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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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은 어디선가 풍겨 오는 싱그러운 향을 좇다 잠에서 깨었다.
헌원의 주변에 영근 과일이 달린 과실수가 가득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상큼하고 싱그러운 향이 달콤한 향과 어우러져 폐부를 채웠다. 어느새 과실수는 사라지고 향만이 남아 있었다.
맛보지 못한 과실이 아쉬워진 헌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향의 흔적을 따라가려 했으나 향은 좀체 옅어지지 않았다. 향의 근원을 좇던 헌원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가슴팍에 붉게 익은 과실이 있었다. 과실을 양손으로 감싼 헌원은 이렇게 좋은 향을 내는 과실의 맛은 과연 어떠한가 궁금해졌다. 고개를 숙이려던 순간 헌원은 눈을 떴다.
꿈을 꾼 건가.
잠이 깨지 않아 멍한 머리를 가다듬으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풋풋한 내음이 헌원의 정신을 일깨웠다.
꿈속에서 맡았다 생각한 향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을 스쳤다.
꿈이 아닌가?
헌원은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숙여 제 품에 폭 파묻혀 잠들어 있는 백아를 내려다보았다.
백아는 헌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헌원을 꼭 안은 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백아를 쓰다듬었다. 백아가 뒤척이며 헌원의 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뒤척이는 백아의 몸짓에 주변을 떠돌던 싱그러운 향이 들썩거리며 퍼져 나갔다.
설마.
백아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예의 그 향이 콧속을 채웠다. 백아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아의 희락, 개화의 징조였다.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음에도 헌원은 조금 당황했다. 백아의 하는 양이 영 늦되기만 하여 조금은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준비하기 위한 허락을 이제 막 구하려던 참이었다.
돌아가면, 무엇보다 우선하여 미뤄 두고 있던 음양의 이치를 백아에게 가르쳐야 했다. 이제는 정말 미룰 수 없었다.
헌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호를 할 테지만, 백아 스스로 조심하지 않는다면 헌원의 보호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근래에 들어서야 잦아진 외출인데 다시 자제시켜야 했다. 시무룩해할 백아의 표정이 벌써 눈에 선해 지레 걱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내키지 않아 여태껏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었다.
“무엇을 먼저 말씀드려야 하려나…….”
헌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백아에게 할 이야기를 정리해 나갔다. 음인이나 양인에 관한 설명부터 하고 발정기나 각인에 관하여 설명해야 한다. 향을 갈무리하는 법도 가르쳐야 했다. 할 일이 많았다.
한편으론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각도 없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면 제 속앓이가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어나려는 헌원의 기색에 잠이 깬 백아가 잠투정을 부렸다. 떨어지지 않으려 헌원의 몸에 두른 손에 힘을 더했다.
흑아로 분했던 그날 이후부터 백아는 부쩍 헌원을 보챘다. 헌원이 냉정하게 굴었던 것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헌원은 어른스럽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백아, 일어날 시간입니다.”
헌원의 속삭임에 백아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잠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헌원과 눈을 마주하며 배시시 웃는 것이 어여뻤다. 헌원은 고개를 숙여 백아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백아가 간지러운 웃음을 내었다.
“백아, 일찍 돌아가야겠습니다. 일이 생겼어요.”
그대의 희락을 준비해야 합니다. 잘 따라와 주세요.
“으응, 헌원.”
백아는 순순히 대답하며 헌원의 품에 이마를 문질렀다.
오는 마차 안에서 운을 띄워 보려 했으나 백아는 내내 잠을 잤다. 폭포에서의 일이 고되었나, 아니면 몸이 개화를 준비하여서인가. 헌원은 마차의 흔들림에 미끄러지는 백아를 고쳐 안았다.
말이 씨가 된다 했던가. 승상 댁에 도착한 헌원을 기다리는 소식이 있었다. 무리하게 휴일을 늘렸던 탓에 헌원이 미리 처리해 두었던 일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헌원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백아를 침소에 데려다 두고 당부했다.
“일찍 돌아올 터이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작정 나가지 말라 한다면 오히려 기를 쓰고 나가려 들 백아라 하고자 하는 말을 완곡히 둘러말했다. 백아가 의아한 낯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을 마중하는 백아의 표정은 평온했다. 초조한 건 헌원뿐이었다. 일찍 오겠다 하였으니 저를 기다려 주겠지. 헌원은 애써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기루에 가 보고 싶어요.”
퇴청하고 바삐 달려온 헌원에게 백아가 내어 놓은 첫마디에 헌원은 아연했다.
엇나간 일을 수습하면서도 헌원의 머릿속 한편엔 백아가 가득 차 있었다. 무엇부터 이야기할까 고심하며 해 두었던 정리들이 백아의 저 한마디로 하얗게 표백되어 버렸다.
이 무슨 위험한 소리를 하시는 걸까? 제 정인은.
단이마저 하얗게 질린 것이 단이에게 상담을 하였다간 또 반대할 것이 뻔하니 이번엔 아예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백아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헌원을 보고 있었지만 헌원은 단호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기루가 어떤 곳인데.
헌원은 백아가 그런 세상을 아는 것조차 탐탁지 않았다.
“서역의 무도회와 같은 잔치가 매일같이 벌어지는 곳이라면서요. 꽃 같은 이들이 첫날밤의 신부처럼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 곱게 웃어 준다고. 가 보고 싶어요, 헌원.”
기대에 물든 몸에서 화사한 향이 듬뿍 흘러나왔다.
백아의 몸이 준비를 마쳐 가고 있는지 헌원이 관청으로 향할 때보다 훨씬 짙어진 향이었다. 정 부인의 말씀대로라면 늦어도 모레 즈음엔 희락의 증세를 보이게 될 터다.
이런 상태로 기루에 갔다간, 아니 상태가 문제가 아니다. 백아는 그런 곳에 발도 들이면 아니 되었다.
헌원은 백아의 한 손에 들려 있는 서책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보나 마나 저 서책이 원흉일 것이다. 진원은 선수마저 빼앗더니 중요한 순간에 헌원을 곤란하게 했다. 자신도 그 책을 구하려 했던 일을 까맣게 지워 버린 헌원의 애꿎은 원망이 진원에게 향했다.
“백아, 그것은-.”
“무도회에 데려가 준다고 했었잖아요, 헌원.”
헌원의 표정에서 거절을 읽어 낸 백아가 헌원의 말을 잘랐다. 표정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기대가 차올랐던 눈에 실망과 함께 눈물이 고였다.
“좋은 곳엔 혼자 가지 않겠다고,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백아. 기루는 좋은 곳이 아닙니다.”
헌원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저자에서 유행하는 이야기에서 기루가 얼마나 아름답게만 묘사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이면의 어두운 이야기들은 지금의 백아가 이해하기엔 난해한 내용이었다.
그를 이해하려면 향인이나, 음양의 이치에 대한 설명 먼저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억울해하는 백아는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결국, 백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희고 매끄러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헌원이 눈물을 닦아 내려 손을 내밀었으나 속이 상한 백아는 헌원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헌원은 가 보았다면서요! 아범에게 다 들었어! 가끔 늦게 왔던 것, 기루에 들렀다 오기 때문이라면서! 좋은 곳이 아니면 여러 번 갈 리가 없잖아!”
백아의 말에 헌원이 난감해졌다.
간 적이야 있다. 관직에 오른 초기에 색을 좋아하는 상사 덕분에 억지로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가고서도 술 한 잔 들이켜고 나오는 것이 다였지만, 아예 참석하지 않으면 말단인 자가 아버님인 이 승상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여 제멋대로 군다는 구설수가 돌까 마지못해 참석한 자리였다.
나중에야 그럴 필요 없다고 하시는 이 승상의 말씀을 듣고 거절하고 있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백아가 그것을 들먹일 줄은 몰랐다.
하나, 그래도 안 된다.
기루에 양인이 드나드는 것과 음인이 드나드는 것은 천지 차이다.
헌원의 보호 아래 간다고 해도, 아니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구경조차 할 곳이 못 된다.
음양의 이치에 대해 배우면 백아도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헌원은 억지로 백아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백아는 이미 속이 잔뜩 상했다.
“실망입니다, 헌원. 입에 발린 말로 지키지도 않을 약조를 하는 이인 줄은 몰랐어요.”
백아는 말을 꺼내려는 헌원을 돌아보지도 않고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헌원이 급히 뒤따랐으나 이미 문이 잠긴 후였다. 문을 두드렸지만 백아는 대답이 없었다.
헌원은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헌원이 설명한다 해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마음을 식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오겠습니다. 백아.”
괜히 앞에서 서성거리면 화를 돋울까 걱정한 헌원은 그렇게만 말하고 물러났다. 방문 앞에 천희와 단이를 세워 놓았으니 그 전에라도 백아가 마음이 풀려 방문을 열면 연락이 올 터였다.
백아는 그림자가 사라진 침소의 덧문을 노려보았다.
문을 잠가 버렸다고 금세 포기한 헌원이 밉고 야속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몇 번은 더 백아를 불러 줄 줄 알았다.
혼자 있는 넓은 침소가 백아를 더 서럽게 했다. 눈물은 잦아들었지만 마음이 휑했다. 저자에서 만났던 날도 그러하고, 이제 와 생각하니 폭포도 그랬다. 백아가 숲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면서 헌원은 묻지도 않고 데려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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