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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34화 (34/66)

34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문득 오기가 솟아올랐다.

헌원이 데리고 가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가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헌원도 좋은 곳을 혼자 갔으니 자신도 혼자 가면 된다.

백아는 마음을 정했다. 숲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담벼락을 탄다면 대로로 빠져나갈 수 있다. 이제는 숲이 덜 무섭다. 그것은 헌원의 덕이었지만 화가 난 백아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 털어 버리기로 했다.

주위를 살핀 백아는 은밀히 침소의 입구 반대쪽 창문의 고정쇠를 열었다.

“당신, 기생처럼 아름다워요. 기생입니까?”

단화각의 각주 무화는 무례하게 말을 걸어오는 앳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기생들에게 이런 일은 꽤 빈번했다. 화대를 낼 능력은 없으면서 꽃을 쫓는 치들이 기루에 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하면 꼭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다.

무시해도 될 테지만 무화는 그런 성정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앳된 목소리에 짜증이 났다. 어린것이 벌써 색에 눈을 떠 기생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다니.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보아 능력도 없을 터이니 싹수가 노랄 것이 분명했다.

수치나 주어 쫓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무화는 몸을 돌려 말을 걸어온 이와 마주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예상과는 달리 무화의 앞에 있는 이는 음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돌려 음인을 마주했을 때 콧속을 파고드는 어설픈 향으로 알 수 있었다. 꿀을 가득 담은 꽃이나 잘 익은 과실 같은 달콤한 향은 분명 음인의 향이었다.

“……저를 부르신 분이십니까?”

“그래요. 나입니다.”

무화의 대답에 화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많이 쳐줘야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앳된 음인이었다.

갈무리도 배우지 못했는지 몸에서는 풋풋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어 앳된 느낌이 더했다. 무화는 앞에 선 음인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몸을 감싼 비단은 아무리 봐도 고관 댁에나 선보이는 최고급의 비단에다 솜씨 좋은 이가 자수를 놓은 최상품이었다. 잡티 없이 희고 고운 얼굴 하며 흐트러졌다지만 세심하게 정돈해 묶은 머리채엔 윤기가 흘러 기루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만큼 돈이 없어 보이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다면 음인이라서겠지.

무엇보다 다섯 번이나 매듭을 지어 놓은 이 앳된 음인의 옷고름은 무신경한 손짓 한 번에 풀어져 내릴 무화의 옷고름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장안의 제일가는 기루인 단화각의 각주 무화마저도 딱 한 번 풀어 보았던 것일 만큼 저 매듭을 묶을 수 있게 허락받은 이가 드물었다. 앞에 선 음인이 지체 높은 집의 자제라는 뜻이었다.

애초의 예상과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상대의 인상착의는 노련한 무화를 내심 당황하게 하였다.

“어인 일로 소인을 부르신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생이 맞다면, 저를 기루로 안내해 주세요.”

음인의 몸으로 어디를 가시겠다는 건가.

무화를 당황하게 한 이는 또 당황스러운 소리를 했다.

무화는 매듭을 보았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을 했다. 오겹 매듭을 할 수 있는 음인은 이 넓은 장안에서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이까지 고려하면 한두 사람으로 좁혀지는 수준이었다.

무화가 짐작하는 그이는 기루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었다. 기루라면 칠색 팔색을 하는 이이의 부군이 허락을 해 줄 리도 없고 말이다.

잠깐, 설마 그래서인 건가?

무화는 그제야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정도 지위의 이라면 응당 주변에 보여야 할 호위나 몸종이 보이질 않았다. 아치형으로 날렵하게 그린 무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가출이라도 하신 겐가, 이 맹랑한 음인께서는.

“……이 관원께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내가 기루를 가는데 왜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뾰족해진 목소리로 하는 대답이 무화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려 주었다.

무화는 언제나 도살장에라도 끌려온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이 승상 댁 자제를 떠올렸다. 기루를 탐탁지 않아 하는 태도까지 포함해 매력적인 양인이었다.

이 관원의 단호한 태도는 양인이나 각인에 학을 뗀 음인들로만 이루어진 단화각에선 오히려 호평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와 그 내자에 관한 이야기는 장안에 유명한 이야기였고, 그런 그가 기루를 기꺼워했다면 되레 점수를 깎였을 것이다.

일부에선 유혹해 보겠다 경쟁이 붙기도 하였으나 이 관원이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으므로 시도조차 성립하지 못했다.

그런 이의 내자께서 무슨 구설에 올라 어떤 경을 치르시려고 기루에 가고 싶다 청하시는 걸까? 사람을 잘못 만났다면 정말 큰일을 치를 수도 있는 것을.

갑자기 마주한 골칫거리에 무화는 한쪽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절하면 되는 일이라지만 그리한다고 저 세상 모르는 음인이 포기할 것 같진 않았다. 또 다른 이를 찾아 저 순진해서 무례한 말을 던지고 동행을 청하겠지. 그 후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한 번의 일탈에 대한 벌이라기엔 너무도 큰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느니 제가 악역이 되어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무화는 앞의 음인에게 예의 화사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붉게 칠한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음인은 꿈에 젖은 눈빛이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무화가 몸을 돌리자 정신을 차린 백아가 쪼르르 쫓아왔다. 갈무리하지 않은 향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 음인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무화는 저를 따르던 이들에게 은밀히 눈짓하며 특급 패를 꺼내 들었다. 특급령을 내리자 따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화는 저를 따르는 백아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수하들에게 눈길을 주던 백아가 무화와 시선을 맞추었다. 무화는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정중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잊지 못할 밤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 * *

“백아, 식사는 하셔야지요.”

해가 완전히 저물어 사위가 어두운데도 단이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헌원은 내내 기다리다가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는 좀 가라앉았겠지 싶어 침소로 향했다. 그러나 헌원이 문 앞에서 불러도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식사는?”

“말도 없으셨습니다…….”

말꼬리를 흐리는 단이의 대답에 헌원은 단이를 부엌으로 보냈다. 잠이 들었나 싶기도 했지만 식사는 하는 것이 좋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헌원은 저녁거리를 가져온 단이에게 눈짓을 했다.

“저는 보기 싫으신 듯하니 단이를 들여보내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데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단순히 토라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몇 시진이나 헌원을 보려 하지도 않는 일은 백아와 함께한 십여 년의 세월을 되짚어 보아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제 품의 백아가 다른 곳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는데 지금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달마저 휘영청한 밝은 밤이었으나 헌원의 속은 폭풍우가 치는 듯했다.

밤이 될 때까지 몇 번이나 시간을 가늠해 보았는지 모른다. 평소라면 얇은 책 한 권을 필사하고도 남았을 시간 동안 헌원은 한 장도 제대로 옮겨 놓지 못했다. 그 한 장도 이리저리 먹물이 번지고 글자가 어그러져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헌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헌원은 백아의 방 문에 이마를 기댔다. 사이엔 문 하나만이 있는데도 백아가 그리웠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죄며 진한 통증을 주었다.

“에그머니! 주인님! 작은 마님이!”

방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단이의 외침이었다. 급히 뛰어 들어간 방 안의 풍경에 헌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백아가 없었다.

백아는 무화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기생을 쫓았다. 오래지 않아 장안제일루라는 단화각에 들어선 백아는 입구서부터 보이는 휘황찬란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설에 쓰인 대로 선계 같은 광경이었다.

기루 안을 곧게 받치고 선 기둥들은 향목으로 이루어져 은은한 나무 향이 실내를 맴돌았고 그 사이사이 타오르는 향초들이 나무의 향을 더 은은하고 깊게 만들어 주었다.

기둥 사이사이론 형형색색의 천들이 하늘거렸고 바닥엔 폭신한 천이 깔려 있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중문을 지나 들어선 장내엔 꽃 같은 이들이 화려한 성장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백아가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백아에게 모여들었다. 얼이 빠진 백아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자신을 찾아 줄 나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여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에 백아는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무도회는 어디서 하나요? 무도회도 보고 싶어요.”

“……아직은 준비 중이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하나도 없다. 소설에서는 머무는 객도 있고 그러하던데.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기녀는 머물던 객과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한다. 자신은 기녀가 되긴 어려울 테니 꽃 같은 기녀와 달콤한 사랑을 하는 객이 되어 보고 싶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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