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6
백아는 덩치가 제법 커진 랑이를 쓰다듬었다. 랑이는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제 전용의 장난감을 코로 밀었다. 장난감은 백아의 발치까지 밀려왔다.
백아는 장난감을 주워 멀리 던졌다. 지나치게 힘을 주었는지 장난감은 별채의 담을 넘어 사라졌다.
왕! 왕!
신이 난 랑이가 장난감을 쫓았다. 높은 담장은 넘지 못해 빙 돌아 중문으로 사라지는 랑이를 보며 백아는 세상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날부터다.
그날부터 헌원은 백아와 ‘좋은 것’을 하려 들지 않았다. 개화한 후 백아의 머릿속은 헌원과의 ‘좋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헌원은 전혀 생각이 없는지 백아가 요리조리 비벼 보아도 살갑게 도닥이기만 할 뿐 그 이상은 하려 들지 않았다.
입술을 비비는 것도 그래, 헌원이 먼저 해 주었었는데, 이제는 백아가 먼저 이끌지 않으면 입맞춤조차도 해 주지 않았다. 참기가 힘들단다. 백아를 보는 헌원의 눈빛이나 표정은 그대로인데 헌원은 이상하게 백아를 피했다.
왜 참지? 그냥 하면 될 텐데.
백아는 헌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헌원이 저를 싫어하게 된 줄 알았다.
“아야…….”
아, 또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께가 아파져 온다.
백아는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헌원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자라난 꽃잎이 거기 있었다. 헌원이 입술을 내리찍은 자리에 피어난 꽃잎은 희락이 지난 후에 목욕하다 발견했다. 백아는 제 몸의 이상이 의아했다.
“이게 뭐지……?”
헌원이 물었던 자국은 지난번에 다 사라졌는데.
순간 백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날 헌원이 제게 했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각인한 사람이 생겼을 때에 자리한다던 꽃잎. 각인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백아의 세상엔 오직 헌원만이 존재했으므로.
기쁨에 벅차 환호성을 내려던 백아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은 백아 혼자만 알고 있다. 누군가 알게 된다면 그 첫 번째는 헌원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단이는 몰라야 한다. 목욕 시중을 드는 단이를 며칠째 물리쳤다. 그러나 백아는 아직도 헌원에게 말하지 못했다.
다시 가슴이 찌릿했다. 이번엔 주먹을 말아 가슴을 콩콩 쳤다. 헌원이 알면 좋아할 텐데. 하지만 말로 하긴 왜인지 쑥스럽고 싫었다.
백아는 상상했다. 백아의 옷을 벗기다 꽃잎을 발견한 헌원이 놀란 눈을 할 때, 이제는 헌원이 백아의 생명입니다 하며 헌원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 싶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쁨의 눈물을 흘릴까? 폭풍처럼 자신을 안아 줄까? 행복한 상상이 백아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에휴우우…….”
하지만 현실은, 백아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사이 랑이가 돌아왔다. 담장 너머로 사라진 장난감을 잘도 찾아온 랑이는 장난감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던져 주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백아에겐 랑이가 저를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에게 그런 시선 받고 싶지 않아.
백아는 장난감을 들어 이번엔 반대편으로 힘껏 던져 버렸다. 랑이는 여전히 신이 나서 달려갔다.
어제저녁도 마찬가지였다.
깔고 앉은 엉덩이에 바짝 선 양물이 느껴지는데도 헌원은 백아를 안아 주지 않았다. 헌원은 뜨거운 한숨을 토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백아는 눈에 눈물을 달았다.
“내가 싫어졌어요?”
울먹이는 백아의 물음에 헌원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래.”
“다만…… 다만 기다리는 겁니다, 백아.”
“언제까지?”
뾰족한 물음에 헌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백아가 모든 것을 알고 백아의 판단과 의지로 저를 받아들일 때까지. 그때까지 참을 겁니다, 백아.”
헌원은 손을 들어 백아의 눈물을 닦아 냈다.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헌원은 결국 침소를 나서지 않았다. 백아를 안은 헌원은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백아를 도닥여 주었다. 행동은 여전히 백아가 아는 헌원인데. 헌원의 품에 이마를 묻은 백아에게 헌원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게 벌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무슨 벌?”
“공부하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백아.”
그 말에 백아는 더는 헌원을 조를 수 없었다.
헌원의 말은 옳다. 언제나 그랬다. 헌원의 말을 듣지 않고 뛰쳐나갔던 백아는 가장 무서운 일을 겪었다. 두 번은 싫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번처럼 무사히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날 이후 헌원이 선물해 준 책으로 공부를 시작한 백아는 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헌원이 무척 슬퍼할 거다. 헌원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백아도 헌원이 없으면 살 수 없다. 헌원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새까맣게 변한 꽃잎과 함께 죽어 가겠지. 그러니 헌원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공부는 재미없어요, 헌원.”
헌원에겐 하지 못하는 말이라 백아는 혼자 있을 때에만 작게 투덜댔다.
글을 읽는 것은 제법 익숙해졌으나 그 내용은 하나도 머리에 남지 않았다. 양인이니 음인이니 하는 것들도 더 가져다준 책들을 나름은 열심히 읽었지만 소용없었다. 헌원이 한 말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차라리 헌원이 몸으로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런다면 백아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자신이 있었다.
헌원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헌원의 꽃잎을 만지던 촉감이 손끝에 살아났다. 백아보다 훨씬 단단하고 탄력 있는 살갗이었다.
꽃잎 위에 손을 올렸을 때 헌원의 숨이 들락이며 가슴이 오르내렸다. 거칠게 뛰던 헌원의 심장 박동이 백아의 손끝에 머물렀다. 그때의 헌원이 떠올라 백아는 귀 끝까지 발갛게 물들였다.
그새 랑이가 장난감을 물고 돌아왔다. 붉어진 얼굴을 랑이에게 보이는 것도 창피했다. 백아는 얼른 랑이가 내려놓은 장난감을 집어 또다시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하니 랑이 너는 혼자 놀아.
침소로 돌아온 백아는 서책이 쌓여 있는 탁자를 훑어보았다. 단이가 정리하다 말았는지 책들이 얼기설기 쌓여 있었다. 제일 위에 빌려 온 책이 보였다.
저자에서 빌려 온 책도 이제는 흥미가 없다. 헌원을 기다리며 책을 폈던 백아는 책의 책장을 대충 넘기다 덮어 버렸다. 이제는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백아는 소설 속에 나오는 동화 같은 상황보다 더 설레는 일을 직접 겪었다. 누구도 백아를 해할 수 없게 하겠다던 헌원의 말이 방금 들은 이야기인 양 귓가에 울렸다. 그 말을 하며 자신을 안아 오던 헌원의 팔과 눈물을 닦아 내던 손, 자신을 바라보던 헌원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는 사람 없는데도 괜스레 열이 올라 손부채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오셨습니까?”
승상가의 정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 둘이 헌원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헌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흘깃 정문 안을 살폈다. 오늘도 역시 백아는 마중 오지 않았다. 헌원은 주제넘게 실망감이 드는 가슴을 눌렀다.
지난밤 울먹이는 백아의 질문에 헌원은 벌을 받고 있다 말했다. 말 그대로 헌원은 죄가 너무 많았다.
어린 백아를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하게 했고 어린 백아가 내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하여 백아는 제 나이에 맞는 수학을 하지 못했다. 헌원이 제대로 돌보았다면 조금은 늦될지언정 모자라다 소리는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헌원은 그 점을 저 좋을 대로 이용했다. 그래, 이용이었다. 학문을 하며 정신을 수양한다는 자가 몸이 컸다는 이유로 백아를 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안이하게 눈감고 회피하며 합리화를 했다. 날아오는 검은 눈을 감는 것으로는 피할 수 없다.
헌원은 문인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그리고 정인으로서도 모두 실격이었다.
무릎 꿇고 비는 것만이 벌을 청하는 것은 아니다. 헌원은 백아를 참음으로써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용서는 피해자의 이해에 달려 있다. 헌원이 제게 한 짓을 모르는 백아가 하는 용서는 다른 헌원의 죄일 뿐이었다.
백아에게 용서를 받으려면 백아가 우선 알아야 했다. 헌원은 그때까지 투옥 중이었다.
각오를 다진 헌원에게 백아는 달콤한 감로이자 쓰디쓴 약이었다. 백아가 도달할 곳이 자신이라 생각하면 고달픈 인내도 달았으나, 도달하며 알게 된 것들로 제게 실망할 모습은 금부에 끌려가 추국을 당하는 것보다 두려웠다.
하여 백아의 희락 이후 헌원은 백아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가끔 마주하게 되는 낯은 오로지 백아가 헌원을 보채서였다. 최근의 헌원이 기억하는 백아는 서책을 읽는 옆모습이나 뒷모습, 혹은 잠든 얼굴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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