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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37화 (37/66)

37화.

“이 관원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만두라 하지 않았니. 초야를 치르고 나면 그는 이제 너를 아껴 주지 않을 거란다. 다른 이에게 몸을 보이고 범해진 이를 어느 사내가 아껴 준다던.”

한 번, 단 한 번 헌원이 냉정했던 적이 있다.

백아가 헌원을 모른 체했을 때 헌원은 백아 아닌 이에겐 좋은 것을 해 주지 않겠다며 냉정하게 굴었었다. 그때의 서러움이 생각났다.

헌원은 이제 전처럼 백아를 대하지 않을 것이다. 따뜻하게 백아를 안아 주지 않을 것이다. 백아에게 다정한 눈빛과 따스한 미소를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눈물이 절로 샘솟았다.

“나는, 헌원에게만, 몸을 보이는 것도, ‘좋은 것’도 헌원하고만…….”

어머나?

백아의 말에 무화가 눈을 크게 떴다.

백아의 하얀 얼굴 위로 방울져 흐르는 눈물보다 백아가 하는 말의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저도 모르게 섭선을 펼쳐 입가를 가렸다. 표정을 감추려 할 때 나오는 오랜 버릇이었다.

애지중지 아끼기만 한 줄 알았더니 할 것은 다 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셨단 말이지.

집에 저런 꿀단지를 숨겨 놓고 있었으니 남의 손을 타 시들어 버린 꽃들이 성에 찰 리가 있나. 무화는 정염이라고는 깃들지 않을 것 같던 헌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 바람인 백아를 보았다.

이이와 그이가 할 것은 다 했단 말이지?

무화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스몄다. 입꼬리가 올라가 뺨이 당기는 것을 느낀 무화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직은 몰아붙여야 할 때다. 섭선을 내린 무화의 표정은 조금 전처럼 딱딱했다.

“셋째, 어떠한 경우에라도 손님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아니 된단다. 어디 보자…… 다행히 소제는 잘 되어 있구나. 조금 길러야 할 듯도 하지만.”

어릴 적에, 진원과 싸우다 말리려 다가온 헌원의 볼에 생채기를 낸 적이 있었다. 손톱이 스친 상처에 빨갛게 피가 맺히는데도 헌원은 제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가 다친 곳이 없나 먼저 살폈었다.

백아는 헌원의 피를 보고 놀라 울었다. 진원에게 맞은 곳이 아파 그러는 줄 오해한 헌원이 애꿎은 진원만 잔뜩 혼을 내었다.

이후로 백아의 손톱은 길었던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길라치면 백아 스스로 물어뜯어서라도 짧게 만들었다. 또 제가 헌원의 얼굴에 생채기를 낼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헌원이 백아를 아낀 만큼 백아에게도 헌원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의 말을 왜 내가 듣지 않았을까. 흘러넘친 눈물이 새 길을 텄다.

“당장 그 손을 떼시오!”

무화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모두에게 반가운 호통이 들려왔다.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무화는 입구에 들어서는 체격 좋은 이에게 눈을 흘겼다.

이제야 오시나 저이는.

무화의 귀에 시립해 있던 기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렸다. 무화는 섭선을 펼쳐 입술을 가리고 슬쩍 미소 지었다.

자, 모두가 기다린 분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꼬?

헌원은 다리가 긴 만큼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백아에게 당도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헌원은 무서운 기세로 백아를 붙든 손들을 쳐 내었다. 그 와중에도 백아가 다칠까 기생들의 손만 거친 기세로 물리치는 것이 보여 무화는 속으로만 웃었다.

헌원은 백아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렸다. 이어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보며 가만히 선 백아를 조심스레 살폈다.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칼은 조금 흐트러졌지만 누군가에게 잡힌 것 같진 않았다. 붙들려 있던 팔에 옅게 손자국이 남았지만 멍도 되지 못하고 사라질 자국이었다.

무엇보다 옷이 헌원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림 그대로였다. 눈물 자국이 보이고 흙먼지가 묻었지만 매듭 하나 풀어진 데 없이 단이가 단장시켜 준 그대로였다.

백아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 헌원이 상상했던 모든 나쁜 일은 헌원의 기우에 그쳤다.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었다. 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백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아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헌원……?”

백아의 부름에 헌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헌원은 멍하니 제 얼굴을 바라보는 백아를 끌어안았다.

“무탈하여 다행입니다. 백아. 참으로 다행이에요. 백아를 잃는 줄 알았습니다. 백아가 저를 떠난 줄 알았어요. 백아가 저를…….”

백아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두서없이 지껄였다. 체면 따위 체통 따위 지킬 여유 없었다. 백아가 무탈한 것이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여 다른 생각 따위 헌원의 머릿속을 침범하지 못했다.

말하는 동안 갈무리하지 않은 백아의 향이 헌원의 폐부에 스며들었다. 헌원은 백아의 옷깃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헌원이 숨을 내쉴 때 백아가 다시 헌원을 불렀다.

“헌원?”

“예, 백아.”

“헌원은 저를 버리지 않나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백아. 백아가 저를 버리지 않는 한 이 헌원은 백아를 버리지 않아요. 아니 설령 백아가 저를 버린대도 저는 백아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요. 백아.”

헌원의 대답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어졌다. 백아를 안심하게 해 주던 다정하고도 단호한 말투였다.

그러나 백아는 아직 두려웠다. 무화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고개를 드는 헌원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백아는 바닥을 보며 물었다.

“제가 더러워졌대도?”

“백아는 어떤 모습이라도 더럽지 않아요.”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요, 정말 만약에…….”

“그랬다면 그조차도 제 탓이에요, 백아.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 왔듯 제가 백아를 책임질 겁니다. 혹여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하세요. 제게 백아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백아. 제게 백아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아가 없다면 이 헌원 숨조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워요. 백아, 아시겠습니까?”

다정스레 눈을 맞추며 하는 헌원의 말에 백아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흘러내린 눈물이 백아의 턱을 타고 내려와 헌원의 뺨에 안착했다. 헌원이 손을 들어 백아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러니 백아, 이제 안심하세요. 이 헌원이 온 이상 누구도 백아를 해하지도 더럽히지도 못할 터이니. 백아는 그저 제게 웃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헌원의 말에 백아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제가 헌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으므로. 백아는 있는 힘을 다해 헌원에게 웃어 주었다. 헌원의 곁이니 이제 안심할 수 있다. 헌원이 저를 지켜 줄 것이다.

백아의 미소에 화답하듯 떠오르는 헌원의 미소를 보며 백아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착각이었을까? 가슴께가 찌릿하니 아픈 것도 같았으나 정신을 잃은 백아는 인지하지 못했다.

쓰러지는 백아를 안아 든 헌원은 무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늘게 접혀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나 할 인사는 해야 할 터다.

들어오는 길 헌원은 자신 외에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한참 전에 손님을 맞이하여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어야 할 시간에 출입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받지 않은 이유는 하나일 터다. 백아를 보호하기 위함이겠지.

헌원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승상가의 작은 안주인이 홀로 기루에 와 호색한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백아의 평판은 바닥을 칠 터였다. 온갖 뒷말이 오가고 손가락질이 승상가를 향할 테지.

적지 않을 하루 매상을 포기하고 그것을 막아 준 것이 저이인 것이다.

“……이 빚은.”

“대금만 치르시면 됩니다, 대인. 손해 본 것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무화는 그리 말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이었다. 재미있는 연극도 하였고 감동적인 구경도 하였다. 오늘 하루 쉴 수도 있을 테니 정말로 손해 본 것은 돈뿐이었다.

“승상가로 보내시오.”

“하나 그도.”

말을 맺기도 전에 입을 여는 무화를 헌원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신 지급할 분이 계신답니다. 단화각엔 이럴 때를 대비한 큰손이 계셔요.”

“그게 무슨…….”

“그러니 대인께선 정인만 보시어요.”

종잡을 수 없는 말에 헌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굳은 표정으로 무화를 보았으나 무화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분께 감사를…….”

“원치 않으세요. 사정이야 짐작하시는 대로 뻔하답니다.”

웃기만 하는 얼굴은 대답할 기색이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도움이 께름칙하긴 하였으나 백아가 우선이었다. 정신을 잃은 백아를 더 놓아둘 수 없었던 헌원은 백아를 안아 들고 몸을 돌렸다.

“정문으로 가시어요. 금일은 귀한 댁 자제께서 각별한 구경을 하시려 각을 통째로 빌렸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나서시어요.”

주의를 주는 무화의 말에 헌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총명한 이이니 알아들었을 터다. 오늘의 일은 이 관원이 그리 귀애하시는 정인께 기루 구경 한번 시켜 주려 큰돈을 쓰신 거로 기억될 터다.

무화는 슬쩍, 배를 문질렀다. 어째 복통이 솟는 건지. 부러워 그러나?

미련 없이 각을 나서는 태도에 심술이 돋아 이중 청구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큰손에게 청구하면 두 배 이상 받아 낼 수 있을 테니 저이들은 제 복에 취해 있도록 해 주어야지.

그냥 곱게 보호하다 보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일을 벌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화는 손님으로 몇 번 본 것이 다인 헌원에게 호감이 많았다.

정확히는 헌원의 그 태도에 호감이 많았다. 다른 기루는 그렇다 치고 음인의 색향이 가득한 이 단화각에서 평인도 아닌 양인이 주변 한번 돌아보지 않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혈기 왕성한 때였다지만 폐하도 무너뜨린 단화각이 아니던가.

먼 꿈을 꾸는 헌원의 정인이 제 곁에 저를 지키고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알길 바랐다. 더불어 제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또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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