리고 헌원의 그 아이.”

“백아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아주 백치는 아닌 듯하던데.”

“설마 진담이셨던 건…….”

홍윤을 붙든 희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홍윤은 떨어지려는 희원을 바짝 안았다.

“무슨, 둘이 이미 만 리는 못 되어도 천리장성은 쌓은 듯 보이더구먼.”

홍윤의 말에 희원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 녀석 황궁에 들면서도 백아에게 제 향을 잔뜩 묻혀 놓았다. 희원 자신이야 형제의 향이니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황제께서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더 큰 경을 치를 수도 있었을 터다.

“불러다 글 좀 가르쳐 보세요. 관직을 내리려면 글은 알아야지.”

“예?”

“아비가 자사를 지냈으니 어사 정도면 어떠한가. 헌원 그 녀석은 호위나 하라지.”

홍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헌원을 알차게 써먹으리라. 죽고 못 사는 그 짝과 함께 미담이 되어 주면 더욱 좋고.

결코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배려에 희원은 홍윤의 품에 안겨 남몰래 웃음 지었다.

돌아가는 길에 헌원과 백아 사이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오갈 수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보는 눈이 있는 데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라 둘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출발 전 백아의 고집에 한 필만 가져온 말의 투레질만이 어색한 둘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이, 이!”

침소에 들어서자 헌원은 온 힘을 다해 제 가슴을 두드리는 백아를 있는 힘껏 감싸 안았다. 거센 몸부림과 함께 흘린 눈물이 헌원의 앞섶을 적셨다.

무언가 말하려던 백아는 치미는 감정에 말을 뱉어 내지 못하고 꺽꺽거리는 울음만을 토해 놓았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두려웠는데! 죽여 달라는 헌원의 말에 가슴이 아파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백아는 헌원의 품에서 하지 못한 말만큼 울며 몸부림쳤다. 헌원은 말없이 백아를 품에 안고 백아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죽는다고, 죽는다고……!”

“살려고, 살려고 그리한 겁니다. 백아.”

다시 헌원의 가슴을 내리치려던 백아는 헌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다. 헌원은 서둘러 앞섶을 풀어헤쳤다. 마음고생으로 말린 장미색이 된 헌원의 꽃잎이 드러났다. 부정할 수 없는 헌원의 마음 표식이었다. 백아는 물끄러미 그 꽃잎을 보았다.

다행이다. 보여 줄 수 있어서.

백아에게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향인으로 태어난 것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

제가 아니었으면 음인이 되지 않았을까, 평범한 평인으로 더 좋은 짝을 만나지 않았을까, 관직에 나섰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을 백아의 미래를 제가 막아 버린 것 같아 헌원은 늘 백아에게 미안했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외척으로서의 황궁 방문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가 향인인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헌원은 생각했다.

“백아가 없으면, 헌원은 죽어요. 이것은 절대적인 명제입니다. 이것이 그 증명이에요, 백아.”

백아는 물끄러미 꽃잎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헌원의 꽃잎을 매만졌다. 헌원의 살결만이 손끝에 감겨 왔다. 손톱을 세웠다. 긁어내려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꽃잎은 보이기만 할 뿐 느껴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손톱으로 긁어내린 살결은 이내 붉게 변했다. 마치 꽃잎이 붉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런 꽃잎 따위 다 필요 없어. 헌원이 안아 주지 않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옆에 있어도 이렇게 말라 죽어 가잖아.”

백아의 말에 헌원은 충격을 받았다.

백아의 각인보다 애정이 어린 손길이 중하다 생각했던 제가 정작 백아에게 손을 대지 않아 백아로 하여금 제 마음을 의심하게 했다.

제가 어리석었다. 보이는 것, 명목상의 것에 휘둘린 이는 헌원 자신이었다.

정작 백아는 그런 것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백아는 항상 헌원의 눈을 바라봐 주었는데. 그 어린 날, 헌원이 꽃잎을 보여 주며 수줍게 웃었을 때도 백아는 웃는 제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었다. 꽃잎 따위, 백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안아 줘요, 헌원.”

헌원은 바로, 정인의 명령을 받들었다.

풀어헤친 앞섶을 뜯듯이 열어 벗어 버렸다. 백아를 안아 깊게 입 맞추었다. 목을 감아 오는 백아를 달랑 들어 올려 침상에 뉘었다. 보이는 살갗에 모두 입 맞추었다. 거추장스러운 매듭 따위 풀어 버리고 고운 백아의 앞섶을 열었다.

그리고.

백아의 가슴에 자리한 꽃잎을 보았다.

꽃잎은 헌원이 남겼던 순흔과는 비교되지 않는 선명하고도 예쁜 모양으로 백아의 가슴에 자리해 있었다. 한 가지, 헌원보다 어둡고 짙은 꽃잎의 색이 백아의 마음고생을 짐작케 했다. 헌원은 정말 크게 어리석었다.

“이제, 헌원이 백아의 생명이에요. -라고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헌원. 단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데.”

멈춰 버린 헌원에게 백아가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해 왔다. 헌원의 속에서 헌원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헌원은 백아에게 깊게 몸을 묻었다. 온몸으로 제 사랑을 백아에게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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