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애써 지탱하고 있던 몸을 무너뜨린 백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헌원의 가슴을 탕탕 쳐 댔다. 어지간히 서러웠는지 가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백아의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헌원은 몸을 일으켜 백아를 감싸 안았다. 백아는 그제야 저를 감싸 안는 헌원이 얄미웠으나 헌원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았다. 혹여 털어 냈다가 헌원이 그대로 가 버릴까 두려웠던 탓이다.
몸에 닿는 익숙한 헌원의 품이 백아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감싼 몸에서 전해져 오는 체온이 반가웠다.
백아의 눈에선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헌원이 떨어질 수 없도록 헌원의 등에 팔을 둘러 힘을 주었다.
헌원은 자신에게 꽉 안겨 오는 백아에게 미안하고 또 사랑스럽기도 해 백아를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백아가 다리마저 헌원에게 감아 오며 헌원에게 매달렸다.
“백아.”
“……흑, 응, 응, 헌원.”
백아는 헌원의 부름에 냉큼 대답했다. 헌원이 다시 냉정해질까 두려웠다.
백아의 반응에 제가 너무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헌원은 백아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백아가 헌원의 품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백아가 저를 모른 체할 때, 저 또한 지금의 백아처럼 서럽고 무서웠습니다.”
“하, 하지만.”
저자에선 아무렇지 않아 했잖아요, 하고 말하려 했지만 목이 막혔다. 헌원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백아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소리도 내지 않은 백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백아가 좋아하시는데 어찌 티를 냅니까. 하나 백아, 저는 백아가 저를 모른 체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요.”
백아는 모를 테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께에 자리한 꽃잎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무섬증이 든다. 그것이 각인이고, 그것이 백아에 대한 헌원의 감정이다.
다는 아닐지언정 백아가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원망 들을지도 모를 일을 사서 했다.
“다시, 흑, 다시는 헌원.”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품 안의 백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은 백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백아는 헌원을 볼 낯이 없는지 고개는 한사코 들지 않았다.
헌원은 하는 수 없이 백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백아의 허리를 힘주어 당겼다. 백아의 안에 자리한 양물이 다시금 부피를 키웠다. 놀란 백아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백아에게서 흐응, 흐응 하는 비음이 새어 나왔다.
“이것은 백아, 오로지 백아와만 하는 좋은 것이에요. 다른 이와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백아는 대답 대신 몸으로 헌원을 보챘다. 몸으로 하는 대답에 헌원도 따로 독촉하지 않았다. 이제 말로 하지 않아도 조금씩 뜻이 통하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헌원은 대답을 보채는 대신 서러운 백아를 기쁘게 하는 데에 온 정성을 쏟기로 했다.
헌원이 백아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남만산 홍옥으로 만든 귀걸이였다.
흑아로 분한 백아와 함께 저자를 돌아다닐 때 마땅한 물건을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자에서 모두에게 내보이고 파는 물건들은 상인들이 승상 댁에 선보이는 물건들에 비하면 한참은 하품의 물건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헌원의 눈에 차지 않았다.
헌원은 따로 정 부인께 말씀드려 이가와 거래하는 상인들을 만났다. 그중 금은상에게서 백아에게 딱 맞춘 듯한 귀걸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헌원은 선금이 걸린 물건이라며 난감해하는 상인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그 귀걸이를 가져왔다.
남만의 버마에서 나는 홍옥은 불투명한 일반의 옥과 달리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것이었다. 투명한 붉은 보석은 늘 열정적이며 솔직한 백아와 꼭 닮았다.
지나치게 화려하여 경박해 보이지 않도록 최소한의 장식만을 한 홍옥은 푸른 기가 돌아 오히려 더 붉게 보였다.
홍옥은 헌원의 엄지손톱만 한 보기 드문 크기로 한눈에 보기에도 비싼 값을 했다. 헌원이 고른 홍옥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선명했다. 버마의 왕족이 직접 취급할 만한 품질이었다.
양귀비의 색보다 더 짙은 붉은빛을 띤 홍옥은 백아의 귀에 걸면 흰 피부는 화사하게 살아나고 보석은 더 붉게 빛나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 터였다. 헌원은 제가 준비한 선물에 제법 만족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아 든 백아는 헌원의 선물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이런 건 이미 많은데.”
“귀걸이는 없잖습니까.”
“홍옥은 많은걸? 천축산도 있고, 서융산도 있고.”
백아는 선물을 받으며 들었던 산지나 출처를 이야기했다. 백아가 그런 것을 모두 기억할 줄은 몰랐던 헌원은 조금 당황했다.
“이건 남만의 버마산입니다.”
“흐음…….”
백아는 다른 산지의 물건이라는 말에 조금 누그러졌다. 산지를 따지기보단 가지고 있는 것들과 다른 물건이란 말에 솔깃한 반응이었다. 백아가 집어 든 남만의 홍옥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사방에 빛을 뿌렸다.
“허…….”
그 모습에 단이뿐 아니라 평소엔 큰 동요가 없는 천희까지 감탄성을 내자 백아는 그제야 조금 마음에 든 입매를 했다. 실컷 구경한 백아가 귀걸이를 내려놓자 단이가 조심스레 함을 닫았다.
“나는 헌원이 그걸 주길 바랐어요.”
백아가 이야기하는 건 저자에 널린 저렴한 물건이었다. 흑아로 분하여 돌아다닐 때에 눈길을 주던 것이 여럿이었다. 물감을 칠해 색은 화려하나 나무를 깎거나 흙을 구워 만들어 귀중품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들을 백아는 신기해했다.
항상 최고급의 보석이나 귀중품만을 보고 자란 백아는 저자의 물건 쪽에 더 눈길을 주었다. 황실 소속의 도공이 주칠 위에 금박을 입혀 만든 자기보다 풀물을 들인 대나무 바구니를 더 오래 관찰했다.
헌원과 함께 돌아다닐 때에 가게에서 고른 것도 하품의 노리개였다.
헌원과 백아의 차림새에 잔뜩 기대하며 백아에게 금색의 가격표를 보여 주던 사내는 백아가 고른 물건을 보고 적잖이 실망한 티를 내었다.
헌원은 내로라하는 귀한 물건들을 건성으로 다루는 백아의 태도가 모순되게도 뿌듯했다. 귀한 것을 귀히 여기는 건 헌원이 백아를 위할 때로 족했다. 백아가 이 중에 가장 귀하니 다른 것은 다 하찮았다.
세간에서 다루는 가치를 알게 된다면 반응이 달라질까?
헌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잇속을 따져 거래와 흥정을 하는 모습은 백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가격이 어떠하든 간에 친인이 준 것을 귀히 여기고, 또 그것을 다른 친인들과 나누는 것에 기뻐하는 모습이 백아와 더 잘 어울렸다. 헌원은 백아가 늘 그런 모습이기를 바랐다.
헌원은 그런 속내를 내색하진 않은 채 그저 속으로만 웃었다.
아버님이나 어머님, 백아의 부모님께서 보낸 선물까지 갈무리한 후 미리 준비한 마차를 탔다. 장원에 가기 위함이었다.
“우리 어디 가요?”
“멀지 않은 곳에 잠시 나들이를 준비했습니다. 한동안 집 안에만 있어 답답하셨지요?”
세책방을 들락이며 장안 중심부인 저자까지 행동반경을 넓히긴 하였으나 도성을 벗어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백아는 나들이란 말에 반색하며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제 발로 걷고 뛰길 더 좋아하는 백아는 마차로 하는 이동에 금세 지루해했다. 장안을 벗어나 한 시진쯤 지나자 자꾸 남은 거리를 물었다. 놀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부러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더니 따분한 모양이었다.
“한 시진쯤 더 가면 됩니다. 무료하십니까?”
“엉덩이 아파.”
백아는 지루한 낯으로 진원이 준비한 생일 선물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마차가 흔들려 책을 펼 수 없는 것이 아쉬운지 품의 꾸러미를 자꾸 고쳐 쥐었다. 늘 헌원이 준 선물을 가장 좋아했는데 올해의 생일 선물 중에는 그게 가장 마음에 든 듯했다.
백아의 그런 모습에 헌원은 진원에게 선수를 빼앗긴 일이 내심 속이 쓰렸다.
“서책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밖을 보던 백아는 질문을 던진 헌원의 시선이 제 품에 머물러 있자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헌원이 무엇을 보는지 확인한 백아는 슬그머니 헌원이 끼워 넣은 서책을 잘 보이는 앞쪽으로 빼었다.
의외의 행동에 헌원이 의아한 낯으로 백아를 보자 백아가 웃으며 서책을 고쳐 안았다.
“이건 헌원의 선물이니까.”
예상외의 대답에 헌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내가 헌원의 필체도 모를 줄 알고?”
그간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이건 그 이상이었다. 헌원의 필체를 보고 기억하고 구분하여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백아는 달라지지 않았다. 헌원에게 예상외의 행복을 선사하는 점까지 지금까지와 꼭 같았다.
헌원은 그때까지의 속 쓰림이나 씁쓸함 따위 다 날려 버렸다. 백아를 보는 헌원의 눈에서 주체하지 못한 기쁨이 흘러나왔다. 백아는 지금까지처럼 가장 어여쁘고 가장 해사하게 웃음 지었다.
“저녁에 같이 읽어요.”
헌원은 마주 미소 지으며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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