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미리 주문해 두었던 선물을 찾으러 세책방에 들렀던 헌원은 장가가 내놓은 꾸러미를 보고 아연했다.
헌원이 받은 꾸러미는 진원이 건넨 백아의 생일 선물과 겉을 감싼 포장이 똑같았다. 진원이 건네줄 때에 그 내용물이 책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겉면의 인장이나 매듭 방식까지 같으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백아가 같은 선물을 받는 일은 헌원에겐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왜,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꾸러미를 뚫어져라 살피는 헌원의 태도가 여상스럽지 않으니 책을 건네려던 장가가 조심스레 헌원의 눈치를 살폈다.
“이 인장…….”
“책이 진품이라는 증거입니다. 귀하신 분들께서도 찾으시는데 그분들께서 대본으로 보실 수는 없는 일이라 이렇게 따로 필사하여 인장과 서명을 넣고 있습니다.”
“같은 인장이면 같은 책이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장가의 대답에 헌원은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낭패였다.
유행하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에 백아가 관심을 보여 헌원은 장가에게 그 책을 구해 달라 일렀었다. 향인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헌원이 따로 정리해 엮어 둔 책과 함께 선물할 생각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진원이 같은 것을 준비할 줄이야. 산사에 있는 진원에게 새 선물을 마련하라 할 순 없으니 진원이 건넨 것을 주긴 주어야 할 테고…… 이것은 어찌한다. 백아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가 자네, 이것, 구하기 어렵다면서!”
괄괄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세책방에 새로 들어선 사내가 헌원이 들고 있는 꾸러미를 보고 장가를 탓했다.
“이건 이분이 이레나 먼저 구하신…….”
장가의 대답에 사내가 꾸러미와 함께 헌원의 손을 덥석 쥐었다.
“이보, 젊은 친구. 이거 양보 좀 하게. 내 마눌님께서 뒤늦게 글공부에 재미를 붙이셨거든. 이거 구하지 못하면 내 마눌님 손도 잡지 못하이. 내 웃돈도 얹어 줄 터이니 좀 부탁하네.”
적절하게 나타난 사내에게 헌원은 순순히 책을 넘겼다. 사내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크게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마침 쓸모가 없어졌던 참이라.”
사내는 장사치인지 슬그머니 헌원의 눈치를 보고는 장가와 웃돈으로 실랑이했다. 그러나 장가의 잔뼈도 굵은 터라 사내는 돈주머니를 탈탈 털렸다. 값을 지급하고 책을 넘겨받은 사내는 크게 아쉽지는 않은 걸음걸이로 세책방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헌원은 진원의 선물에 따로 준비했던 책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진원에겐 나중에 언질을 주면 될 터였다.
그리고 헌원은 백아의 생일 선물을 다시 고심해야 했다.
십수 해를 함께 지내다 보니 백아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도 여의치 않았다. 어지간한 것은 다 받아 보거나 가지고 있는 백아인지라 매년 선물을 고르는 난이도가 높아졌다.
더구나 올해엔 얼마 전 성년이 되어 받은 선물도 있어 그 목록도 제하니 사실상 새로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어찌할까 고심하던 헌원은 선물의 방향을 틀었다. 꼭 무언가 건네주어야만 선물은 아닐 터였다.
관원이 된 후론 백아와 도성을 떠난 적이 없으니 하루나 이틀 즈음 멀지 않은 곳으로 나들이를 갈 참이었다. 마침 두어 시진 거리에 근래에 승상께서 마련한 장원이 있었다. 헌원은 관청에 양해를 구해 백아의 생일 전후로 시간을 비웠다.
그러나 막상 날이 가까워져 오자 빈손일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면 백아는 늘 헌원이 준 것은 기쁘게 받았다. 비록 그것을 진원이나 어머님과 나누어 헌원의 속을 상하게 할 때도 있었으나 그것 또한 헌원이 준 것을 귀히 여긴 탓이라 헌원은 백아를 나무랄 수 없었다.
관청을 나서며 마음을 굳힌 헌원은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틀었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안겨 주기는 해야겠다. 기대에 차 저를 보는 얼굴이 떠올라 저자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백아에게 주기 적당한 공예품을 파는 가게는 대로에 있었다. 대로를 따라 걷던 도중에 낯익은 두상이 헌원의 시선을 끌었다. 차림은 달랐으나 헌원은 확신했다. 걸음걸이나 체격, 하는 행동은 확실히 백아였다. 헌원은 새끼발가락만 보아도 백아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일전에 타이른 말을 무시하고 홀로 다니나 싶어 주위를 살피니 그래도 지근거리에 단이와 천희가 따르고 있었다. 백아는 천희와 단이가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살펴 가며 저자를 구경했다.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백아를 보고 헌원은 생각을 바꾸었다. 급하게 떠올린 물건들이 영 마음에 차지 않으니 백아가 원하는 것을 사 주는 것도 좋을 터다. 방향이 정해지자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헌원은 마음만큼 느긋해진 걸음걸이로 저자 구경에 정신이 없는 백아에게로 다가갔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닐 터인데 눈에 보이는 것마다 관심을 보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어릴 때와 꼭 같았다. 헌원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백아를 불렀다.
“백아.”
“……아닌데요.”
그러나 헌원의 예상과 달리 백아는 헌원을 처음 본 사람인 양 모른 체했다. 헌원의 부름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을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이다.
헌원은 이번엔 자세히, 백아의 차림을 살폈다. 거추장스럽다고 늘 바싹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마저 정돈하여 내리고 내팽개치던 비단 장포를 겹겹이 걸쳐 곱게 성장을 한 채였다.
무슨 일로 이리 곱게 단장하였나 하여 물으려는데 백아의 뒤로 단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오늘도 무슨 고집을 부린 것이구나 짐작했다. 일단 백아가 하는 대로 장단을 맞추려는데 조금 달라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침하게 눈을 내리까는 백아의 눈 밑에 먹으로 찍은 듯한 점이 자리해 있었다. 잡티 없이 흰 피부를 자랑하는 미인인 백아는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티끌 같은 점이 크게 시선을 끌었다.
점 하나로 인상이 바뀐 얼굴을 보며 헌원은 이제는 자연스레 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밤 읽었던 이야기는 원수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피살당한 부모의 복수를 하려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원수의 집에 잠입했다. 분노에 휩싸인 주인공은 그런데도 인의를 버리지 않아 손에 피를 묻힌 자신이 어둠에 물들었다 여겨 이름마저 백영에서 흑영으로 바꾸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는 분과 닮아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이를 대하는 듯한 정중한 헌원의 태도에 백아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백아는 들썩거리는 입술을 가다듬지도 않은 채로 어깨를 쭉 펴고 도도한 척을 했다. 백아는 헌원에게 고개만을 끄덕여 허락을 내렸다.
뒤로는 단이의 한숨이 깊어지고 꿋꿋했던 천희마저 표정을 무너트리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백아는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고고한 자세로 헌원을 대할 뿐이었다.
“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흑아, 흑아입니다.”
이름을 물어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약간은 당황한 듯한 백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백아의 입에서 나온 가명이 너무도 백아다워 헌원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흑아, 혹여 괜찮으시다면 안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곳이 낯설어서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자 백아가 웃으며 헌원의 손을 잡았다. 냉큼 몸을 돌리는 백아를 따르며 헌원은 벌써 남은 하루가 짧을 것이 걱정되었다.
“이게 누구야, 내 은인이 아니신가?”
백아에게 이끌려 들어간 가게에서 헌원에게 말을 건넨 이는 세책방에서 만났던 사내였다. 사내는 여느 행상들처럼 좌판이 아닌 제법 번지르르한 상점의 주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사치라 짐작했던 헌원의 예상이 맞았다. 장가에게 돈을 털린 건 흥정 수완의 노련함보다는 선물의 가격을 깎기엔 멋쩍어서였던 듯했다.
“그래, 이분께서 귀한 선물을 받을 예정이셨던 정인이신가?”
구하려 했던 책이 세속의 연애서였으니 그를 선물로 주고받는 헌원과 백아의 관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터다. 귀중품 가게에 손을 맞잡고 들어오는 청춘 둘이 다른 관계일 리도 없고 말이다.
웃으며 사내의 말에 긍정하려던 헌원에게 청천벽력 같은 백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오늘 처음 만난 이예요.”
헌원은 태연하게 흑아를 연기하는 백아를 보았다. 말을 꺼냈던 사내는 짐작과 다른 대답을 하는 백아의 태도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백아는 둘의 기색을 느끼지 못했는지 예사롭게 가게를 둘러보았다.
“저이에게 안내의 답례로 선물을 받기로 했어. 좋은 것 좀 추천해 보아요.”
능청스럽기까지 한 백아의 태도에 금세 당황을 수습한 사내는 장사치의 낯으로 안면을 바꾸었다. 사내는 도도하게 턱을 들고 선 백아를 금색의 가격표가 달린 선반으로 이끌었다.
“귀인께 어울리는 물건들은 이쪽에 있습니다. 어느 것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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