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싫어, 안 갈래요, 헌원. 그냥 여기서 놀아.”
장원 안에 폭포가 있다는 이야기에 설레어하던 백아는 장원에 도착하자 고개를 내저었다. 산을 낀 장원이라 폭포로 가는 길에 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욕탕을 둘러싼 대숲에선 거리낌 없이 숨기도 하기에 나아진 줄 알았더니 별채 안이라 그러했던가. 아직 어린 날의 기억이 희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헌원이 준비한 선물은 또 백아의 마음에 한 번에 들지 않았다.
올해는 왜 이러는지. 헌원은 난감해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가다듬었다.
“제가 함께할 겁니다. 천희와 단이도 따를 것이고요. 홀로 숲을 헤매실 일은 없어요, 백아.”
허리를 숙이고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헌원은 확언했다. 헌원을 바라보던 백아가 힐끔 헌원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백아의 시선을 받은 단이와 천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헌원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헌원은 백아가 울상을 짓고 바라보는 뒤편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빽빽하게 우거진 대나무 숲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 광경은 퍽 정취가 있었다. 조금 더 방문이 잦아진다면 한편에 정자를 놓아도 좋을 풍경이었다.
좀 더 도성과 먼 곳의 장원을 보시는 이 승상을 설득해 이 장원을 사들인 건 헌원의 노력이었다.
이 장원의 매력은 뒤편에 자리한 폭포에 있었다. 장마가 진 후 며칠만 굵어지는 물줄기가 높은 암석 사이로 떨어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 기간이 마침 백아의 생일 언저리기에 헌원은 그를 알자마자 승상께 청을 했다. 그러니 그를 보지 않으면 여기까지 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간 헌원의 노력도 허사였다.
헌원은 폭포에 대해 알게 된 후 그 물줄기를 맞으며 백아와 천인처럼 노니는 상상을 했다. 날도 더워진 지금은 물의 온도도 딱 적당할 터였다. 천인의 폭포를 맞으며 운우지락을 나누며 백아를 자신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백아에게 그 이야기를 속삭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 뒤편의 산 이름이 무언지 아십니까?”
헌원의 다른 질문에 백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원의 말을 경청하는 어여쁜 정인은 호불호는 명확하나 호기심이 많았다. 싫은 것보다 궁금함이 우선이었다.
“천산입니다. 그 안의 폭포는 천인들이 내려와 몸을 씻고 간다 하여 천인 폭포라고 불립니다.”
부러 지난밤엔 이 이야기를 읽었다. 연애담보단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백아는 꽤 흥미를 보였다.
“나무꾼을 만나면 천인이 몸을 씻는 폭포의 위치를 물어볼까요?”
그러나 백아는 헌원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했다.
“나무꾼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집에도 못 가게 하는 못된 사람이잖아. 헌원을 못 보게 된다면 싫어.”
백아의 대답을 들은 헌원은 순식간에 지옥과 극락을 오갔다.
헌원은 자신이 천인을 억지로 곁에 둔 나무꾼과 처지가 비슷하다 여겼다. 그런데 백아가 나무꾼을 못된 사람이라 이르니 마치 자신이 비난을 받은 듯 가슴 한편이 아렸다. 뒤에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면 헌원은 책을 더 읽지 못하고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헌원은 헌원과 함께하는 승상 댁을 집이라 여기는 백아의 말에 더없이 감사했다. 백아의 그 말이 헌원에겐 백아가 어디를 가든 돌아올 곳은 헌원의 곁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헌원은 지난밤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백아의 귓가에 손을 올린 헌원은 백아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말하는 사슴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백아는 솔깃한 표정으로 헌원의 손을 꼭 쥐었다. 굵게 자란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다시 흘끔 바라본 백아는 다시 헌원을 보곤 각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따르거라.”
단이에게 이른 후에 백아를 이끌었다. 마음을 돌리기 전에 폭포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헌원이 옆에 있다고 해도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는지 백아는 대나무가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며 살폈다. 급한 마음에 조금 빠르게 걷던 헌원은 저보다 보폭이 좁은 백아와 속도를 맞추었다.
헌원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백아의 맞잡은 손을 꼭 쥐었다. 이어 손을 놓고 백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러면 떨어지지 않겠지요?”
백아도 헌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연인은 나란히 숲길을 걸었다.
“사슴을 만나 으름장을 놓을 거예요.”
“무어라 말입니까?”
“은혜는 직접 갚으라 하려고.”
말하는 사슴에 솔깃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헌원은 슬쩍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원에게 천인은 백아였으니 사슴을 만나게 되는 이는 헌원일 것이다. 어쩌면 오래전에 이미 만났는지도 몰랐다. 어릴 적, 백아를 앓을 때에 꿈에서 사슴을 만난 것도 같다.
“백아가 사슴에게도 가르침을 주겠군요.”
헌원은 백아의 말에 맞장구쳤다. 백아가 숲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헌원은 그것으로 되었다. 이야기의 감상은 백아의 것이니 헌원이 참견할 것이 못 되었다. 헌원은 대신 다시 백아를 바짝 당겨 안았다. 백아는 헌원을 슬쩍 보고는 남은 팔로 제 허리에 감긴 헌원의 팔을 꼭 쥐었다.
“주변이 꽤 밝아요.”
잠시 경치를 감상하며 걷던 중, 백아가 뜬금없이 말했다.
헌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원을 위해 숲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성한 숲인지라 날이 밝은데도 드는 빛은 적었다. 헌원과 백아가 걷는, 사람이 드나드는 오솔길에만 간간이 햇볕이 내려오는 정도였다. 의아해진 헌원이 이번엔 백아를 바라보자 정작 백아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때엔 주변이 온통 시커맸어요. 바닥도 온통 나뭇잎 천지라 땅도 잘 보이지 않고.”
백아는 어렸을 적 숲에서 길을 잃었던 때를 말했다.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면 백아가 힘들어하거나 두려워할까 봐 헌원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았다. 가끔 악몽을 꾸다 깨어 울면 그저 끌어안고 다독이기만 했었다.
계속 땅을 보고 있는 백아가 불안했다. 최근 몇 년간은 그런 일이 없어 마음을 놓았었는데, 혹여 실수였을까? 장원에서 경치를 즐겨도 충분했을 텐데 제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그러나 헌원의 염려는 헛되었다. 어느샌가 헌원을 향해 고개를 든 백아가 헌원에게 보여 주는 미소가 밝았다.
“아마 헌원과 함께여서 그런가 봐요. 그때도 헌원이 괜찮다니까 괜찮아졌어.”
그러면서 백아는 보폭이 크게 발을 내디뎠다. 헌원에게 팔을 감은 채 움직인 탓에 잡고 있던 헌원까지 앞으로 휘청였다. 자세를 바로잡은 헌원은 다시 큰 걸음을 걷는 백아를 붙들었다. 헌원을 축으로 빙글 돌며 허공을 걸은 백아가 헌원의 품에 안겼다. 헌원은 백아를 가두듯 감싸 안았다.
“감사합니다, 백아.”
“헌원이 뭐가요?”
“백아가 큰일 없이 무탈한 것이, 무사한 것이 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
헌원의 대답에 백아는 아무 말 없이 헌원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기만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헌원이 감은 팔을 슬쩍 풀고 아래를 보았다. 동시에 백아가 빈손을 들어 헌원의 가슴팍을 밀었다.
“……무탈한 것이 당연하잖아요. 감사할 것이 무어 있어.”
뒤늦은 대답에 핀잔이 섞여 있어 헌원은 가만히 백아를 보았다. 귓가와 그 아래가 불그스름한 것이 겸연쩍어하는 모습이었다. 투명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맑은 피부가 헌원을 더없이 기쁘게 했다.
헌원은 백아가 자신을 이야기하며 귓가와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기대야 수천 번, 수만 번을 한 것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였다. 실제로 눈앞에 현현한 모습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제게는 백아가 잠시 사라지는 것마저 큰일입니다. 저 없는 곳을 보는 것도 두렵고, 제가 모르는 곳을 가시는 것도 두렵습니다. 제가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걷거나 그를 따르는 것도 제겐 큰일입니다.”
언제나 속으로만 늘어놓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늘 하던 염려와 비슷했으나 의미는 천양지차로 백아가 다른 이를 꿈꾸는 것을 슬퍼하는 말이었다. 백아가 이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헌원은 행복했다. 이렇게라도, 조금씩이라도 깨닫고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더불어 이 손의 작은 상처도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번 바늘에 찔려 붉은 멍울이 들었을 때도 얼마나…….”
“간지러워요, 헌원. 무얼 그런 걸 갖고…….”
감사밖에 할 수 없어 다시 감사하려던 헌원은 쑥스러워하는 백아를 위해 감사를 다시 입에 담는 것은 내려놓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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