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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36화 (36/66)

36화.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에 생각보다 큰 혐오를 한다.

음인이나 양인은 범인에 비해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타고남에도 교합 시에 나타나는 짐승과도 같은 특징 탓에 오랜 세월 동안 언급조차도 꺼려져 왔다.

금기에 가까웠던 향인이 그나마 경원시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금상이신 폐하께서 양인으로 발현한 이후부터였다.

황가의 유일한 적통인 황제께서 양인으로 발현하자 그간 향인을 짐승처럼 취급하던 이들은 모조리 몸을 사렸다. 남의 목숨은 짐승처럼 여겨도 제 목숨은 아까웠던 까닭이리라.

애초에 흰 눈을 뜨고 보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반성보다는 남 탓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문에 향인이란 이유로 두각을 드러내어 권세를 얻은 이 승상을 자신의 것을 빼앗은 사람으로 여겨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대를 잘 타고나 권세를 얻은 가문. 그것이 사람들이 헌원의 가문을 보는 시선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양인의 부풀어 오르는 양물을 감당할 여인이 없어 당시 태자이던 폐하의 후사마저 위태롭던 때였다. 나라의 후대를 걱정하던 와중에 적당한 가문의 적령기의 음인이었던 헌원의 누님은 황가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간택부터 책봉까지 걸린 시일은 고작 사흘이었다. 헌원의 큰누이 희원은 회임마저도 무탈했다. 이후로도 무탈하게 황태손까지 생산한 누님은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러한 누님의 뒷배가 없었다면 헌원의 가문 또한 지금의 권세는 꿈도 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향인이라 손가락질받는 한미한 가문에 머물러 있었을 테지.

하나 갑작스레 얻은 권력은 시기를 부르기 마련이고 그 시기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이 승상 대신 급제를 하였음에도 말단직을 얻은 헌원을 향했다.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군말 없이 불려 다니는 동안 헌원은 수많은 모욕을 참아 넘겨야 했다.

수많은 기루 중에 굳이 단화각을 골라 흥을 돋운다며 억지로 기생을 자리에 앉혔다. 음인 기생을 옆에 끼고 희롱하며 하는 말이 누구를 빗대는지조차 뻔했으나 노련한 이들은 틈을 주지 않았다.

간혹 선을 넘는 일이 있어도 주사가 심하였다며 사과를 해 오면 이 승상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는 헌원은 그저 웃어넘겨야 했다.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대거리도 할 수 없었다.

“이랴!”

이기심이다. 제 이기심이다.

백아는 그런 것 모르기를 바랐다. 백아는 세상 더러운 것 모르고 그저 제 품 안에서만 행복해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백아의 세상은 온전히 저였으면 했다. 제가 보여 주는 세상 안에서 좋은 것 예쁜 것만 보며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있어 주었으면 했다. 마냥 천진하기만 한 백아를 보며 부친이나 모친께서 걱정하셔도 책임질 사람은 저이니 맡겨 주시라 했었다.

책을 읽어 주는 것도, 하려면 진즉 해 줄 수 있었던 일이다.

하나 백아가 세상을 아는 것이 싫었다. 세상을 알아 더러운 것에 실망하고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상처받고 성숙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혹여 그 속에서 저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내어 제 품을 떠나갈까 두려웠다. 제게 실망할까 두려웠다. 세상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백아를 위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시기를 늦추고자 했다.

그래서 백아는 뒤늦게 접한 세상에 늦된 사춘기를 앓고 있는 것이다. 관성이 되어 버린 제 회피가 이런 사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체통을 중시한다는 고관들이 취기를 핑계로 갖은 모욕을 던져 대었다.

기생들을 지분대며 사내 음인의 맛이 어떠하냐고 저들끼리 농을 던져 댈 때마다 헌원은 분노를 삼키려 술을 털어 넣었었다. 취기를 핑계로 자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이들이 드나드는 곳에 백아가 있단다. 색사를 즐기러 창관에 온 이들이 백아에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던져 댈지 불을 보듯 뻔하여 눈앞이 아찔했다.

백아는 슬슬 피어오르는 향을 감출 줄도 몰랐다. 그 향기로운 향을 맡고도 백아를 가만둘 리 없었다. 창관을 드나드는 더러운 호색한들이 그 꽃 같은 향을 맡지 못할 리 없다. 백아의 풋풋한 향이 그들을 더 흥분하게 할 것이다.

삼족을 멸할 것이다. 아니, 구족을 멸할 것이다.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아버님과 누님의 권세를 빌려서라도 그리할 것이다. 그 더러운 것들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조차도 모조리 없애 버릴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

헌원은 자꾸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는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 애썼다.

백아가 먼저다. 백아에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사람을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잘 보호받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저를 향하던 밝은 얼굴 그대로 저를 반기며 왜 이리 늦었냐며 투정을 부릴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럴 것이다.

헌원은 백아가 무탈하기만을 바라며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초야라지만 준비는 시켜야 하는 것 아냐?”

“아서라, 저런 모습이 사내를 더 불끈거리게 하는 거란다. 뭘 모르는 소리를 하고 그래.”

“못 견딜까 봐 그러지.”

“누구는 쉬워서 견딘다던? 다 복을 차고 뛰쳐나온 제 잘못이지.”

갇힌 방문 너머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안에 갇힌 사람을 신경 쓰는 듯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으나 사위가 조용해 잘 들렸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던 백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문 사이로 스미는 불빛에 의지해 도망갈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어슴푸레하게 주변이 보였다. 입구 외엔 작은 창 하나도 없는 골방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헌원은 기루가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다. 헌원이 옳았다. 기루는 무섭고 나쁜 곳이었다. 기생도, 예쁘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깜깜하고 막막한데 떠오르는 건 헌원의 얼굴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헌원을 볼 수 없다. 무화가 이야기할 때 백아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무화의 말이 모두 맞았다.

백아는 헌원처럼 백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백아도 헌원의 말에 귀 기울였어야 했는데. 헌원의 말을 들을걸. 그럼 이렇게 무섭지 않았을 텐데.

“저기, 열어 주세요. 나는, 나는 헌원에게 가야 해요.”

사과를 하고 싶었다. 무화의 말처럼 받아 주지 않더라도, 마지막으로라도 한 번 더 헌원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자 대화 소리도 끊겼다.

적막과 어둠만이 백아의 주위에 가득했다. 이럴 때의 헌원은 백아가 무섭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저를 감싸 주는 헌원이 없는 어둠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 줄 백아는 몰랐었다.

나서지 말걸, 후회가 되었다. 헌원이 보고 싶었다.

“이제 좀 네 처지가 실감이 되었니?”

잠시 후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무화가 제법 얌전해진 백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백아는 문이 열리자마자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어딜.”

“이거 놔요!”

무화는 도망치려던 백아를 솜씨 좋게 잡아 내었다. 무화는 반항하는 백아를 따르는 음인들에게 넘겨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했다.

고개를 든 백아에게 무화는 얄미운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겁을 주었다.

“준비는 시키지 않겠지만, 주의는 주어야겠지. 너 때문에 이 단화각의 위신이 떨어지면 아니 되니 말이다. 초야를 치를 때에 조심해야 할 점이니 잘 들으렴. 거기, 너무 세게 잡지는 말거라. 손자국이 남으면 몸값이 떨어지잖니.”

무화의 말에 백아를 결박한 힘이 조금은 느슨해졌으나 백아의 힘으로 빠져나가기엔 여전히 강한 힘이었다. 무화는 섭선을 툭툭 쳐 빠져나가려 손을 비트는 백아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첫째, 어느 정도의 앙탈은 허하지만, 전력으로 도망은 아니 된단다. 기대는 접으렴. 가장 깊은 방에서 손님을 받을 테니 도망 나온다 해도 곧 잡힐 거야. 손님이 화가 나면 너에게도 좋지 않아.”

서로 힘쓸 일은 하지 말자꾸나, 하며 무화가 말을 이었다.

“둘째, 손님이 시키는 일은 다 해야 한단다. 옷을 벗으라면 벗고, 엎어지라면 엎어지고, 기라면 기어야 해. 무슨 뜻인지 알겠니?”

무화의 말에 백아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옷을 벗고 바닥을 기라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백아는 땅에 무릎을 대어 본 일이 없었다. 백아가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헌원은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에 그 아래 제 손을 깔았다. 앉을 데가 없으면 헌원은 자신이 걸상이 되어 백아를 제 무릎에 앉혔다.

그런데 바닥을 기라 한다니.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나는, 그런 것…….”

무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섭선을 들어 백아의 뺨을 쳤다. 섭선 사이의 공간이 압축하며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뺨의 아픔보다 놀란 것이 컸던 백아가 입을 다물고 무화를 바라보았다.

“기생이라면 다들 해야 하는 일이야. 마냥 너를 곱게만 다뤄 줄 줄 아니? 싫은 것도, 더러운 것도 손님이 원하면 해야 하는 게 기생이란다.”

헌원은 그러지 않았다.

헌원은 언제나 백아가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면 그 즉시 멈추고 걱정 어린 눈으로 백아를 살폈다.

글공부가 그러했고 검술이 그러했다. 글을 읽다 졸아도 굳이 깨우지 않았고, 한 번 한 검술 연습에 손을 다쳐 하기 싫다 투정을 부리자 두 번 다시 강요하지 않았다.

좋은 것을 할 때도 백아가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헌원은 움직임을 멈추고 백아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백아가 아쉬워 헌원을 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헌원은 백아가 괜찮은지 살피고 나서야 백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백아가 싫어하는 일은 단 하나도 헌원은 하지 않았다.

헌원은 그러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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