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진원이 사라지자 백아는 며칠간이나 진원을 찾았다. 내내 풀이 죽어 있어 어찌나 가슴이 아팠던지. 백아를 생각하면 진원이 집에 들르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이것, 백…… 아니, 형수께 전해 주세요. 이르지만 생일 선물이라고.”
벌써 그렇게 되었나. 요즈음 부쩍 헌원의 속을 썩이는 백아에게 이리저리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백아의 생일이 다가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도 꽤 말미가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며 날짜를 가늠해 보니 헌원의 기억이 맞았다. 아직 보름 넘게 여유가 있었다. 선물을 건네기엔 진원의 말대로 확실히 이르긴 했다.
헌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진원이 내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뭐 이리 이르게…….”
“잊어버렸다 지나 버리면 무슨 경을 치게요. 재작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합니다.”
진원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원의 말에 재작년 일을 떠올린 헌원은 픽 웃고 말았다. 재작년 이맘때에 백아는 눈에 불을 켜고 진원을 쫓아다녔다.
하필이면 백아가 갖고 싶다 한 옥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터라, 진원은 뒤늦게 주문한 옥적이 만들어져 올 때까지 백아를 피해 숨어 다녔다. 악우로 쌓은 세월이 길다 보니 백아는 진원에겐 꽤 짓궂은 짓도 곧잘 했다.
정작 백아는 옥적을 받을 때쯤엔 이미 흥미가 달아나 옥적은 주인의 손을 한 번 타 보지도 못하고 아직 상자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투덜대는 진원의 말에 백아는 네가 늦어 그렇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 헌원은 백아의 편이었다.
“왜, 직접 주지 않고. 집에까지 들렀다면 짬을 내어도 됐을 터인데.”
“아, 그것이…… 형수께서 너무 스스럼이 없으셔서. 나중에 뵐게요, 나중에.”
자신의 말에 미묘하게 굳어지는 헌원의 표정을 보며 진원은 진심으로 빌었다.
제발, 형님. 눈치채 주세요. 눈치채셔서 백아, 아니 형수께 세상 물정을 보는 눈 좀 길러 주세요. 하고 말이다.
기억하는 순간부터 한집에서 자라 같이 뒤엉켜 노는 게 당연했던 백아를 어릴 적의 진원은 이웃의 어린아이나 친척 동생쯤으로 여겼다. 실제로 부친 친우분의 자제였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가 좀 굵어진 후 모친이신 정 부인이 진원을 불러 호칭을 바로잡아 주셨을 때에 진원은 그 호칭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뭐 그렇게까지…… 적당히 해요, 어머니.”
“적당히 넘어가면 안 되는 일이야. 명심하여 바로 하여라.”
“동생 같은 아이인데…….”
“어허.”
“예, 예.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가벼이 넘길 생각이 만만이었던 진원은 정 부인의 엄한 표정에 관성적으로 마음에 드실 대답만을 했다. 정 부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했지만 곧잘 대답하는 진원에게 한소리 더 하시지는 않았다. 진원은 그렇게 대충, 어른들 앞에서 시늉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좋은 것’을 가르쳐 주겠다며 백아가 진원에게 입술을 가져다 댔던 날, 그날에서야 진원은 깨달았다. 정 부인이 말씀하신 ‘형수님’이란 호칭의 의미와 무게를 말이다.
백아의 행동에 놀란 진원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백아의 입술을 피한 진원은 사색이 되어 백아와 떨어졌다.
입맞춤을 실패한 백아는 진원이 피한 이유를 모르고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원은 난생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버럭 성을 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질겁한 진원의 외침에 오히려 백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
“‘좋은 것’이 싫어?”
백아는 정말 이해하지 못한 순진한 낯으로 물었다. 진원은 백아의 대답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입만 벙긋대었다. 백아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재차 진원에게 입술을 가까이 했다.
진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제게로 다가오는 백아를 밀어내었다. 그리고 ‘알아 버렸다’. 그리 알고 싶지 않았던, 존경해 마지않는 형님의 내밀한 사생활을 말이다.
“나랑 이걸 왜 해?”
“잠을 같이 잔 사람과 하는 거잖아.”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헌원이 그랬는데. 헌원과는 매일 하는걸?”
이상해하는 기색 전혀 없이 대답하는 백아의 말에 진원은 무엄하게도 ‘이 망할 형님!’ 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존경하는 형님이지만 이건 정말, 백아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두었길래 백아의 반응이 저러한 건지!
진원은 자신이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회상했다. 그 상황에서 그 말을 육성으로 뱉지 않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말이다.
물론 헌원은 다른 뜻으로 한 이야기였다.
백아가 자신 아닌 누구와도 입을 맞추는 일이 없도록. 백아는 헌원과만 한 침소를 쓰고 헌원과 함께 잠드니 헌원으로선 충분히 고심한, 합리적이고 적절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헌원은 백아가 놀다 지쳐 가끔 같이 낮잠을 자곤 했던 진원까지 그 범주에 포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나쁜 형님! 못된 형님! 이, 이, 도둑놈!’
의아해하는 백아를 앞에 두고 화를 내던 진원은 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멈칫했다. 무언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감각에 순진한 낯의 백아를 다시 보았다. 백아는 여전히 진원이 왜 화가 났는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서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거다. 헌원의 고충을 어렴풋이 짐작한 진원은 진이 빠졌다. 답답해진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아는 진원에 한해 심술궂기는 하여도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제 손에 들어온 좋은 물건이나 맛난 음식들을 나누길 좋아하는 백아는 그래서 헌원이 준 선물까지도 나누어 가끔 헌원을 속상하게 했었다.
진원은 형님의 고심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그러나 망할 형님이란 말은 취소하지 않기로 했다. 형님의 곤란보단 자신의 곤란이 우선이었다.
진원은 여전히 순진한 낯을 한 백아에게 우기다시피 하여 백아에게 ‘좋은 것’을 하려면 한 침상에서 자야 한다는 단서를 추가했다.
“너와 나는 대청에서나 같이 잤잖아.”
그렇게 말해도 백아가 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라 진원은 다른 말로 쏘아붙였다.
“그러면 유모들이나 단이와도 좋은 것을 할 거냐?”
진원의 말에 백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렸을 적엔 유모나 단이와도 대청에서 같이 잠든 적이 있었다. 백아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리고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헌원이나 진원이 아닌 단이나 유모들과 입을 맞춘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긴 한 모양이었다.
“거봐, 말이 안 되지?”
그제야 이해한 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원은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진원은 그때의 간 떨어지는 기분이 떠올라 헌원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백아에 대한 일이라지만 그런 일을 형님께 제 입으로 고하기는 껄끄러웠다.
형님께서 하셨다는 그 각인은 소유욕이 어마어마해진다던데. 진원은 헌원에게까지 쫓기기는 싫었다. 그러한 연유로 진원은 제가 짐을 싸 산사로 도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지나고 백아가 개화를 하면 아무리 글공부를 싫어하는 백아라도 자연히 알게 될 터다. 그때엔 제대로 형수님으로 모실 수 있을 테니 그때쯤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아직은 그, 크흠, 흠, 그 뭐냐, 접문만을 하시는 듯하니 백아가 개화하여 음양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으면 무언가 달라져도 달라지리라. 실제로 백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진원만 없었던 일로 넘기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터였다.
산사라 해도 승상 댁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가끔 정 부인이 다녀가거나 진원이 책을 구할 겸 내려와 들르곤 해 집안 소식은 알고 있었다.
진원은 요사이 백아가 이야기책을 읽으며 글공부를 한다는 말에 일부러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세속서를 구했다. 워낙 인기 있는 책이라 선물용의 새 책을 구하기 쉽지는 않았으니 선물로써도 가치가 있고, 인기 있는 책이니 그만큼 세속사도 많이 담겨 있으리라. 읽다 보면 무엇이라도 배우는 게 있을 터다.
백아도 세상사를 알아야 한다는 게 진원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쯤은 저 들렀다 간 거 아실 거예요. 지금 다시 들르면 저 백, 아니 형수님께 죽어요.”
진원이 손사래까지 치며 거부하는 통에 헌원은 더 권유하지 못하고 그쯤에서 진원과 헤어졌다.
헌원은 별채로 돌아와서도 진원의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질색하는 진원의 표정과 행동이 자꾸 눈에 밟혔다. 무언가 찝찝하긴 한데, 연유를 영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미 산사로 돌아간 녀석을 불러올 것도 아니라 이상한 걸리적거림만 남았다.
백아를 품에 안고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책 읽기에 영 집중을 하지 못하자 백아가 책장을 덮어 버렸다. 기세 좋게 몸을 돌린 백아는 한 박자 늦게 의아해하는 헌원을 덮쳤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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