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헌.”
“예, 폐하.”
“짐이 네게 이름자를 내릴 때 말이다.”
“예, 폐하.”
“너의 모든 걸 짐에게 바치라는 의미로 내린 것이다. 알고 있지?”
“……예, 폐하.”
“짐은 그래서 참 아쉬워. 네가 무예에 두각을 드러냈을 때 제법 뛰어난 무장이 되겠구나 하고 기대했거늘, 전장에 갈 수 없는 몸이 될 줄이야.”
무예에도 제법 재능을 보였던 헌원은 열다섯이 되던 해에 무과를 포기했다. 백아를 전장에 데려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두고 가라 하기엔 각인으로 앓아누울 헌원인지라 홍윤은 헌원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승상인 부친을 둔 데다 급제까지 한 헌원이 말단에 머물러 있는 건 이때 진노한 홍윤의 명이었다.
황제가 된 홍윤이 가장 먼저 하려 한 건 향인에 대한 인식 변화였다. 희원을 들이기 전 꽤나 고생을 한 터라 짝이라도 제대로 찾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박힌 인식은 황명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홍윤은 고심했다. 공포로 다스릴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홍윤의 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낸 차선책은 뛰어난 향인의 선례를 남기는 것이었다.
황제인 자신은 고약한 성미 덕에 이미 물 건너갔으니 대신할 영웅을 찾았다. 하나 시대가 난세는커녕 태평성대에 가까운지라, 홍윤은 이번에도 차선책인 신하로 타협을 보았다.
문 쪽은 이 승상이 제법 홍윤의 입맛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기에 홍윤은 무에 재능을 보이는 헌원에게 제법 눈독을 들였다. 국경으로 보내 몇 년 굴리면 제법 공들인 만큼은 클 인재였다. 그래서 이름까지 지어 주며 제 사람으로 두려 했거늘, 예상치 못한 변수에 홍윤은 크게 키워 보려던 무장을 잃고 말았다.
커 갈수록 단단해지는 저 넓은 어깨 하며 다부진 체격은 볼 때마다 홍윤으로 하여금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게 했다.
“그리하여 말이다, 헌.”
“예, 폐하.”
“어떠냐, 못다 한 충을 네 심장을 바친 이로 대신하는 것은?”
홍윤의 발언에 좌중이 얼어붙었다.
부담스러운 홍윤의 시선에 슬그머니 헌원에게로 고개를 돌리던 백아와 홍윤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던 헌원, 궁인이 따르는 찻잔을 들어 올리던 희원까지. 모두의 시선이 홍윤을 향했다.
허허, 불경이로고.
감히 황제의 용안을 직시하는 시선들에 홍윤은 할 생각 없는 처벌을 떠올리며 그저 웃기만 했다.
찰나의 정적 후에, 가장 먼저 평상을 되찾은 것은 희원이었다. 희원은 홍윤의 입가에 자리 잡은 볼우물을 보고 홍윤의 말이 농담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당신이랑 산 세월이 얼만데 그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홍윤에게서 시선을 거둔 희원이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추지 못한 게 아니라 감추지 않은 거다. 희원이 알아차릴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었다.
속에 이무기가 든 사람 같으니.
향이 좋은 우롱차를 음미하며 희원은 슬쩍 홍윤에게 눈을 흘겼다. 심술을 부릴 거라 예상하긴 했었지만 상상도 못 한 것을 물고 늘어진다. 백아는 심지어 태자와 붙여야 어울릴 나이였다.
주책이야, 정말.
금세 평정을 되찾은 희원과 달리 헌원과 백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홍윤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헌원이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그, 그 말씀은.”
“태자비로 탐이 난다는 말이다. 주 태수의 슬하라면 출신도 믿을 만하니 문제 될 것이 없을 테고, 음인이란 것만으로 자잘한 반대들은 해결될 테지. 아직 각인은 하지 않은 듯하니 헌 너와의 혼인 또한 별문제 되지 않을 테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홍윤의 말에 헌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재차 홍윤을 부르는 헌원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폐, 폐하.”
“대답하거라, 부르지만 말고.”
이이가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어? 어디 아들까지 팔아 농을 치시는 게야?
희원은 태자를 팔아넘기는 홍윤의 말에 어이가 없어 그쯤에서 파투를 놓으려 했다.
홍윤이야 전례가 없던 일이라 발현을 대비하지 못한 탓에 배우자를 찾는 데 황실이 발칵 뒤집혔지만 태자는 다르다. 혹여 같은 일이 일어날까 싶어 보아 둔 후보가 여럿이었다. 남의 짝을 데려올 만큼 급하지는 않다는 소리다.
향인이 세간에서 짐승 취급을 받는 것은 희락과 각인 때문이었다. 발현이나 개화는 보통 성년을 맞을 즈음에 일어나지만, 뒤늦게 발현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둘 모두가 그러하면 문제가 없겠으나 세상일이 그렇게만 돌아가진 않았다.
거기에 희락엔 정신을 놓는 경우도 허다한 터라 졸지에 살 붙이고 살던 배우자를 눈앞에서 빼앗기거나 잃은 이들에겐 향인이 짐승으로 보일 수밖에.
다만 그런 이유로 향인은 남의 배우자를 데려다 앉혀도 그러려니 보는 시선이 있었다. 헌원은 각인한 이를 데려다 앉힌 거라 다른 말이지만 그거야 아는 사람들 이야기다. 평인들은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황실의 태자가 위태하다 하면 반발조차 없을 테고.
향인의 특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을 빌미로 하여 제 입맛대로 주무르겠다는 뜻을 가득 내포한 것이 아주 홍윤다운 말이었다.
이쯤에서 말려야겠지.
희원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려 했다. 홍윤이 탁자 아래로 슬쩍 무릎을 맞대지 않았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슬쩍 눈짓하는 홍윤의 눈치를 따라 헌원과 백아에게로 시선을 옮긴 희원은 꽤 재미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헌원은 세상 다시없을 침중한 표정으로 홍윤의 말에 대한 대답을 고심하고 있었고 백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런 헌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견우와 직녀가 저러했을까? 떨어져야 하는 운명에 세상 무너지는 눈을 하고.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고심할 것도 아닐 문제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무화가 그 큰 액수를 부른 까닭이 있군그래?
홍윤의 첫 희락은 발현과 함께 찾아왔다. 이성을 잃고 광포해진 홍윤을 감당한 건 민간의 예기였던 무화였다. 급박했던 상황에 다른 음인을 찾지 못한 이유였다. 일을 치른 후 후궁으로 들이려 했으나 무화는 당돌하게도 거절했다. 대신 무화가 청한 것은 단화각의 주인 자리였다.
이후 무화는 처지가 불쌍한 향인들을 돕고 그 대금을 홍윤에게 청구했다. 그것이 계속 이어져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고 이후에 입궁한 희원은 홍윤에게 들었다.
그 무화가 헌원을 돕게 될 줄이야.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희원은 홍윤처럼 둘이 하는 양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폐하, 윤하를 귀히 보아 주신 것은 더없는 광영이오나…….”
“싫으냐?”
또, 또 저 말투.
태후께 그리 혼이 나면서도 버리지 않은 홍윤의 고집이다. 예법은 무시한 채 직설적으로 뱉어 대는 내용에 태후께서 몇 번이나 앓아누우셨는지. 하긴, 지금까지와 별다르지 않은 말투이긴 하다만은.
희원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홍윤의 핀잔에 꿇어 엎드린 헌원을 살폈다. 황제께서 말을 툭툭 던져 댄다고 마주 던져 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진땀을 흘리며 답할 말을 고심하는 헌원이 희원의 눈엔 한없이 귀여웠다.
저 없는 새에 다 자란 줄 알았더니 아직은 한참 어렸다. 그런 주제에 제 사람 지키겠다고 낑낑대고 있으니 그 모습이 아니 귀여울 수 있나. 그래도 기억하는 모습보단 꽤 의젓해져 희원은 내심 흐뭇했다.
“폐하, 소신은…….”
“싫으냐고 물었다. 헌 너는 내게 이미 한 번 불충을 저질렀어. 짐이 또 한 번의 불충을 받아 주어야 한단 말이냐?”
홍윤의 말에 헌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과를 포기하던 날에 홍윤은 헌원에게 두 번의 불충은 허하지 않겠다는 말로 헌원을 용서했다. 그런 홍윤에게 헌원은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하며 충절의 맹세를 했었다.
당연했다. 백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었다. 해서 당연히 헌원이 생각한 모든 것에 백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홍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홍윤의 말이 헌원에겐 청천벽력이고 또 진퇴양난이었다. 백아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불충을 저지르겠다 할 수도 없었기에 헌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헌원의 대답은 한참이나 이어지지 않았다. 벼락같이 홍윤의 노성이 터졌다.
“말해 보라. 짐이 하문하고 있지 않느냐? 헌 네가 지금 짐을 능멸하려 하는 것이냐?”
“아니옵나이다, 폐하. 다만, 다만 소신은…….”
“헌원은.”
둘의 대치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헌원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에 함께 일어섰던 백아는 엎드린 헌원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새 우는지 턱에서 제법 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헌원은 나보다 죽음을 선택할 건가요? 아니면 헌원에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인가요?”
헌원은 백아를 보지 못하면 죽는다 했다. 시름시름 앓다 죽게 될 거라고. 백아가 다른 이와 혼인을 하면 헌원은 백아를 보지 못할 것이 뻔한데 어째서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 걸까? 백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면 혹시.
백아는 눈물을 떨어 내려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은 눈을 깜빡여도 금세 차올라 여전히 헌원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헌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헌원이 준 책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다.
각인은 상대가 죽거나, 죽었다고 여기게 되면 풀린다고. 혹시 헌원이 저에게 정이 떨어져 각인이 풀린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노골적으로 안아 달라 졸라도 저를 피하는 헌원을 보며 백아는 마음 한구석에 스미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헌원이 타이를 때마다 그 책에 쓰여 있던 문구가 자꾸만 떠올랐다.
이제 나는 헌원 없이 살 수 없는데, 헌원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다면 어찌해야 하지? 어찌 살아야 하지? 내 집은 이 승상 댁이고 내 자리는 헌원의 옆인데. 거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면 정말 어찌해야 하지?
상상만으로도 너무 두려워서 백아는 헌원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헌원에게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마냥 헌원을 기다렸는데. 그런데 이미 늦은 것이었다면. 백아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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