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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41화 (41/66)

41화.

손끝을 대는 것도 죄스러워 헌원은 백아가 기대 올 때에만 백아와 닿았다. 서운한 듯한 백아는 침상에서도 헌원의 팔을 베개 삼지 않았다. 아쉬웠으나 이해했다. 저 아쉬운 것보다 백아가 서운한 것이 미안했다.

별채 담장에 투조로 장식한 모란문 창살 사이로 단이가 보였다. 침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백아는 안에 있는 듯했다. 백아는 별채 안에서도 마중하지 않을 모양인가. 헌원은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 그조차도 제겐 사치이리라. 그러나 나오는 한숨만은 삼킬 수 없었다.

별채에 들기 전 깊은 숨을 내쉰 헌원이 문을 열자 무언가가 헌원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백아?”

헌원은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의 품에 뛰어드는 백아를 받아 들었다. 빗자루를 든 단이가 헌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청소 중이라 주변을 어슬렁거린 거였나. 헌원은 마중을 나오지 않는 백아를 서운해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최근 계속된 자신의 거절에 마음이 상한 줄 알았다. 지난밤엔 울기까지 하여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백아가 노골적으로 교합을 원해 와도 피하던 자신인지라, 혹시나 백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 사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키기 힘든 각오 따위 하지 않을 것을.

문득 떠오른 이기적인 생각에 헌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필요한 과정이다. 더는 백아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남겨 둘 순 없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백아 스스로 위험을 알고 피해 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지난번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겠지. 백아가 보채어 자신도 초조해진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 배움이 익숙한 자신이 아니라 백아에게 보폭을 맞춰야 했다. 쉬는 날도 필요하겠지.

“오늘은 충분히 하신 듯하니 이만 쉴까요?”

헌원의 물음에 백아가 반색했다. 품에 고개를 묻은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빠르게 끄덕이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백아가 헌원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탓에 헌원은 어설프게 안은 채로 백아를 들어 뒤뚱뒤뚱 침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화한 백아는 헌원의 향을 맡는 버릇이 생겼다. 제 것이 분명한 헌원의 매듭을 풀어 앞섶을 열고 거기에 코를 박고 가만히 숨을 쉬었다. 각오를 다진 헌원에겐 고역이었으나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못하여 매번 열심히 인내하여야 했다.

헌원의 다짐을 이해해 주었는지 백아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든 백아에게 입을 맞추고 침상에 뉘인 헌원은 백아가 공부하던 흔적을 살폈다.

탁자 위엔 백아가 보던 서책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저자에서 빌린 책이 가장 위에 놓여 있어 눈에 띄었다. 요 며칠 안내서들을 꼬박꼬박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준 서책들은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비단으로 표지를 감싼 책을 펼쳐서 훑어보니 황궁을 배경으로 한 연애담이었다. 헌원은 엷게 웃었다. 어찌 골라 오는 것마다 이리 백아다운지.

헌원은 고개를 돌려 잠든 백아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커지면 백아는 앞뒤 가리지 않고 황궁으로 향할 것이다. 문지기와 대거리를 하다 쫓겨날 수도, 혹은 조금 영악해졌다면 지위를 이용해 황궁 안으로 발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헌원이 같이 가 주는 것이 나으리란 생각을 했다. 제 정인은 상상하지 못했던 사고를 종종 치곤 하니까.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을 터다.

조만간에, 그리고 오랜만에 누님을 찾아뵈어야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날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거로구나?”

정곡을 찌르는 희원의 말에 헌원은 할 말이 없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입에 발린 소리는 해 보나 마나였다.

어릴 때부터 헌원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던 희원은 헌원의 속내를 모두 간파하고 코웃음을 치실 게 뻔했다. 그리고 형제간에 그런 입바른 소리는 필요 없다며 성질을 부리시겠지. 그러느니 솔직히 고하는 것이 낫다. 어릴 적의 경험에서 체득한 헌원의 판단이었다.

“뭐, 하긴, 네가 나를 백아보다 우선한 적이 있었어야지.”

“누님.”

희원은 난감해하는 헌원에게서 시선을 돌려 황궁 구경이 한창인 백아를 보았다.

올해 몇이더라, 희원은 백아의 나이를 가늠했다. 헌원과 저부터가 나이 차가 꽤 큰 데다 백아와 헌원 또한 나이 차가 있어 백아는 희원의 조카, 혹은 이른 자식뻘이었다.

백아는 희원이 성혼을 올리고 이가를 떠난 후에 이가의 사람이 되었다. 그 탓에 희원이 백아를 보았던 기간은 다 합해도 채 열흘이 못 되었다. 황후의 몸으로 사가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그저 잠깐씩 보며 얼굴을 익히는 것이 다였던 탓이었다.

그리고 헌원이 오죽 싸고돌았어야 말이지. 희원은 옛 생각에 열이 올랐다. 희원이 갑자기 씩씩대자 헌원이 희원의 눈치를 살폈다.

치성을 드리러 가는 차에 사가에 들렀던 희원은 어린 백아를 안아 보려다 떨어뜨렸다. 정확히는 헌원이 받아 내어 떨어트릴 뻔했다. 그 이후 헌원에게 백아 금지령을 당했다. 백아의 곁에 다가서기만 해도 헌원이 눈을 부라려 제대로 말을 섞어 보지도 못했더랬다.

“아직도 그 일을 담아 두고 계십니까.”

희원이 갑자기 열을 내는 이유를 눈치챈 헌원이 투덜대었다. 황후씩이나 되신 분이 속도 좁으시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다 보였다.

“태후께도 듣지 않은 꾸중을 너에게 들었잖니.”

희원이 눈을 흘기자 헌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럼. 네 죄를 알아야지. 희원은 그 때문에 백아와 친해지지 못했던 것이 꽤 아쉬웠다.

금일도 그래, 말을 건네는 저를 백아가 어찌나 낯설어하는지. 헌원만 아니었다면 꽤 즐거운 말동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언중언의 대화를 해야 하는 황궁 사람들과의 대화는 피곤했다. 해서 희원은 저렇게 솔직하게 속이 드러나는 인물들과의 대화가 많이 그리웠다.

눈치 볼 필요 없는 인물들이니 편하기도 하고. 기회가 많지 않아 자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니 헌원 저놈은 좀 더 마음고생을 해도 싸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익숙한 내관의 외침에 정원을 둘러보던 백아가 쪼르르 달려와 헌원의 옆에 섰다. 그래도 헌원이 백아를 아예 눈치 없이 키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백아는 폐하의 등장에 제법 그럴싸하게 다른 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인사를 했다.

지난번에 다녀가신 어머니께서 하도 걱정을 하시기에 마냥 백치인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하긴, 하는 행동이 어릴 뿐이다. 다 헌원 탓이겠지. 희원은 제법 훤칠해진 헌원에게 눈을 흘긴 후 활달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황제 홍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그래요, 황후. 사석에서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헌. 그래, 황궁 구경이 목적이라고.”

홍윤의 물음에 헌원이 읍을 했다. 홍윤까지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모습이었다. 형제의 당황한 모습에 희원은 걱정하기는커녕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헌원은 모를 것이다. 무화에게 하루 치 매상을 명목으로 큰돈을 뜯긴 홍윤이 헌원과 백아를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지. 그런데 먼저 알현을 청해 왔으니 나타나지 않을 리 있나.

헌원이 제 알현 소식을 들은 홍윤의 얼굴을 보았어야 했다. 얼마나 흥미로워하며 눈을 빛냈는지 알면 나타날 생각 따위 하지 못했을 터다. 희원은 일부러 헌원에게 알리지 않았다.

곤란해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야 있었지만 그보다는 제법 자랐을 얼굴들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홍윤이 부려 댈 심술은 희원이 적당히 쳐 낼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제의 방문이 반가운 희원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희원에게 흘끔 시선을 준 홍윤은 헌원의 곁에 선 백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헌원보단 태자가 어울릴 법한 나이로 보이는 앳된 음인이었다. 백아라 했던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 대신 희원이 가끔 언급하던 아명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흰 피부가 아명이 어울리는 모습이라 한눈에 떠오르기도 했고.

“그래, 그대는…….”

“주가의 윤하라 하옵니다.”

백아는 헌원에게 단단히 당부 들은 대로 황제께 자신의 이름을 아뢰었다.

“그래, 앉지.”

자리에 앉은 홍윤은 백아를 살폈다. 사적으로 이가에 들렀을 때에 헌원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본 것도 같다. 그 아이가 벌써 저리 컸나.

음인으로서의 성숙이 제법 진행되었는지 은은히 풍기는 향이 아주 달았다. 그 난리를 피웠을 법도 하군.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몸에서 나는 향이 흥미로워 홍윤은 꽤 오랜 시간 백아를 시선으로 훑었다.

저 몸이 완전히 농익으면 희원보다도 더 진향 향을 낼 것도 같았다. 하나 신뢰하는 신하이자 처남 되는 사람의 내자이니 불온한 상상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홍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주가라. 이 승상의 친우가 주가라 들었는데.”

“주 자사의 삼남이옵니다.”

홍윤의 시선이 백아에게 오래 머무를수록 헌원의 행동이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양인으로서의 본능이 발휘된 모양이었다.

먼저 눈치챈 희원의 낮은 웃음소리에 홍윤의 시선이 헌원을 향했다. 홍윤은 당초에 헌원을 만나려 정무 시간에 황후전에 들른 이유를 떠올렸다.

얼마나 대단했기에 무화가 그리 큰 금액을 청구했나 궁금했을 뿐인데 헌원이 저리 나오면 성질이 돋지, 암. 심술을 좀 부려도 괜찮을 터다. 황제 체면에 돈 내놓으라 하긴 우스우니 손해 본 만큼의 재미나 얻어야겠다.

홍윤은 입가에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띠우며 백아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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